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4화
이자크는 에버웨일을 떠나기에 앞서 테일 교관을 만나러 갔다.
이런 귀찮은 일을 가져온 것에 대해 불평도 한번 해주고, 업무 얘기도 잠깐 나눠볼 생각에.
“오, 이자크! 언제 왔나?”
“아까. 이제 갈 시간이야.”
“벌써 가게?”
“누구 때문에 부하들이 아주 불만이 가득해서 말이지.”
“하하, 미안미안. 그래도 얼마나 보람찬가. 미래의 새싹들에게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 아닌가.”
“그런 걸 좋아했으면 내가 너랑 같이 교관이나 하고 있었겠지.”
이자크의 말에 테일 교관이 웃었다.
오랜만에 친우의 얼굴을 보니 즐거웠다. 이 나이가 되면 일에 치이고 뭐 하고 하느라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뭐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나도 따라가는 데다 다들 우수한 학생들이야. 발목을 잡진 않을 거야.”
“그 학생들 말인데. 명단에 아그리드가 있더군.”
“맞아. 그 아그리드의 자제가 맞네. 자네도 직접 보면 아주 놀랄걸?”
“놀라기는. 질리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음? 그렇진 않을 거 같은데?”
이자크와 테일 교관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심각한 인식의 오류가 있었다.
시안 아그리드에 대한 인식 말이다.
“시안 그놈은 답이 없는 놈이야. 그런 놈이 그 검왕의 아들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자크가 옛날 일 하나를 떠올렸다.
그가 식객으로 아그리드 가에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연병장 구석에서 홀로 단련을 하던 그는 거만한 태도로 기사들에게 다가가던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다.
어린 녀석이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턱짓으로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던 것은, 그래, 뭐 이해한다.
후작가의 장남쯤이나 되니 그렇게 길러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아~ 아빠가 니네랑 대련이라도 하면서 검을 배워오라고 그랬는데 말야. 그냥 대충 시늉만 내자. 져줄 거지?
그 말에 그나마 쌀알만큼 남아 있던 호기심도 모두 사라졌다.
세상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온갖 막대한 권리를 가진 아그리드 가는 그에 맞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큰 의무는, 강자로 있을 의무. 만인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할 의무.
하지만 그날 시안의 태도는 그런 것들을 존중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흠.”
테일 교관이 그의 말을 모두 경청했다.
과연 이해가 되었다. 이자크의 말은 테일 교관이 예전부터 들어오던 시안의 소문과 일치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소문이 아닌, 그가 직접 눈으로 봐온 시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자네가 겪은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네. 그냥 한번 지켜보게나. 자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으면 좋겠군.”
이런 것은 말로 설명하기보단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그런 생각에 테일 교관은 굳이 그가 봐온 시안의 모습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이자크가 고개를 갸웃했다.
과거 테일 교관이 교관이 되기 이전, 그 역시 블라텐 길드의 일원이었다.
일원 정도가 아니라 이자크 본인과 함께 길드를 창설했던 창립 멤버 중 하나다.
예전부터 둘이 굉장히 많이 부딪쳤었지.
그 경험으로 보건대, 테일 교관은 허투루 저런 소리를 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생각이 달라지기를, 즉 시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대체 왜?
‘뭐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군.’
잠시 의문을 가졌던 이자크였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은 치워버렸다.
지금의 그에겐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검노. 확실히 대단하군.’
방금 보았던 에버웨일의 총장, 제레흐 폰 베르그하이젤.
굳이 검을 맞대보지 않았지만 절절히 느껴졌다. 아직 자신은 멀었다는 것을.
입가에 쓴맛이 맴돌았다.
이미 마스터라 하는 높은 경지에 발을 디딘 그였지만 당연히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의 목표는 11번째 하이마스터가 되는 것.
그 길을 이미 걸은 사람이 있다. 검노를 포함해 이미 10명이나.
그런데도 자신은 벌써부터 정체되어 있을 뿐이라니.
설산의 하이오크를 토벌하는 의뢰를 받은 것도, 그걸 견학하고 싶다는 테일 교관의 요청을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결코 받지 않았을 의뢰들이었지만 정체된 실력을 돌파할 계기를 찾기 위해 여러모로 움직여 보는 그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별다른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지.”
“그래, 잘 가게나.”
초조한 그와 달리 속 편하게 손을 흔드는 테일 교관을 뒤로하고.
이자크 블라텐이 에버웨일을 떠났다.
* * *
설산 그류페인.
거인들의 무덤에 있는 산 중에 하나로 일전에 갔던 쿠르트 산과 달리 훨씬 더 북 쪽에 붙어 있는 곳이다.
요정궁 빙하백령의 국경에 꽤나 인접해 있는 곳으로, 때문에 그곳으로 가기 위한 루트도 정해져 있었다.
테일 교관의 인솔하에 도시 내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이용.
빙하백령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까지 이동한 다음 거기서 마차를 빌려 내려온다.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는 만큼 굉장히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루트다.
다만 빙하백령의 국경에서 그류페인까지 며칠은 마차를 타야 하긴 했다.
“아~ 엉덩이 아파.”
“마차만 타고 가는 데 왜 이렇게 힘드냐.”
“싼 마차라 어쩔 수 없어…….”
서른 명 이상의 워프 게이트 대금을 치르느라 다른 경비는 모두 최대한 줄여져 있다.
덕분에 마차도 구색만 겨우 갖춰놓은 값싼 녀석이었다.
그마저도 서른 명의 학생을 모두 태우려면 몇 대씩 빌려야 했으니.
한 번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에 멍이 들 것만 같은 물건인 것은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란은 결국 안 왔군.’
식사를 마치고 난 휴식 시간, 시안이 쉬고 있는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빙하백령을 경유하여 오느라 모두 두껍게 입고는 뜨겁게 우려낸 차를 마시고 있었다.
1반의 학생들 대부분.
그러나 단 한 명, 란만은 빠져 있었다.
일전에 아버지를 만나러 자카르타로 간다고 하고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시험 전까지만 돌아온다면야 현장학습 하나 빠지는 건 문제 없었으니.
“자, 쉬면서 들어라. 이번에 갈 장소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마.”
테일 교관이 짝짝, 박수를 치며 학생들의 주목을 모았다.
이제 이틀 정도만 지나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슬슬 현장학습의 내용에 대해 설명할 때가 온 것이다.
“목적지는 다들 들었겠지만 설산 그류페인이다. 빙하백령과 가깝긴 하지만 엄연히 거인들의 무덤에 속해 있는 지역이지.”
그 말은 다시 말해 거인의 사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가득 찬 장소라는 뜻.
그 마기의 영향을 듬뿍 받은 마물들이 우글거린단 소리다.
“그류페인에 서식하는 마물은 하이오크다. 보통의 평야에 서식하는 오크들보다 훨씬 덩치도 크고 강력하지. 피부도 갈색이고.”
“피부색이 갈색이면 더 강한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녀석들 특징 중 하나야. 아마 그류페인의 추운 날씨 때문에 그렇게 적응한 거겠지.”
갈색의 피부는 그류페인의 하이오크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 불리운다.
뿐만 아니라 멧돼지의 엄니마냥 솟아 있는 두꺼운 엄니.
스스로 건축은 물론 무기까지 만들어 장비할 정도로 높은 지성.
여러모로 까다로운 놈들이라 알려져 있다.
“오크랑도 만나본 적 없는데 하이오크라니…….”
어느새 온 건지 은근슬쩍 다가온 에르제가 얘기했다.
“완전히 다른 종이라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그, 그래?”
“더 빠르고 강하고, 머리도 좋아. 나름의 문화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그류페인의 하이오크들은 평야의 오크들과는 완전히 별개의 생물이라고 보면 되었다.
설산에 천혜의 요새를 짓고 살아가며 짐승들을 사냥하는 타고난 사냥꾼들이다.
그리고.
‘사냥감이 떨어지면 산 아래까지 내려와 패악질을 부리는.’
그 탓에 매년 피해를 입는 민가가 결코 적지 않았다.
심할 때는 빙하백령의 국경까지 마음대로 침범해 약탈을 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완전히 산적이나 다름없는 놈들이었다.
“블라텐 길드가 받은 의뢰는 그 골치 아픈 녀석들을 깡그리 토벌해 달라는 의뢰다. 요정궁에서 직접 받았다고 하는군.”
“오…….”
“궁에서?”
그 말에 반요정 학생 몇몇이 눈을 빛냈다.
빙하백령의 출신답게 그들은 국경에서의 하이오크들의 패악질을 들어본 적이 있다.
본래는 일개 영지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것인데, 드디어 궁에서 직접 나서서 의뢰했다는 말에 반응한 것이다.
“다만 의뢰 자체는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하더군. 남은 건 인근 잔당들의 토벌과 마지막 남아 있는 성채를 공략하는 것. 우리가 견학할 건 그 작업이다.”
대부분은 뒤에서 견학만 하게 될 것이다. 직접 싸울 일은 많지 않다는 게 테일 교관의 설명이었다.
그 말에 학생들은 반쯤 안도하면서도 반쯤은 아쉬워했다.
위험한 것은 없을수록 좋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 싸워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텐데.
“너무 아쉬워하지 마라. 뒤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얻어가는 것이 있을 테니까.”
“뭐 그래도 편할 거 같아서 좋네요.”
“이 추위만 좀 어떻게 했으면 좋으련만…….”
그 뒤로도 잠시 테일 교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은 블라텐 길드의 주둔지에 도착해 짐을 푼다.
그리고 성채 공략에 앞서 인근의 잔당들을 토벌하는 것부터 구경할 예정이다. 공략 중에 뒤를 공격당하면 귀찮아지니까.
그 후엔 후방부대로 성채 공략에 참가.
후방부대라곤 하지만 절대 앞에서 싸울 일은 없는 위치다. 부상자의 처치를 돕거나 보급품을 나르거나 그런 일만 하게 되겠지.
“일단 당장 할 얘기는 이걸로 끝이다. 그럼 10분만 더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자.”
“예에~”
의뢰의 얘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에르제가 잠시 머뭇거리며 시안을 힐긋거리더니, 슬며시 다가와 옆에 앉았다.
미묘하게 거리가 떨어져 있는 위치였다.
“춥긴 진짜 춥다. 그렇지?”
“그러게. 차 한 잔 마실래?”
“응.”
시안이 끓여놓은 물을 따라 차 한 잔을 우려냈다.
평소 쓰는 고급스러운 잔이 아닌 투박한 나무 컵.
“어? 이거…….”
“그때 샀던 웨일문의 블렌딩 차. 맛이 좋아서 요즘도 종종 가고 있거든.”
“그, 그래?”
에르제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시안에게 나무 컵을 받았다.
왠지 기뻤다.
그날의 일이, 자신뿐만 아니라 시안의 기억 속에도 확실히 남았다는 생각에.
그녀가 차를 홀짝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맛있다…….”
“괜찮지?”
“응! 근데 원래 이런 맛이었나?”
“잔 때문에 그래.”
그녀가 들고 있는 나무 컵은 그냥 컵이 아니었다.
피롯이라는 과일나무로 제작한 것으로 시안이 이 찻잎에 맞춰서 일부러 주문 제작한 물건이다.
과일나무 특유의 향기가 이 차의 향과 은은하게 어우러진다.
시안은 딱히 먹을 걸 가리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염노랑 둘이 살 때는 번갈아 가면서 식사를 만들기도 했었고.
“좋다…….”
“그러게.”
두 사람이 차를 홀짝이며 얘기했다. 날씨가 추운 만큼 밖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교관님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이번 일은 별로 싸울 일은 없나 봐.”
“아쉬워.”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에르제가 웃으며 얘기했다.
안 그래도 그녀도 생각하고 있었다. 시안이라면 아쉬워할 것 같다고.
그래도 그녀 입장에선 싸울 일은 없는 것이 좋았다.
기왕이면 평화롭게 견학만 하고 오는 것이 당연히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지나가고.
부우우우우우―!
그류페인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태운 마차는 습격을 받았다.
* * *
설산 그류페인의 초입.
마차가 들어올 만한 나름 넓게 나 있는 길.
그 길에서 학생들을 태운 마차가 하얀 늑대를 탄 하이오크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다.
그 모든 것이 보이는 언덕 위에 말을 탄 두 사람의 사내가 있었다.
블라텐의 길드장 이자크와 그의 오른팔 듀나스.
“안 도와줘도 됩니까?”
듀나스가 이자크를 보며 얘기했다.
두 사람은 오늘 도착할 예정인 학생들을 마중하러 나왔다.
그런데 나와보니 습격을 받고 있는 상황.
저 아래에서 마차 밖으로 튀어나오는 학생들을 보며, 이자크가 얘기했다.
“이대로 지켜보지.”
“괜찮습니까?”
“저쪽엔 테일 녀석도 있으니까. 열 마리 정도로 위험하진 않을 거다. 그리고.”
이자크가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알 만한 얼굴을 찾았다.
흔치 않은 검은 머리를 한 남학생.
“이 정도도 자력으로 해결 못 하면 이 산을 오를 자격이 없어.”
시안 아그리드를 보며, 그가 차갑게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