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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53화 (5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3화

한 주가 지난 후, 비스트 길드에서 연락이 왔다. 길드 본부로 상품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그날 시안이 획득한 구슬은 총 15개.

케일 언덕에 숨겨진 구슬은 이보다 몇 배는 되었지만 아무래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나, 분실된 것이나 그런 것들이 많았나 보다.

비스트 길드 입장에선 15개의 상품만 준비하면 되니 훨씬 예산을 아낄 수 있었겠지.

‘이 건물이었던가.’

시안이 동아리들이 모여 있는 별관에 도착했다.

일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는 그 건물이다. 꼭대기의 회의실에서 데미안, 쿠르간, 유연과 만났었던.

그가 승강기에 올라 비스트 길드가 위치한 층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프시케의 건은 아쉽게 됐군.’

녀석에게 지옥의 정보나 악마들의 습성에 대해 얼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상위 악마들의 정보도.

그것들을 들은 후 시안이 얘기했다.

목줄로 명령을 하진 않을 테니 한 번 더 싸워보지 않겠냐고.

좀 더 제대로 겨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목적은 다른 것이었다.

프시케의 힘을 조금 더 흡수해서 새로운 검을 얻고 싶었다.

[절대 싫어―! 동포한테 먹힌 힘은 안 돌아온단 말야!]

그러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아무래도 너무 속이 보였나 보다. 프시케의 힘이라면 아마 얼음과 관련된 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창해랑 같이 쓰기 좋았을 텐데.’

뭐 싫다는데 어쩔 수 없다.

적절한 기회를 노려보도록 하자.

“왔구나, 시안!”

비스트 길드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를 맞이한 것은 리더인 쿠르간이었다.

시안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덩치다…….

“이쪽이다. 따라와라.”

시안이 쿠르간의 뒤를 따라 본부 한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 방 안에 있는 수인들에게서 호기심 짙은 시선이 꽂혀왔다.

시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 학생들에게는 평소와 같은 거부감이 거의 없었다.

‘자카르타 출신이기도 하고 선배들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아무래도 시안의 소문은 소메르 내에서 더욱 악독할 수밖에 없다. 타국인 자카르타나 빙하백령에까지 그렇게 험악하진 않겠지.

실제로 정령술 수업 때도 반요정들에게 심하게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기억은 없다.

“시안. 우리 자카르타가 용병업으로 주로 먹고산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때 쿠르간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야 자카르타의 용병은 유명하니까요.”

“뭐라고 유명한데?”

“용맹하고 강인하기로.”

“크하하하! 그래, 맞지, 맞지! 잘 알고 있구만!”

딱히 빈말은 아니었다.

자카르타의 수인 용병은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어느 전장에서든 환영받는다.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소메르에서 뛰어난 실력자들은 대개 귀족들의 기사가 된다. 용병은 그보다 급이 낮은 이들이 하는 인식이다.

그러나 자카르타에선 그런 게 없었다.

가문의 전사든 길드의 용병이든 동등한 기준으로 대우받는다.

소속이 어디든 간에, 동등하게 실력으로.

그러다 보니 자카르타엔 실력 있는 용병들이 많았고 덕분에 용병업도 성행하고 있었다.

소메르의 기사들, 자카르타의 용병들, 그리고 빙하백령의 수호요정들.

각국에서 알아주는 전투 집단들이다.

“용병은 가문에 얽매여 있지 않지. 가고 싶은 영지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정착을 원하면 그곳의 영주에게 얘기하면 돼. 뭘 하든 자유가 있다는 얘기야.”

“예, 뭐.”

갑자기 용병의 장점을 다다다 얘기하는 쿠르간.

살짝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완전…….

“그래서 말인데, 시안 너 우리 비스트 길드에 들어오지 않을래?”

영입 제안.

이걸로 두 번째였다. 영지에 있는 천둥마탑에서 받았던 것과 지금 받은 것.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 후작가의 후계자를 ―대외적으로는 후계자다― 빼내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양하겠습니다.”

“으음? 왜?”

“가문을 이어야 하는 제가 어떻게 용병 길드에 들어가겠습니까.”

“용병 길드라곤 해도 학생들의 길드다. 활동도 졸업 전까지만 하면 되니까 부담 가질 필요는 없는데. 오히려 용병 일을 수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닐까?”

시안이 잠깐 걸음을 멈추곤 눈을 깜빡거렸다.

쿠르간이 그런 그를 의아하게 보았다.

“왜 그래?”

“아뇨…… 좀 의외라서.”

첫인상도 그렇고 보물찾기 때도 그렇고 대책 없이 일만 벌이는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된 논리가 있지 않은가.

보기보다 두뇌파인가?

“너…… 지금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이상하긴요.”

오히려 칭찬인데.

“아무튼 거절하겠습니다. 자카르타에선 어떨지 몰라도 소메르에서 대귀족의 후계자란 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간단하지 않아?”

“얽히고설킨 게 많다는 뜻입니다. 가문의 수장이 될 자가 그렇게 쉽게 남들 밑으로 들어갈 순 없습니다.”

“구시렁대는 놈들이 있으면 주먹으로 다스리면 되는 거 아니냐.”

“그게 쉽지가 않은 게 귀족사회란 곳이라서요.”

뭐 사실 다 핑계긴 했다. 어차피 자신은 후계자가 아니다. 자신이 뭘 하든 간에 가주는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

그냥 비스트 길드에 묶이기 싫어서 하는 핑계에 불과했다.

“어차피 에버웨일의 학생은 따로 임무를 받을 수 있는 걸로 아는데 굳이 교내 길드에 들어갈 이유가 없군요.”

“그러냐…… 쩝, 아쉽구만. 널 빼내 올 수 있으면 데미안 녀석한테 한 방 먹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목적이었습니까?”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크하하하!”

거절을 당했음에도 쿠르간이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 본인이 제안을 하긴 했지만 시안이 정말로 비스트 길드에 들어와 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한번 말해본 것일 뿐.

그가 한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시안이 받을 선물들이 쌓여 있었다.

총 15개. 그만큼이나 있다 보니 보따리 하나가 거의 가득 차 있었다.

“전부 가져가라! 다 네 거니까.”

“감사합니다.”

시안이 살짝 웃으며 짐을 챙겼다. 이 정도나 되면 꽤 값이 나가리라.

받을 걸 받고 길드를 떠나는 그에게 쿠르간이 얘기했다.

“뭐 그래도 언제 일 하나 같이해 보자고. 너한테 흥미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죠.”

떠나가는 시안의 뒷모습을 보며 쿠르간이 씨익 웃었다.

이 언질만으로도 그를 부른 보람이 있었다.

‘오러를 쓰는 1학년이라.’

에버웨일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1학년 중엔 시안 외에는 없었고 심지어 2학년 중에도 데미안을 포함해 단 두 명뿐.

그리고 3학년에도 통틀어 몇 되지 않는다.

때문에 시안의 존재가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으음~ 어딜 데려가야 저 녀석이 용병 생활의 매력에 푹 빠질라나.”

그런 고민을 하며 쿠르간이 동아리 방의 문을 닫았다.

* * *

“어때. 슬슬 1학기도 절반이 넘어가고 있는데 잘 적응은 되나?”

1학년 1반의 교실에서 테일 교관이 학생들을 보며 얘기했다.

“너무 힘들어요~”

“수업 좀만 줄여주시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이놈들아.”

책상 위로 늘어지며 불평하는 학생들을 보며 테일 교관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눈엔 보였다. 학생들이 말로만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힘들어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건 테일 교관에게 있어선 정말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그만큼 열의를 가지고 학창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항상 이 시기에 신입생들이 제일 힘들어하긴 하지. 그런 너희들을 위한 좋은 소식이 있다. 소풍의 일정이 잡혔어.”

“네?”

“소풍이요?”

“그래. 정확히는 현장체험학습이지만.”

소풍이라는 말에 순간 솔깃한 학생들이었지만, 현장체험학습이라는 단어에 다시 시든 잡초처럼 늘어졌다.

“쳇. 보나 마나 또 무슨 훈련이나 받으러 가겠지.”

“뻔하다, 뻔해. 이 학교가 하는 짓 이제 다 파악했다니까.”

“또 어디 개고생할 만한 데 던져놓고 점수 매기겠지.”

학생들의 반응에 테일 교관이 떨떠름하게 얘기했다.

“너희들 눈치가 빠르구나…….”

왜냐면 학생들이 얘기한 게 전부 맞았으니까.

에버웨일의 현장학습은, 말은 소풍이라고 하지만 피크닉 따위나 하고 오는 행사가 아니었다.

“저흰 이미 이 학교의 본질을 알았어요.”

“학생들을 굴리고 굴려서 나가떨어지게 하는 학교 맞죠?”

“진짜 숨 좀 돌리고 싶다. 방학 언제 하나~”

하하하……. 학생들의 말에 테일 교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뭐, 뭐어 아무튼! 그래도 학교 바깥으로 나가는 거니까 기분은 색다를 거야.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라구.”

테일 교관의 말에 학생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뭐 일정 전달에 앞선 약간의 넋두리 같은 것이다.

그들도 진정으로 에버웨일의 커리큘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스스로의 성장이 눈에 보이는데 싫어할 리가 없었다.

“일단 1학기에 남은 굵직한 일정은 세 개다. 이번 현장학습이랑 학기당 한 번씩 있는 학기고사. 필기랑 실기 둘 다 있으니 주의하고. 그리고 모든 일정과 수업이 끝나고 학기 말 무도회가 있지.”

“무도회!”

“그건 정말 노는 행사 맞죠?”

“혹시 무투회를 잘못 말했다거나 그런 거 아니죠?”

테일 교관이 손을 저었다. 학기 말 무도회는 정말 아무런 수작도 없이 학생들을 풀어주기 위한 행사니 걱정 말라고.

그리고 그렇게 무도회까지 모두 끝나고 나면 곧바로 여름방학에 돌입한다.

귀성하여 각자 가문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기간.

“2학기 때는 또 다른 일정이 있긴 하지만 일단 1학기는 이래. 1학기가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거야. 현장학습을 하고 오면 바로 시험 기간이고 시험이 끝나면 얼마 안 가 무도회니까.”

그렇게 보니 방학까지 정말로 얼마 안 남아 보인다.

시안이 턱을 괴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그는 방학이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염노랑 만나는 건 좋지만.’

만나고 싶지 않은 이와도 만나야 된다는 게 문제다.

방학 때 그가 돌아갈 곳은 염노와 둘이 살던 별저가 아니라 가주가 기다리고 있는 본가였으니.

‘그러고 보니 체샤도 있었지 참.’

심지어 본가엔 그 요상 망측한 아가씨도 있지 않은가.

정말이지 가슴이 뛸 요소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허락된다면 그냥 학교 기숙사에 남고 싶은 심정이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현장학습에서 우리 반이 갈 곳은 정해졌다. 내 연줄로 좋은 곳으로 찾았어.”

그가 학생들을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 자신만만한 미소에 시안을 포함한 학생들의 얼굴에 의문이 솟아올랐다.

대체 어디길래 저러지?

* * *

“블라텐 길드의 이자크입니다. 학생 명단을 받으러 왔습니다.”

“오오…… 어서 오게. 오랜만이구먼.”

에버웨일 본관의 최상층. 총장의 집무실.

지팡이를 짚은 흰머리의 노인과 단단한 분위기의 중년 사내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버웨일의 총장 제레흐 폰 베르그하이젤과 블라텐 길드의 길드장 이자크 블라텐.

“블라텐이라고 하면…… 테일 교관이었던가?”

“예. 그 자식이 하도 사정사정하길래 어쩔 수 없이.”

“허허…… 그렇다 해도 잘도 수락했구먼. 그쪽에서 맡고 있는 의뢰는 이제 거의 마무리단계라고 들었는데.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아닌가.”

제레흐의 말에 이자크의 눈이 살짝 꿈틀거렸다.

다 늙어서 이곳에 앉아 있을 뿐인 노인네가 정보 하나는 빠르군.

‘검노(劍老) 제레흐 폰 베르그하이젤.’

대륙에 있는 10명의 하이마스터 중의 하나.

현존하는 하이마스터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이다.

그런 노쇠한 몸임에도 아직도 현역이었다. 세월이 새겨놓은 총기는 일절 쇠하지 않았으니.

“어디 보자…… 테일 교관한테 맡은 서류가…… 아, 여기 있군.”

제레흐가 서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안을 살폈다.

블라텐의 임무지로 현장학습을 갈 1반 아이들의 간단한 신상 정보.

아까 얼추 훑어보긴 했으나 다시 확인해도 딱히 미비는 없어 보였다.

“블라텐씩이나 되는 길드가 하는 일이니 제대로 배울 수 있겠지?”

제레흐가 서류를 보며 얘기했다.

용병길드 블라텐.

한때 테일 교관이 속해 있던 곳이기도 한, 대륙에 몇 없는 S랭크 길드.

그 길드장인 이자크에 이르러선 마스터급에 다다른 검사다.

아직 하이마스터에 다다르진 못했다고 하나, 마스터 역시 쉽게 볼 경지는 결코 아니었다.

“그거야 학생들 하기에 달렸죠. 어차피 학생들이 배치되는 곳은 후방입니다.”

“직접 전투를 치를 일은 많지 않다 이건가?”

“그런 셈이죠. 거기서 어깨너머로 얼마나 배우느냐는 녀석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매정하구만.”

“제 자식도 아닌데 뭣하러 이뻐해 줍니까.”

제레흐가 모두 검토한 서류를 이자크에게 넘겼다.

이자크가 가볍게 훑어보았다.

그러던 중 그의 눈이 살짝 움찔거렸다.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다.

‘시안 아그리드.’

과거 그가 아직 수행 중일 때, 아그리드의 식객으로 살며 검을 사사한 일이 있었다.

그때 몇 번 보았던 아그리드 후작의 아들.

당시의 그 아이는 어렸을 때긴 했지만, 그때부터 이미 싹수가 보이고 있었다.

이자크는 그 건방진 꼬마 아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의 소문도 좋지는 않았지.’

기적적인 확률로 자라면서 철이 들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뒤에 들리는 소문으론 그런 것도 없었다.

정말 그 강인한 검왕의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책이 없는 아이.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학생들은 거의 구경만 하다 갈 테니.’

아무리 그놈이라도 피와 칼이 오가는 전장에서 사고를 치진 못하겠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드리죠.”

“그래. 몸조심하게나.”

“감사합니다.”

제레흐에게 짧게 꾸벅이곤 이자크가 총장실을 나왔다.

제레흐 혼자 남은 방안.

그가 지팡이를 짚은 채 방금의 서류 봉투를 바라보았다.

‘설산 그류페인에 위치한 하이오크 성채 공략의 현장체험학습 계획’.

서류 봉투에는 그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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