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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50화 (5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0화

시안이 두 번째로 조우한 학생은 56위의 학생이었다.

장벽을 따라 천천히 구슬을 찾고 있던 시안이, 그와 똑같이 장벽 둘레를 밟고 있던 학생과 조우한 것이다.

“더, 더더덤벼!”

“한 수 부탁하지.”

그리고, 전투는 일순간에 끝났다.

가까이 다가간 시안이 56위의 공격을 완벽하게 회피하고는, 그대로 그를 붙잡아 장벽 바깥으로 던져 버렸다.

굳이 공을 들여서 배리어를 모두 깎을 필요가 없다. 이 보물찾기 이벤트에선 장외패도 있었으니까.

‘장벽 가까이 있으니 편하군.’

그가 장벽을 따라 돌면서 수색을 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세세히 구슬을 탐색해 보기 위함이지만, 이런 소소한 이득도 보니 더 나쁘지 않았다.

“아.”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던지고 나서 깨달은 것이다만, 이렇게 간단히 이겼으면 안 됐다.

‘저 녀석이 구슬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살폈어야 했는데…….’

보물찾기의 목적은 하나라도 많은 학생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다. 보물인 구슬을 모으는 것.

그걸 확인하기도 전에 바깥으로 던져버린 터라 탐색하러 갈 수가 없었다.

자신도 장벽 바깥으로 나가면 탈락이니까.

‘다음부턴 조심하기로 하고.’

뭐 다음부터 조심하면 될 일이다.

약간의 자기반성과 함께 그가 다시 장벽을 따라 언덕을 크게 돌았다.

그러다 보니 몇몇 학생들과 더 마주칠 수 있었다.

“내가 못 가질 거면 남도 못 가져!”

어떤 놈은 당할 것 같으니 가지고 있던 구슬을 꺼내더니 장벽 바깥으로 멀리 던져버리는 놈도 있었다.

그러곤 하하 웃길래 재수 없어서 아예 기절을 시키고 던져 버렸다.

“하압!”

어떤 놈은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기습을 거는 놈도 있었다.

아마 균형을 잃고 아래쪽으로 떨어지면 위에서 안전하게 마법을 쏴댈 생각인가 보다.

숨어 있던 장소부터 뻔히 보였기에 시안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이 수법으로 많이도 털어먹었는지 구슬을 4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밖에도 2명과 한꺼번에 조우해서 합공을 당하기도 했고, 동굴 안쪽에서 몰래 숨어 있던 녀석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구슬이 총 8개.

이때쯤 되니 경기장도 많이 줄어들었고 슬슬 조우하는 학생도 없어졌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시안은 마지막 장소인 언덕의 정상, 커다란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대로의 상대였다.

“……왔구나.”

유설.

발밑에 7개의 구슬을 둔 채,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결국 변수는 없었네요.”

“그렇구만.”

언덕의 아래쪽에서, 쿠르간을 비롯한 비스트 길드의 학생들과 탈락한 1학년들이 경기장 내부를 감상하고 있었다.

콜로세움 마법을 통해 언덕의 광경이 한쪽에 펼쳐져 있다.

그걸 구경거리 삼아 학생들은 간식이나 먹으며 쉬는 중이었다.

“결국 쟤네 둘이네.”

“1위랑 2위라……. 뻔하게 남긴 했는데 그래도 신경 쓰인다. 둘 중 누가 세냐?”

“글쎄. 비슷하지 않을까? 아, 그래도 검사인 시안 쪽이 유리할지도.”

“아닐걸. 유설이랑 저번에 싸워봤는데 근접전 대책도 완벽하던데? 도저히 뚫질 못하겠더라.”

쿠르간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어느 정도 승패의 결과를 예측하고 있었다. 저번 주에 보았던 시안과 란과 유설의 삼파전.

아주 잠깐의 맞대결에 불과했지만 실력 차이는 확연했다.

아마 이번에도 시안이 이길 테지.

―내 실력을 보고 싶으면 당신들이 직접 덤비시죠.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후.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때 회의실을 나가며 시안이 했던 얘기.

“흐흐, 건방진 후배라.”

과연 그 자신감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이래서 에버웨일이 좋다. 매년 질리지도 않는 후배들이 들어오니까.

작년엔 데미안이 있었고 올해는 시안이 있고.

짜증 날 정도로 건방진 놈들이지만, 역으로 그랬기에 더욱 흥미로웠다.

“하여간 옛날의 나처럼 선배들에게 공손한 후배들은 없는 거냐.”

“…….”

쿠르간의 말에 근처에 있던 비스트 길드의 일원이 질린 눈으로 쿠르간을 바라보았다.

당신만큼 앞뒤 안 가리고 건방졌던 사람이 어디 있냐는 말은 애써 숨긴 채.

* * *

유설이 목에 걸치고 있던 스톨을 풀었다. 안쪽이 살짝 비쳐 보이는 하얀 스톨.

움직임에 방해가 될까 봐 벗어놓는 건가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스톨이 그녀를 감싸듯이 허공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평범한 물건이 아닌가 보군.”

“아티팩트야.”

수신의 날개옷.

B급의 방어형 아티팩트로 사용자를 향하는 공격을 자동으로 감지해 막아주는 기능이 있다.

아티팩트를 사용한다고 하여 반칙이라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에버웨일의 대련 규정에선 아티팩트의 사용을 완전히 허락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안도 흑검을 사용하지 못했을 거고 줄리오도 천련사를 쓰지 못했겠지.

“……이 학교에 온 뒤론 처음 사용해 봐.”

“그거 영광이군.”

탁!

시안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아티팩트의 성능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걸 확인하려면 일단 접근하는 것이 먼저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쿠웅!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시안의 모습에 유설이 이를 악물곤 뒤로 뛰었다.

동시에 그 손에 휘몰아치는 냉기를 그녀가 시안을 향해 뿌렸다.

그것은 수많은 화살이 되어 시안에게 쇄도했다.

채채채채채챙!

시안이 검을 쳐내며 계속 다가온다.

수십의 얼음 화살로 그를 격퇴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속도를 줄이는 것엔 성공했다.

그 틈을 타 그녀가 손을 모았다.

손에 냉기가 모인다. 그것은 빛을 반사하는 눈 결정과 같이 아름다운 빛을 흩뿌렸다.

[ 백련화(白蓮花) ]

쏴아아아아아!

그녀가 양손을 펼쳤다. 한껏 응축된 냉기가 일거에 터져 나가며 경기장 내를 한계 없이 얼려 나가기 시작했다.

얼어오는 대지를 보며 시안이 일순간 고민했다.

뒤로 피해야 하나?

뒤쪽에 아직 공간은 남아 있다. 하지만.

‘피하기만 했다간 답이 없다.’

경기장 내부는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유설의 마법은 그 내부를 모조리 얼려버릴 기세였다.

도망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얼음 대지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콰직! 얼어붙은 들판을 밟아 부수며.

“……!”

설마 그대로 뛰어들 줄은 몰랐는지 유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콰앙!

허를 찌른 덕에 시안은 무사히 그녀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그 앞을 막은 것은 그녀의 스톨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마나가 담겨 꽝꽝 얼어 있는 하얀 천.

‘얼어 있어?’

시안이 검을 회수하곤 다시 휘둘렀다. 스톨이 전개되지 않은 빈틈을 찾아서.

그러나, 그 순간 다시 녹아내린 천이 그의 검을 막았다.

캉!

막는 그 순간에는 다시 똑같이 얼어붙으며.

‘이거…….’

생각지도 못한 방어법에 조금 놀랐다.

그사이 마법을 완성한 유설이 손을 흩뿌렸다.

쉬쉬쉬쉬쉬쉭!

손가락만 한 작은 얼음의 결정이 수없이 시안에게 쏟아졌다.

시안이 눈을 찌푸리며 검을 창해로 바꾸었다. 촤르륵! 그 검을 넓게 휘두르며 얼음 결정을 쳐냈다.

‘큭.’

급소를 노리는 것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결정들을 쳐내었으나 몇몇은 검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들은 착실하게 시안의 배리어를 깎아 나갔다.

캉! 캉캉!

비슷한 공방이 몇 차례나 이어졌다.

처음엔 다소 손해를 본 시안이었으나, 그러나 어느 순간부턴 역전할 수 있었는데.

‘움직임이 단조로워.’

유설을 막고 있는 천의 움직임.

부드러운 천이 되었다 얼어붙은 단단한 천이 되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놈이었지만, 움직임 자체는 별거 없었다.

자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인지 줄리오의 천련사보다도 훨씬 직선적이었다.

그런 것을 공략하는 것 따위 시안에겐 쉬운 일이었다.

“……!”

곤란해진 건 유설이다.

캉! 왼쪽에서 수신의 날개옷이 시안의 검을 막는다. 그러나 그 직후, 시안의 검은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날개옷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곳으로.

‘근접전이…… 생각보다도 더 강해.’

그녀가 염두에 둔 것보다도 훨씬 매섭다. 가문의 하이나이트들에게 근접전을 훈련받을 때보다도 훨씬 더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려보려 하였으나 시안의 검은 그조차 예상했다는 듯이 따라온다.

근접전에서만큼은 그가 언제나 한 수, 아니, 두 수는 앞서 있었다.

[겨울의 뱀이 웃습니다.]

[슬슬 때가 아니냐고 보채옵니다.]

‘…….’

쇄도하는 시안의 검의 기운을 느끼며 유설이 몸을 돌렸다. 날개옷이 넓게 펼쳐지며 검을 막았다.

그러나 이번엔 단단해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펼쳐지며 시안의 검을 감싸더니, 그 상태로 얼어붙었다.

시안이 찡그리며 천을 베어내었다.

B급 아티팩트가 그렇게 망가진다. 수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최소한 이 전투에서만큼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덕에 유설은 약간의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하자.’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겨울의 뱀이 흥분합니다.]

[이게 얼마 만의 강림이냐며 무척 기대합니다.]

‘부분일 뿐이지만.’

손끝에 모인 빛무리가 얼음의 뱀을 토해낸다. 그것은 그녀의 손바닥을 둥글게 감싸며 이윽고 팔꿈치에까지 다다랐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가 하얗게 명멸했다.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 몸속 전체를 관통하는 차가운 심지를 느낀다.

그것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얼음의 탑이었으니.

부분강림. 그녀가 가진 최고의 패였다.

프시케에게 몸의 주도권을 내어주는 강림과는 다르게 온전히 그녀의 의지를 남기며, 동시에 프시케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진 상태.

‘뭐지?’

한편, 시안은 무언가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기분.

눈앞의 존재가 일순간에 완전히 다른 존재로 교체된 것만 같은 느낌.

왠지 어디서 봤던 것만 같은.

“…….”

유설이 다시금 손에 냉기를 모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대했다.

그것을, 그녀가 하늘에 흩뿌렸다.

하늘을 뒤덮은 냉기의 구름이 경기장 전역에 얼음비를 쏟아 내었다.

[ 겨울비 – 만년서리 ]

투두두두두두!

강철조차 간단히 뚫어버리는 빗줄기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이건 피할 수 없다. 피할 장소 자체가 없었다.

막아낼 수밖에 없다.

[ 검령(劍靈) – 검륜(劍輪) ]

그가 양손에 검륜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오러를 끌어올렸다.

양손의 검이 검은 오러에 휩싸였다.

[ 쌍성검(雙星劍) – 월식(月蝕) ]

그의 검이 한차례 하늘을 갈랐다.

그 궤적을 따라 얼음비가 차차창! 깨져 나갔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의 검이 물 흐르듯 다시 검로를 이어나갔다.

검을 회수하는 동작이 없다. 한 번 휘두른 즉시 이미 다음 동작으로 이어진다.

쌍성검에 있는 단 하나의 초식. 수백, 수천, 수만 번의 휘두름에도 그 흐름이 끊기지 않는 단 하나의 검로.

차차차차창!

양손의 검으로 펼치는 그것은 머지않아 허공에 그어지는 선이 아닌 허공을 덮는 면으로 변해갔다.

촘촘히 모든 공간을 메우며 그의 검이 쏟아지는 폭우를 베어간다.

검은 오러에 휩싸인 그것은 흡사 달을 가리는 불길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이걸, 막아……?”

유설이 경악했다.

시안의 검에서 보이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가문의 하이나이트들이 사용했던 오러.

그것은 검사에게 있어서는 이미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었다. 배움의 길에 있는 학생이 쓸 만한 기술이 결코 아니었으니.

오러의 등장에 충격을 먹은 그녀에게 프시케가 소리쳤다.

[겨울의 뱀이 외칩니다.]

[빨리, 빨리 그걸 쓰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어? 어, 어 응!”

묘하게 초조한 듯한 목소리였으나 유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전투에 집중하라고 다그치는 소리로만 들었을 뿐.

어느새 겨울비가 끝나가고 있다. 그 전에 다음 마법을 써야 한다.

그녀가 손바닥을 펴곤 양손을 벌렸다.

주변의 환경. 경기장 전역이 이미 얼어붙은 상태. 이미 이 안은 자신의 영역과 같았다.

그리고 마법사는 영역 안에서 결코 지지 않는다.

쿠구구구구궁!

그녀가 짝, 양손을 합치자 겨울비를 막고 있는 시안의 주위로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성장한 그 벽은 나선을 그리며 시안의 주위를 감싸나갔다.

쌍성검을 펼치고 있는 시안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윽고 남은 것은 시안을 가둔 반구형의 얼음집.

프시케의 힘을 가득 넣은 빠져나올 수 없는 감옥이었다.

[겨울의 뱀이 머리를 흔듭니다.]

[그냥 가두고 끝내면 어떡하냐고 비명을 지릅니다.]

“응? 가두면 이기는 건데 왜 그래?”

그녀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교내 이벤트다. 상대는 적이 아니라 동급생. 가두기만 하면 실질적으로 승리가 아닌가.

하지만 프시케가 사용하라고 한 것은 감금용 마법 같은 게 아니었다.

[겨울의 뱀이 외칩니다.]

[저 남자가 쓴 오러에서 동포의 힘이 느껴진다고 얘기합니다.]

일순간 프시케가 무슨 얘기를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녀의 동공이 커져왔다.

그 직후.

쩌적!

프시케의 힘을 양껏 담은 얼음 구체에 금이 갔다.

[친숙한 기운에 흑정령이 흥분합니다!]

파지지지지직!

단숨에 얼음 구체를 깨뜨리며 시안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흠칫 놀란 유설이 당장에 피하려 하였으나 그보다 시안이 빨랐다.

검은 오러가 마치 낙뢰와 같이 떨어져 내린다.

콰직!

<남은 인원 1>

<대규모 콜로세움이 중단됩니다.>

그녀의 배리어가 깨짐과 동시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장벽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것은 멍한 표정의 유설과.

“…….”

시합 전과 완전히 다른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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