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8화
시안과 란, 유설 세 사람이 나란히 별관을 나섰다.
셋 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갑자기 선배가 부른다길래 의아해하며 왔더니 저런 용건이었으니.
란이 잔뜩 찌푸린 채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얘기했다.
“후우…… 미안하다. 쿠르간이 저런 녀석이라.”
“무슨 소리야?”
란의 말에 시안이 물었다.
“옛날부터 알던 놈인데, 원래 좀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경향이 있거든. 이번 일도 보나 마나 그 자식이 부추겼겠지.”
들어보니 아무래도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나 보다. 소꿉친구 같은 느낌일까?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 우리 쪽 형님도 부추겨진 모양이고.”
“형님이라니, 그 데미안이란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뭐 그렇지.”
“흐응…… 하긴 다들 한 따까리 하는 가문들이니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도 이상하진 않은가.”
그리 중얼거린 란이 그 옆에 있던 유설을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나저나 너, 뭘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던 거야? 제대로 거절해야 이런 일이 또 없을 거 아냐.”
“…….”
유설이 말없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토라진 것처럼도 보이는 그 태도에 란이 혀를 찼다.
“친언니라고 하던데 그 여자한테 약점이라도 잡혔냐? 어릴 때 이불에 오줌 싼 거라도 들켰어?”
“……그런 거 아냐.”
“아니긴 무슨. 뱀 앞의 개구리마냥 쭈그러져 있더만.”
“…….”
유설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슬쩍 쳐다보니, 입술을 오물거리고 있는 것이 하고픈 말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결국 얘기를 하진 않았다.
“쯧.”
란이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만족한 모양이다.
시안이 그런 그녀를 힐긋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끼고 있는 반지를.
“아직 292위로군.”
“아? 뭐 그렇지. 그 뒤로 대련은 아무하고도 안 했거든.”
“너라면 2위나 3위는 금방 딸 수 있는 거 아닌가?”
“‘2위나 3위’가 아니라 1위나 2위겠지.”
퉁명스레 내뱉는 란의 말에 시안과 유설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니, 1위는 무리지.”
“……2위는 안 될 텐데.”
순간, 세 사람 사이에 찌릿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란이 하하 웃으며 얘기했다.
“야, 시안아. 아직도 내가 입학 초기의 그 계집애로 보이냐? 우리 호월족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거 몰라? 그리고 유설 너는 나랑 떠보지도 않았는데 자신감이 넘치네?”
“흔히 있는 애들 같은 사고방식이로군. 자기만 자란다고 생각하는 점이.”
“굳이 안 대봐도, 길고 짧은 것 정도는 알 수 있어.”
“……호오. 뭐야 그럼, 너네.”
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투기를 끌어올렸다.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한 수인 특유의 거친 마나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이참에 셋이 한 판 떠볼까?”
“…….”
“…….”
유설의 주위에 차디찬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전투태세에 들어갔단 소리였다.
그리고 시안 역시, 정령 각인에서 밤의 기운을 풀었다.
이윽고 그것은 검의 형태를 갖추며 그의 손에 쥐어졌다.
“그거 좋은데.”
데미안을 비롯해 세 선배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굳이 불러서 싸워보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지 않더라도 이 셋은, 언제라도 그럴 마음이 가득했으니까.
* * *
쾅! 란이 땅을 박차며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일상생활에서 고통을 느낄 정도의 민감하고 다각적인 폭발력은, 전투에 있어서는 이만큼 훌륭한 무기가 없었다.
그 폭발력을 일절 죽이지 않고 그녀가 주먹을 내질렀다.
카앙―!
시안의 흑검이 그 주먹을 막았다.
상상 이상의 거력이 담긴 일격에 검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유설이 마법을 퍼부었다.
얼음비가 쏟아졌다.
둘 모두 묻어버리겠단 듯한 의지가 가득 담긴 광역 마법.
“쯧.”
“…….”
쏟아지는 얼음의 비에 란이 혀를 차며 떨어졌다.
시안 역시 일단 몸을 빼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직후 그는 곧바로 유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역시 먼저 잡아야 할 건 후위라는 판단.
동시에 란 역시 같은 생각인지 유설에게 달려들었으나.
[ 산화무(散花舞) ]
유설이 빙글 몸을 도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기운을 흘리며 그 흐름을 타고 뒤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역시 실력 있는 마법사답게 근접전에서 거리를 벌릴 대책은 충분한 것 같았다.
“놓칠 것 같아!”
란이 크게 으르렁거리며 유설을 쫓았다. 그녀의 두 눈이 맹수의 것처럼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본디 맹수는 도망가는 사냥감을 쫓을 때 더욱 기세가 오르게 마련.
“…….”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시안이 순간적으로 표적을 변경해 란의 뒤통수를 노렸다.
조용히 날아오는 참격.
순간 란의 두 귀가 쫑긋거리더니, 급하게 뒤를 보았다.
한 박자 느리게, 그녀가 시안의 검을 확인했다.
“이 비겁한 녀석이!”
당연히 시안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싸움에 비겁이고 뭐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란이 다급히 손을 들어 시안의 검을 막으려 하였으나, 아쉽게도 뒤쪽에서 유설의 마법 또한 날아오고 있었다.
거대한 얼음 구체.
이번에도 란은 물론 시안까지 확실히 보내버리겠다는 듯 커다란 마법이었다.
‘빠져나가려면.’
란이 본능적으로 옆으로 뛰었다. 양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한 단 하나의 생로.
콰아아앙!
“악!”
그러나 그 여파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란의 몸이 저 뒤쪽으로 나자빠졌다.
그래도 대미지는 크지 않다. 란이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어나며 옆을 보니.
“야, 넌 왜 쓰러져 있냐.”
“……나도 맞았으니깐.”
유설도 근처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란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시안을 보았다.
자신을 공격하며 동시에 유설의 마법도 파훼하고 유설 본인조차 타격했다고?
촤라락!
시안의 손에선 창해가 촤르륵 소리를 내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란이 눈을 찌푸렸다.
“사복검…….”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 기형의 무기.
그 넓은 범위로 란뿐만이 아니라 유설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유설이 쏘았던 얼음 구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산산 조각나 시안의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고.
저런 무기는 또 언제 얻었고 익힌 것인지.
기형의 무기인 만큼 사용법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인데.
“씁…….”
“…….”
란과 유설의 눈이 아주 잠깐이지만 마주쳤다.
삼파전의 상황에서 대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가장 약자를 찾아내 합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강자를 찾아내 합공하는 것.
지금 이 상황에서, 전자는 모호했지만 후자는 확연했다.
“끝인가?”
시안의 물음에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왔다.
두 사람이 이번엔 합심하여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어떠한 합의가 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움직였다. 그게 이 싸움에서 이길 유일한 수라는 생각에.
유설의 손에서 거대하게 단조된 얼음의 창이 쏘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란이 그 반대 방향으로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완벽한 양각.
얼음창이 날아가는 것을 보며 란이 속도를 조절했다.
창과 자신이 동시에 시안에게 도달하는, 가장 받아내기 까다로운 타이밍을 위하여.
“…….”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란의 의도는 성공적이어서 창도 란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시안이 선택한 것은, 자신 역시 뛰는 것이었다.
이렇게 양쪽에서 적이 압박할 때는 어설프게 피할 생각 말고 한쪽을 돌파하는 것이 옳다.
그런 생각에 유설을 향해 뛰었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쿵!
그의 몸이 유설에게 빠르게 쏘아졌다.
중간에 스친 얼음창과 후속 마법들은 흑검에 모두 잘려나가고 있었다.
그것에 눈을 크게 뜨면서도 유설은 몸을 피하지 않았다.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뒤에서 오는 란을 믿고 있군.’
본래라면 진작 몸을 피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피하기보다 새로운 마법을 전개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
스스로를 미끼로 시안을 잡기 위해서.
뭐 알아서 거리를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에 응하여 시안은 그녀의 마법을 베어내며 그 품까지 파고들었다.
그러곤 유설의 방어를 뚫고 그녀의 목에 검을 대는 것에 성공했으나.
“뒤에도 있다!”
란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시안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시안이 몸을 반만 틀어 란을 보았다.
확실히 본인 말대로 성장한 것은 맞나 보다.
일전에는 제대로 보지조차 못했던 ‘섬’에 지금은 바로 뒤따라 붙을 정도라니.
[ 호격권(虎格拳) ]
그녀가 주먹에 더욱 마나를 밀어내었다. 안 그래도 제멋대로 폭발하는 마나를 마구잡이로.
그것을 일부러 제어하지 않은 채로 그녀가 정권을 내질렀다.
“…….”
시안에겐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다.
애써 제압한 유설을 해방하면서 몸을 피하든가, 아니면 그대로 저 짐승과도 같은 주먹에 가격당하든가.
그의 등짝을 향해 쇄도하는 정권.
란의 눈에는 승리의 기운이 가득했다. 설령 두 사람의 합공이었다고는 해도 일단 승리는 승리다.
콰앙―!
그러나, 그 주먹은 어김없이 시안의 검에 막혔다.
란이 눈을 크게 떴다.
“너, 대체 언제…….”
“…….”
유설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한 자루의 검으로 자신을 제압하고 있다. 고로 란의 공격을 피하려면 몸을 빼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의 손엔 한 자루의 검이 더 들려 있었다.
역수로 쥔 그 검이 란의 주먹을 막은 것이다.
검륜(劍輪).
이도류의 검술은 그가 주력으로 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용하게 쓰일 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이야…….
―수준이 상당한데?
잠시 고착된 그 상황에서, 세 사람이 그제야 주위를 보았다.
그들의 대련이 사람을 불러 모았는지 구경꾼들이 꽤 있었다.
“후.”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유설과 란을 향했던 두 검을 모두 회수했다.
란도 주먹을 내렸다.
불만스러워 보이는 듯한 낌새였으나 미간의 주름은 조금 풀려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이었나…….’
그녀가 속으로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일전에 녀석과 싸운 직후 의무실에서, 그때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마음 편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평소에 살짝만 건드려도 터져 나가는 민감한 마나가 그때만큼은 무척 안정적이었던 것이다.
‘아빠랑 싸울 때랑은 다른 느낌인데.’
그녀가 아빠와 대련을 할 때는 몸속의 폭발력을 거의 다 발산한다.
아니, 발산되어 버린다. 체력도 마나도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철저하게.
그렇게 될 때까지 겐 아슬라는 딸을 대련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그런데 시안과의 대련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데도 묘하게 마나가 진정되어 있었다.
대체 무슨 괴현상인지 모르겠다…….
‘아빠를 만나고 와야 되나.’
방학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만 그 생각이 지금은 바뀌었다.
이 현상의 정체가 뭔지, 수련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녀는 모른다. 아빠에게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 필요가 생겼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빠, 겐 아슬라를 볼 생각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왔다.
‘이렇게까지 내주면 안 됐는데.’
한편, 유설은 검을 들이밀렸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었다.
일부러 란의 공격을 히트시키기 위해 미끼를 자처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미끼라도 이건 아니다. 적에게 목을 내어준 것은 확실한 실책이었다.
실전이었으면 벌써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시안…… 진짜로 강하구나.”
유설이 입을 오물거리다가 그리 얘기했다.
그러곤 다시 그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모습이었으나, 기분 탓이 아니라면 무척이나 분해 보였다.
[겨울의 뱀이 눈을 빛냅니다.]
[확실히 나이에 비해서 보기 힘든 실력이라며 감탄합니다.]
그녀에게만 들리는 프시케의 사념도 그리 얘기하고 있었다.
빙하백령에 있을 때는 그 누구에게도, 설사 그녀 자신의 성취에도 웃으며 깔깔거리기만 했던 사념이었다.
프시케가 누군가에게 감탄했다는 말은 정말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괜찮군.’
그녀들과 반대로 시안은 꽤나 좋은 기분이었다.
간만에 제대로 몸을 움직인 느낌.
‘염노는 아카데미를 다니는 것에 부담 갖지 말라고 했었지만.’
어차피 체샤가 정식으로 후계자가 될 때까지의 시간 벌이니, 마음 편히 즐기라고 했었다.
정 뭣하면 그냥 자퇴해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시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정도의 대련 상대를 구하기도 쉽지 않지.’
이만한 대련 상대를, 그것도 팍팍 성장 중인 또래의 상대를 아카데미를 나가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에버웨일이 아니고서야 이런 자극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리벤지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렇게 한마디만을 남긴 채, 시안이 떠나갔다.
* * *
“흐음.”
그들을 지켜보던 인영 중엔 그도 있었다.
쿠르간 델피아.
비스트 길드의 리더이며 3학년 4위의 반지를 가지고 있는 수인족의 학생.
그가 몇몇 친우와 후배들을 데리고 방금의 대련을 모두 지켜보았다.
“란이 조금…… 아니, 좀 많이 밀리네요.”
“그러게 말이다.”
후배의 말에 아쉬운 말을 내뱉는 한편으로, 그의 눈은 아까보다 더욱 반짝거렸다.
란이 시안에게 밀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란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안이 정말 저 나이가 맞나 생각될 정도로 강하고 노련했을 뿐.
‘유설이란 아이도 상당했고.’
둘뿐만 아니라 유설도 상당한 실력이었다.
솔직한 얘기로 전장에서 만날 상대로는 오히려 시안보다도 더욱 까다로워 보였다.
마법사란 본디 전장에서 그 진가가 발휘되는 존재였으니.
“그래도 이번 1학년들은 수준이 상당하구만! 환영회를 열 맛이 나겠어!”
크게 웃으며 얘기하는 쿠르간의 말에 후배들이 물었다.
“환영회요? 그거 정말로 하는 겁니까?”
“말만 해본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원래 신입생들의 환영회는 선배들이 치러주는 거야!”
“으음…… 그럼 좋은 가게라도 알아볼까요?”
그렇게 얘기하는 후배의 머리를 쿠르간이 거칠게 쓰다듬었다.
질색하며 손을 쳐내는 후배를 보곤 킬킬 웃으며 그가 얘기했다.
“가게가 뭔 말이냐. 환영회라고 하면 말야, 자고로 보물찾기 아니겠냐!”
쿠르간의 말에 후배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물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