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6화
“출정한다!”
휴식 시간은 잠깐에 불과했다.
장비를 챙겨 떠나는 용병들의 뒤를 시안과 학생들도 따랐다.
그리고 시작된 설산의 수색.
이미 대부분의 구역은 수색이 완료되어 있고 남은 구역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곳을 돌며 하이오크를 색출해 토벌하는 것이 용병단의 목표였다.
“곳곳에 유적의 잔해들이 남아 있지? 그류페인은 옛날엔 마도사들의 성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은 잔해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얘기긴 하지만.”
눈과 얼음만이 덮여 있는 고지대에 비해 중턱까지는 아직 침엽수림과 녹색 지대가 꽤 보인다.
그 사이사이에 석재로 세워졌던 건물의 잔해 따위가 보이고 있었다.
그걸 가리키며 테일 교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현장학습답게 이론이나 역사 공부도 빼놓지 않는 모양.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거의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귀담아들으라는 것이 무리였다.
언제 어디서 하이오크의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질지 알 수 없는 상황 아니던가.
부우우우우우―!
“왔다!”
긴장하고 있던 보람이 있었을까. 소리가 들리자마자 학생들은 곧바로 반응할 수 있었다.
아까와 같은 기습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잔뜩 벼르며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짜져 있어!”
“방해하지 말고 구경이나 해!”
용병들이 거칠게 소리치며 학생들을 뒤로 물렀다.
그 박력 넘치는 성량에 학생들이 주춤거린다. 그사이 용병들은 이미 하이오크들과 맞서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저 뒤에서, 일행의 짐만 지키며 견학을 할 뿐이었다.
‘용병이 서른이 좀 넘고, 하이오크도 그쯤 되는군.’
시안이 그들의 싸움을 자세히 관찰했다.
아까 겨우 10마리의 기습으로 당황했던 이쪽에 비해 용병들은 거의 같은 머릿수였음에도 수월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하얀 늑대를 탄 개체가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하긴 했다.
아마 서른 마리 모두가 늑대를 타고 있었더라면 용병들도 고전을 면치 못했으리라.
‘그래도 우리보다는 확실히 잘 싸워.’
검을 휘두르는 것이나 마법의 출력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경험의 차이가 나오고 있었다.
용병들은, 그야말로 실전에서 다져진 기술이라는 듯 적재적소에 알맞은 대응을 하며 효율적으로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와아…….”
“진짜 칼밥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다르네.”
용병들의 전투를 보며 학생들이 눈을 빛냈다.
학생들은 대부분 가문이나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나름의 고급 검술을 배운 이들이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도 용병들의 검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오로지 실전에서 단련된 그들의 검술. 그것엔 정석의 검술에선 볼 수 없는, 날것만의 날카로움이 있었다.
극도의 효율을 추구하는 마법의 활용법 역시 마찬가지였고.
‘이자크 블라텐.’
그런 와중, 시안은 이자크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용병들의 누구보다 선봉에 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으레 지휘관이란 뒤에서 지시만을 내리는 이미지를 상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타입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지장(智將)형의 지휘관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선봉에서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맹장(猛將)형의 지휘관 역시 있게 마련이었다.
이자크는 후자였다.
촤악!
그의 검에 마지막 하이오크가 절명한다. 오크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이자크의 검을 가득 적셨다.
하얀 검신이 피를 빨아들여 완전히 붉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러는 사용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시안이 원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이자크 블라텐. 마스터급의 경지에 이른 뛰어난 검사.
이번 현장학습에서 그가 가장 기대하는 것이 그의 검을 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그 역시 마스터의 길을 걷고자 하는 몸. 앞서 나간 선배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고작 서른의 하이오크로는 그의 오러를 뽑아낼 수 없는 것 같다.
“대충 정리하고 바로 출발한다!”
잠깐의 휴식을 겸해 전장의 정리가 이어졌다.
이것에는 학생들도 투입되었다.
잡일만 시킨다고 불평하는 학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불만 없이 정리를 마쳤다.
그렇게 산을 돌며 몇 번의 전투가 이어지고.
한나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블라텐 용병단이 토벌한 하이오크의 숫자는 100을 가뿐히 넘었다.
서서히 해가 진다.
용병들이 회군하여 주둔지로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 전투.
거기서 시안은 이자크의 검을 볼 수 있었다.
“귀찮게 하는군.”
절벽 너머에서 손도끼와 돌덩이 따위를 던지는 하이오크들.
이쪽의 마법도 닿기는 한다만 그걸로는 모자랐다. 블라텐 용병단은 마법사보단 검사들이 많은 용병단이었다.
“크칵카!”
“카락! 카!”
팔 두께만 해도 어지간한 사람의 허벅지만 한 하이오크들이다.
놈들이 던지는 도끼나 돌멩이는 어린애 장난으로 치부할 만한 게 아니었다.
맞았다간 중상을 면치 못할 매서운 투사체들.
그 정면에 이자크가 자리했다.
당연히 그를 향해 공격이 집중되었으나, 그의 주위를 흐르는 은은한 기운이 모든 투사체들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오러.’
시안이 그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발하는 붉은 기운을.
그 기운은 이자크의 검에 모이더니 잘 벼려진 칼날과 같이 응축되었다.
시안의 정돈되지 못하고 피어오르는 오러와는 달랐다.
보다 효율적인, 낭비 하나 없는 형태.
이자크의 오러 운용이 시안보다 월등하다는 증거였다.
다만 저 응축된 오러가 마스터의 증표는 아니다.
저 수준은 최상급의 하이나이트의 경지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한다. 테일 교관도 할 수 있다.
마스터의 증표는 따로 있었다.
‘심상세계.’
그들은, 단순히 검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심상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자.
심상세계를 구현하는 존재인 하이마스터에 이르기 위한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
사실 심상세계란 명칭은 5대 마탑이 정의한 것으로, 본래 그것을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다.
누구는 ‘맹세’라고 얘기하며 누구는 ‘숙원’이라 칭한다. 누군가는 그걸 ‘사명’이라 정의한다.
무엇 하나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수억의 사람이 있다면 수억의 심상이 있는 법.
그것이 가지는 형태도 수억에 달하게 마련이었으니.
이자크는 그것을 자신의 ‘길’이라 칭했다.
[ 적의 피로 목을 적시고. ]
단 한 구절이었다.
이 정도 적에게 그 이상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의 오러가 피를 탐하는 야수와도 같이, 혹은 패도를 걷는 구도자와도 같이 변화했다.
모순되어 보이는 인상. 그러나 적에게 자비가 없다는 점에선 공통되었으니.
콰과과과과광!
폭사된 오러에 건너편 절벽이 성대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저 오러에 감쌌을 뿐인, 특별한 기술도 없이 휘둘렀을 뿐인 검.
단단하게 얼어 있던 바위 절벽이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당연히 그 위에 서 있던 모든 적들도 마찬가지.
하얀 절벽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휘유~ 역시 대장은 우리가 없을 때 더 세다니까요.”
옆에 있던 듀나스가 휘파람을 불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자크의 오러인 ‘혈기린’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주제에 너무 광범위하고 잔혹했다.
지금이야 먼 곳으로 기운을 쏘아냈을 뿐이라 이 정도지, 본격적으로 오러를 일으켜 검을 사용하면 주변을 살피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허튼소리.”
그러나 듀나스에겐 부럽기만 한 그의 오러는, 아이러니하게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혈기린’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하이마스터로 오르기 위한 길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스릉.
그가 검을 집어넣고 뒤로 돌았다.
역시 우리 대장이라는 눈빛을 보내는 부하 용병들과 처음으로 본 마스터의 오러에 말을 잃은 학생들.
이자크가 짧게 얘기했다.
“돌아간다.”
그 장소를 떠나기 직전, 시안이 고개를 돌려 건너편 절벽에 남은 흔적을 보았다.
이자크의 ‘길’.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싶다면 언젠가 자신도 찾아야 하는 그 무언가.
오러 혈기린.
그것이 시안의 두 눈에 깊숙이 새겨지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학생들은 저녁 식사 당번이 되었다. 자신들이 먹을 것 외에도 용병들의 식사까지 만들어야 했다.
식재료는 용병들이 제공하였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좋아. 그럼 인원을 나눠서 땔감을 주워 올 애들이랑 재료를 손질할 애들이랑 조리할 애들이랑 그리고 또…….”
반에서 나름 목소리가 큰 학생을 중심으로 적절히 인원이 배분되었다.
시안은 땔감 담당이다.
그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숲으로 들어갔다.
낮에 보았던 이자크의 오러가 계속해서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조리는 잘 부탁할게.”
“으, 으응.”
한편으로, 에르제는 조리반에 당첨되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고 몇 명이 더 있다.
그 사이에서 에르제가 자신 없다는 듯이 어깨를 움츠렸다.
요리를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잘하지도 않는데.
다만 그 ‘약간 할 수 있다’는 수준이 학생들 사이에선 제일 잘하는 수준이라 조리반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녀 외에는 대부분 가문에 따로 요리사를 두고 있던 아이들이었으니까.
“에르제, 어떻게 하면 돼?”
“우리도 팬케이크나 한두 번 만들어봤지 요리는 처음이라…….”
“으응, 일단 솥부터 가져오자. 간단한 빵이랑 수프면 될 거야.”
매우 드물게도 에르제가 지시를 내리는 입장이 되었다.
학생들이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은폐의 마력으로 그녀가 잊히는 일은 없었다.
그 사실에 약간의 다행을 느끼며, 그러나 수십 명이 먹을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은 여전한 채로 그녀가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 봤자 야영지에서 할 수 있는 요리라곤 수프를 끓이는 정도밖에 없었지만.
“으음…… 뭐 이 정도면 되려나.”
잠시 후, 완성된 수프를 그릇에 담아 한 모금 마셔보며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별로 맛있다곤 할 수 없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간도 맞았고.
“괜찮은 거 같은데?”
“이런 데서 뭐 고급 요리를 바랄 수도 없잖아. 따뜻한 음식이 어디야.”
다른 조리반의 학생들도 얼추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이 빵과 육포를 준비하러 가고, 에르제는 수프의 마무리를 위해 불 옆에 남았다.
그때, 시안이 숲에서 가져온 땔감을 불 옆에 쏟아놓았다.
“아, 시안. 고생 많았어.”
“너도.”
에르제의 말에 짧게 대답하며 시안이 솥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의문의 빛이 떠오를 때쯤, 시안이 뚜벅뚜벅 솥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에르제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 수프를 뜨더니 살짝 맛을 보았다.
“아.”
그릇에 입을 대는 시안을 보곤 에르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방금 내가 맛볼 때 썼던 그릇인데.
반대로 시안의 얼굴은 살짝 굳어진 채였다.
아니, 굳어졌다기보단 생각에 잠긴 표정이라 하는 게 옳으리라.
그가 말없이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후, 칙칙하게 생긴 버섯을 한 아름 따 가지고 왔다.
“시안?”
의아해하는 에르제의 옆에서 그가 버섯을 잘게 찢어 수프에 듬뿍 때려 넣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조미료통에서 조금씩 집어 뿌리고는 국자로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맛을 보았다.
“흠.”
그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다.
그가 똑같이 그릇에 떠서는 에르제에게 건넸다.
머뭇거리며 그걸 입에 가져간 에르제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맛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맛있어졌다.
진한 버섯의 향이 강조되면서도 기존의 재료들의 맛도 전혀 해치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파는 전문적인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야영지에서 먹을 만한 맛은 아니었다.
“뭐야 이거! 엄청 맛있잖아!”
“학생들 요리 솜씨가 제법인데? 누가 만든 거야?”
“당장 여관 하나 차려도 되겠는데?”
“크! 와인 땡긴다! 술 어디 없냐?”
그날 저녁, 조리반은 엄청난 극찬을 받았다.
용병들은 물론 다른 학우들 역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설마 이런 험지에서 이 정도 수프를 맛볼 줄은 몰랐다면서.
조리반 학생들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에르제였으나 그녀 또한 이 열광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어버버할 뿐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 한층 더 풀린 용병들과 학생들의 분위기.
시안은 그 한쪽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괜찮군.’
혼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빵을 찢어 수프에 찍으며.
그렇게 훈훈한 저녁 시간이 지나고, 며칠이 지났다.
“이제 우리는 산 정상에 있는 놈들의 성채를 칠 예정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이자크가 주둔지의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류페인 공략의 마지막 수순. 하이오크들의 본거지를 치는 일.
그가 학생들 쪽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너희는 이 주둔지의 수비를 해줘야겠어.”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