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1화
시안과 유설이 함께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와아아아아…… 다소 텐션이 낮은 환호성이 들려왔다.
내심 유설이 이기기를 바랐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이 결과에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덧붙여 이번 일로 시안이 신입생 1위란 것이 다시금 확인되었기에 더 그런 것도 있었다.
‘시안 아그리드가 1위라니.’
‘신입생 대표 인사 때부터 한 번도 안 떨어졌잖아?’
‘끄응…….’
한편으론 유설 쪽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한 모습.
그녀와 친한 학생은 거의 없었으나, 친해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은 많았다. 주로 남학생들이 많았지만.
“괜찮아. 진 건 진 거니까.”
유설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그들의 말을 대충 받아넘겼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의 머리는 복잡하기만 했다.
[겨울의 뱀이 이를 갑니다.]
[동포들은 나 말고는 전부 나쁜 늑대들이니 절대 믿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프시케…….’
어릴 때부터 프시케가 주야장천 말해오던 것이었다.
이곳엔 자신 외에도 동포들이 꽤 있다. 하지만 그놈들은 죄다 나쁜 놈들이니 믿으면 안 된다.
만약 동포와 계약한 사람을 만난다면 즉시 배제해야 한다.
그 말이 과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프시케의 말이 없더라도 마찬가지다.
프시케와 함께하는 것은 가문과 요정궁에 들키면 안 되는 사실이란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안과는 어떠한 일단락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이야~ 진짜 아까웠지. 시안 녀석 운도 좋다니까.”
“그러게 말야. 평소처럼 했으면 유설이 무조건 이겼을 텐데. 그렇지?”
“음…… 근데 시안이 썼던 거, 그거 오러 아냐?”
“에이, 설마…….”
“야, 야. 그럴 리가 있겠냐? 무슨 17살짜리가 벌써 오러를 써?”
“보나 마나 무슨 아티팩트 같은 거라도 썼겠지 뭐.”
아닌데, 그건 진짜 오러가 맞았는데…….
유설의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왠지 모르게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그녀가 다른 학생들에게서 눈을 돌려 저 멀리 혼자 서 있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
“…….”
마침 시안도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인파 너머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의심이 가득한 시안의 눈빛을 받자 유설이 살짝 어깨를 움찔거렸다.
오늘 아침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화를 먼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프시케처럼 착한 악마일 수도 있잖아.’
[겨울의 뱀이 탕탕! 책상을 칩니다.]
[착한 악마 같은 말도 안 되는 존재가 그렇게 흔할 리 있냐며 소리칩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겨울의 뱀이 고개를 젓습니다.]
[그렇게 물러선 안 된다고, 나한테 맡기라고 가슴을 칩니다.]
불안하면서도 프시케의 호언장담에 유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도와주었던 프시케다.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창고 구석에서 홀로 잠을 청할 때도, 방계의 아이들이 도를 넘는 장난을 걸어와 크게 다칠 뻔할 때도.
언제나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도와주었던 부모이자 스승이자 친우인 존재.
그녀가 저렇게 당당히 얘기할 정도라면 분명 무언가 복안이 있는 것이리라.
그렇게 믿었다.
* * *
밤. 기숙사 방에서 시안이 흑검을 천으로 닦고 있었다.
본디 이런 손질이 필요가 없는 검이다. 흑검은 영체화가 가능하고 영체가 되면 검신에 들러붙었던 피나 기름 따위가 모두 떨어지니까.
그래도 한 번씩은 이렇게 손질을 해주고는 있었다.
어린 시절 염노에게 검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검을 손질하는 법이다.
그때부터 하루도 안 빠지고 해왔던 일.
그 덕에 이렇게 검을 닦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차분해지곤 했다.
‘우웅!’
집을 깨끗하게 해준다고 라비도 좋아하고 있었고.
스스슥.
테이블 위의 라비가 각설탕 하나를 꾸물꾸물 갉아먹는 것을 보며 시안이 생각에 잠겼다.
‘유설…… 흑마법사가 분명해.’
설마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칠흑마탑의 존재가 생각보다 사람들 사이에 많이 파고들어 있는 듯 보인다.
하긴 이 정도도 안 됐으면 가주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표적이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을 리가 없지.
학생으로 있는 것이 뭐 대순가. 악마의 힘을 가졌던 교수도 있었을 정도니.
‘데릭 교수는 칠흑마탑 소속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는 정확히는 칠흑마탑의 일원은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혈석을 주워서 사용하고 있던 것일 뿐.
엄밀히 말해 그가 본 칠흑마탑의 일원은 베리엄 하나뿐이다.
유설은 어느 쪽일까.
베리엄처럼 칠흑마탑에 적을 두고 있는 녀석일까, 아니면 데릭 교수처럼 모종의 경로로 악마와 만났을 뿐인 소녀일까.
어느 쪽인지는 아직 모른다.
둘 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다만, 그건.
톡, 톡톡.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테지.’
창문을 두드리는 어떤 기운의 잔향 같은 것을 느끼며, 시안이 일어났다.
드르륵. 창을 열어보았으나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이곳은 4층이다. 사람이 보일 리가.
하지만 창을 두드린 기운은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날 초대하고 있군.’
기운은 마치 이정표와도 같이 어느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시안이 창틀을 밟고 몸을 던졌다. 휘익, 탁! 4층 높이였으나 착지하는 것에 전혀 무리는 없었다.
바닥에 도착한 그가 천천히 기운이 가리키는 장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그가 언제나 연공을 하는 뒷산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어두운 새벽. 오로지 달빛만이 비추고 있는 풀밭.
“……왔구나.”
그 달빛을 등지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이 얘기했다.
“오늘 보물찾기 때의 일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거겠지?”
“응.”
저벅, 저벅.
그녀가 한 걸음, 두 걸음 시안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탓!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세운 손날이 시안의 목을 향했다.
완벽한 기습…… 이긴 하지만 전투 자체는 이미 상정하고 있던 일이다.
시안은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손날을 피하며 동시에 검을 내질렀다.
“……!”
다음 순간 그가 살짝 놀랐다. 유설이 검을 피하더니 검신의 위에 사뿐히 착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늘하늘한 나뭇잎과 같은, 가볍고 날쌘 움직임이었다.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 그녀는 순수한 정통 마법사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180도 달랐다.
거리를 벌리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좁혀오며 공격을 가해온다.
휘익!
검에 올라탄 상태로 그녀가 대뜸 시안의 얼굴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탁!
시안이 한 손으로 그 발을 막은 후, 검을 털어 그녀를 쫓아냈다.
그녀가 검을 밟고 점프를 하더니 한 바퀴 공중제비를 돌며 뒤쪽으로 착지했다.
원래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녀석이었나?
‘우웅! 웅웅!’
라비가 그녀를 향해 화를 내었다. 어딜 흙발로 내 집을 밟는 거냐는 듯.
시안이 검을 회수하며 유설을 쳐다보았다.
“너. 누구지?”
그의 말에 유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의 무표정한 그녀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던, 풍부하고 재치 있는 표정.
그리고 그 눈 깊은 곳에 담긴 찌를 것 같은 살의.
“겨울의 뱀, 프시케. 그러는 너는 누구니?”
겨울의 뱀.
그 이름을 되뇌며 시안이 대답했다.
“시안 아그리드다.”
“아니, 그거 말고.”
“-?”
“네 이름이나 가문 같은 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너 말고 네 손에 있는 그 아이 말야.”
시안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라비가 깃들어 있는 흑검.
“대답할 의무는 없군.”
“흐응. 내 이름을 물어봐 놓고 너는 대답하지 않겠다?”
“어.”
당당한지 뻔뻔한지 알 수 없는 시안의 대답에 유설이, 아니, 프시케가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지 홀릴 만한 멋진 웃음이지만, 기이하게도 이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평소의 무표정한 유설의 모습이 훨씬 인간미가 있어 보인다.
‘이게 악마…….’
데릭 교수 때는 절반도 채 강림하지 않았다. 아까 낮의 유설 때도 아마 한쪽 팔 정도밖에 강림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온전히 이 땅에 내려온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지 않을래?”
“부탁?”
“뭐 너도 잘 알겠지만 우리가 들키면 안 되는 존재잖아. 이 아이도 마찬가지거든. 나와 함께 있다는 게 들키면 좀 곤란해.”
“그래서, 입 다물고 있어 달라고?”
“응.”
무슨 속셈이지?
말은 이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눈 안쪽에 눌어붙은 살의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시안이 탐색을 이어가며 일단 적당히 대답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군. 나도 내 힘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으니까.”
그리 얘기하자 그녀가 방긋 미소 지었다.
“친절하기도 해라. 이 아이는 좋은 친구를 두고 있네.”
“딱히 친구는 아니다만.”
“어머, 그래?”
그 직후.
팟, 하고 그녀의 모습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한껏 경계하고 있던 시안은 곧바로 기척이 느껴지는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수작을 건 것인지 땅과 발이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 시안의 손등을, 어느새 접근한 프시케의 손톱이 쓰다듬었다.
흑검을 쥐고 있는 오른손이었다.
“네가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녀가 여전히 웃음기 띤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건 시안이 아닌 라비에게 보내는 소리였다.
“지옥의 규칙은 알고 있겠지? 격이 낮은 이는 높은 이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거.”
뭐?
그 순간 그녀에게서 차디찬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뱀과 같이 요요히 라비를 감싸기 시작했다.
시안의 눈이 크게 뜨이며 검을 빼내려 하였으나 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라비!’
‘우, 우웅!’
시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전류가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지금까지 중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지옥이란 곳에 저딴 규칙인지 뭔지가 있는지!
“그러게 생각 없이 계약자 바깥으로 나오면 안 되지. 우리가 왜 강림 같은 번거로운 일을 하는지 잊은 거야?”
촤르르륵. 보이지 않는 사슬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미 발을 붙잡고 있던 얼음은 깨진 지 오래다. 시안 본인은 몸을 빼고자 하면 얼마든지 뺄 수 있었다.
하지만 라비가 묶였다.
그는 라비를 두고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악마들 사이엔 절대적인 서열 같은 것이 있나?’
방금 프시케의 말로는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좋지 않다. 라비의 정체를 모르고 있음에도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걸어온다는 것은, 프시케의 서열이 상당히 높다는 얘기가 아닌가?
‘라비가 놈한테 대응할 수 없다면.’
내가 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시안이 반격을 위해 오러를 끌어올렸다.
그 직후.
찰칵!
“……어?”
프시케의 멍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는 기이한 침묵.
잠시 달을 가리던 구름이 멀어지고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다.
“이,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인간미가 느껴졌다.
“뭐야.”
시안이 허탈하게 얘기했다.
“네 쪽이 아래였냐?”
목줄은 라비가 아닌 프시케에게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