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4화
“델리스!”
다크 이터의 몸에서 커다란 사마귀의 팔 같은 것이 돋아났다. 그 낫이 시안의 검을 막으며, 동시에 카운터를 치기 위해 쇄도했다.
그것을 보며 시안이 한 일은, 그냥 그대로 검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서걱!
매끈한 단면을 보이며 사마귀 팔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다크 이터가 크게 혀를 찼다.
요즘 애새끼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델리스쯤 되는 마물을 무슨 슬라임 썰듯이 서걱대고 말이야!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무기를 잃은 녀석을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시안이 곧바로 최속의 일격을 찔러 들어갔다.
빛살처럼 쇄도하는 검 끝.
“이 새……!”
다크 이터가 기겁을 하며 몸을 틀었다.
촤악!
완전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급소는 빗나갔다. 시안이 혀를 찼다.
‘한 번 더.’
그가 다시 한번 ‘섬’을 찔렀다.
“케일터스!”
그러나 과연 두 번 연속은 좀 아니었나 보다.
다크 이터의 앞에 거북이의 등껍질과 같은 것이 나타났다. 단, 등에 흉악한 가시가 달려 있는.
껍질을 찔러 들어가던 검을 시안이 멈추고 회수했다.
이걸 깨고 찌르는 것은 일도 아니다만 가시가 방해된다.
끝에 어떤 독이 발라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감수하고 찌를 순 없었다.
그 작은 틈을 타, 다크 이터가 도주를 시도했다.
‘젠장! 젠장!’
강림한 바로 그 날, 무슨 대단한 존재도 아닌 인간 꼬맹이 두 놈에게 패해 도망가는 꼴이라니.
굴욕적이었다. 이 울분을 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다 죽여 버리겠어!”
그러나, 당장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욕 몇 마디 뱉고 내빼는 것뿐이었다.
“…….”
시안이 통로 바깥으로 사라지려는 다크 이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검을 회수하는 사이 이미 거리가 적지 않게 떨어졌다. 적어도 평범한 검은 닿지 않는 거리였다.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검에 검은 오러가 피어올랐다.
줄기줄기 피어오른 그것은 검을 다 감싸고도 모자라 손과 팔에도 흘러내렸다.
[ 창해(蒼海) ]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그리고, 칼날이 떨어졌다.
촤라라락!
채찍과 같이 분리된 창해의 검편이 사나운 물줄기를 동반하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벼락처럼 빠른, 폭포와 같은 일격.
“커헉!”
멀리 떨어진 다크 이터였으나 창해의 범위를 벗어나진 못했다.
다크 이터의 작은 몸체를 고스란히 반으로 갈라졌다.
둘로 나뉜 녀석이 바닥에 떨어졌다.
날기는커녕 기어갈 여력도 없이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잘 가라, 흑마법사.”
“컥, 컥컥! 네, 네 녀석……! 어느 구역의 놈이냐!”
“알 거 없어.”
어느 구역? 지옥의 구역을 말하는 건가?
그곳은 구역별로 나뉘어 있는 곳인가 보다.
새로운 정보다.
“끄아아아악!”
다크 이터의 존재가 라비에게 빨려 들어갔다.
지옥의 존재들끼리의 싸움은 말 그대로 존재를 건 싸움이다.
먹고 먹히는, 상대의 힘과 영혼을 모조리 빼앗아 소멸시키기 위한 싸움.
지상에 대한 열망으로 이 땅에 강림했지만, 강림을 한 그 순간 이 땅은 다크 이터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으니.
강림이란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리스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내가 이런 곳에서……! 내 본신은……!”
찢어질 듯한 다크 이터의 눈엔 원통함이 가득했다.
지옥에 남아 있을 자신의 본신.
알렌에게 300 이상의 마물이 당했지만 아직 700 가까이 남아 있는 그 본신을 두고, 영혼이 사라져 간다.
영혼과 육신이라 하면 으레 영혼 쪽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둘 사이에 그런 위아래는 없다.
영혼 쪽이 강대한 존재가 있는가 하면 육신 쪽이 강대한 존재도 있는 법.
다크 이터는 후자였다.
그랬기에 원통했다.
자신의 본신이 제대로, 아니, 그 반만 강림할 수 있었더라도 이딴 꼬맹이 놈들한테 소멸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 새…… 내가…… 내 마지막이…… 이딴……!”
“얌전히 죽어.”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는 녀석의 영혼을 라비가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그 특등석에는 시안이 있었다.
이윽고, 놈의 영혼이 들어 있던 작은 몸체가 남김없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흑정령이 새로운 능력에 기뻐합니다.]
라비의 기운이 한층 더 오른 것이 느껴진다.
다만 베리엄의 때보다 그것은 훨씬 미약했다.
베리엄을 수호하던 놈의 힘을 ‘일부’만 흡수한 것이 이 녀석의 영혼을 전부 흡수한 것보다 강하다니.
지옥의 악마들 사이에도 격의 차이는 존재한단 소리겠지.
[ 검령(劍靈) – 검륜(劍輪) ]
녀석의 힘을 흡수한 덕택에 또다시 스킬이 생겨났다.
역시 이번에도 검이었다.
검륜.
막 얻은 새로운 검을 내가 한번 불러내 보았다.
생김새는 평범한 철검과 같았다. 번뜩이는 회색빛 검신에 살짝 큰 동그란 모양의 가드. 손잡이는 가죽끈으로 꽉 동여매어 있는.
이 검이 어떤 검인지는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검을 왼손으로 바꿔 잡은 후 그가 오른손을 펼쳤다.
그러자, 그 오른손에도 완전히 동일한 검이 쥐어졌다. 이미 왼손에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복사가 되네.”
검을 바닥에 꽂은 후 그가 다시 손을 펼쳤다. 그러자 3번째 검이 쥐어졌다. 4번째도 5번째도.
몇 개까지 생성되나 궁금해졌다.
다만 지금 그걸 시험해 보기엔 장소도 시간대도 여의치 않았다.
검륜을 다시 각인에 수납한 후 그가 저 앞쪽을 쳐다보았다.
유적 공간을 두르고 있던 불꽃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보았다.
저쪽도 전투가 끝났다는 얘기였다.
* * *
도플갱어가 잠깐은 다크 이터를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모든 것을 따라 하진 못한다.
녀석은 알렌에게 크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하기만 했다.
시안이 도착했을 때, 한쪽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데릭 교수가 쓰러진 것이 보였다.
다른 한쪽에는.
“이 녀석도 기절했나.”
알렌이 엎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체력이든 마나든 정신력이든, 뭔가 과하게 힘을 사용하여 기절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셋 모두일 수도 있고.
툭.
그때 무언가가 굴러와 시안의 발을 건드렸다. 알렌의 청류옥. 기절한 탓에 놓치고 만 것이었다.
시안이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상당히 훌륭한 아티팩트로군.’
시안은 알지 못했지만, 그건 S급의 성장형 유물이다.
격만 따지자면 에버웨일의 비고 깊숙이 잠들어 있는 그것과 동등한.
다만 성장형이기에 아직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알렌이 힘을 퍼다 썼기에 남은 기운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 얼마 안 남은 기운으로도 A급 이상은 가볍게 넘어 보이긴 했지만.
「오지 마!」
청류옥을 들고 알렌에게 다가가려던 시안이, 울려 퍼지는 앙칼진 목소리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기절한 알렌의 앞에 푸른 불꽃이 뭉치더니 작은 소녀의 형상을 이루었다.
청염의 수호자, 푸른 불꽃의 정령.
고대 정령 알티마가 힘을 잃고 작게 줄어든 모습.
대여섯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꼬마 아이가 양팔을 펼치곤 알렌의 앞을 막고 있었다.
새초롬한 눈초리를 잔뜩 추어올린 채.
“누구지 넌?”
시안이 물었다.
「…….」
그러나 녀석은 경계심 가득한 모습으로 으르렁댈 뿐이었다.
딱히 시안을 적대시한다기보다는, 주변의 모두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어린 새끼를 지키는 어미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치켜세운 채.
‘알렌의 정령인가 보지.’
당연한 추측이었고 정답이기도 했다. 다만 그녀가 고대 정령이란 것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손에 든 청류옥을 던졌다.
「어? 아왓!」
알티마가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히 날아오는 청류옥을 받아내었다.
무사히 돌아온 청류옥에 잠깐 기뻐하는가 싶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안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을 뒤로한 채 그가 데릭 교수를 먼저 살폈다.
‘죽진 않았군.’
데릭 교수는 기절만 했을 뿐이다.
어찌 보면 행운이리라.
만약 알렌이 지거나 해서 자신이 상대했다면. 아니면 다크 이터가 마지막에 그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았다면.
데릭 교수가 이렇게 멀쩡히 기절해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알렌의 불꽃과 달리 자신의 검은 피아를 가리지 못하니까.
쓰러진 그의 옆으로 빛을 잃은 ‘혈석’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것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감지하지도 못했다.
다크 이터의 힘을 모조리 잃은 그것은 이제는 평범한 돌멩이에 불과했으니까.
시안이 기절한 교수의 허리를 잡고 어깨에 둘러메었다. 그러곤 다시 알렌 쪽으로 다가갔다.
「……!」
그가 다시 다가가자 알티마가 바짝 불꽃을 세웠다.
녀석의 신체를 이루고 있는 푸른 불꽃이 더 날카롭게 타올랐단 얘기다.
“비켜.”
「안 돼!」
“그럼 여기서 계속 살든가. 나는 갈 테니.”
시안이 그대로 지나쳐 출구 쪽을 향했다.
두고 가도 별문제는 없겠지. 꼬마 같은 모습이어도 저 정령에겐 상당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급 마물 따위가 덮쳐봐야 아무렇지도 않을 테지.
「자, 잠깐! 진짜 가려고?」
그러자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녀석이 어찌할 줄을 모른 채 엎어진 알렌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것이 보였다.
특히 찬 바닥에 누운 알렌의 모습에 녀석이 안절부절못하는가 싶더니, 자신에게 얘기했다.
「너, 기억나는 거 같아. 알렌의 친구 맞지?」
“아닌데.”
「어? 아, 아냐?」
“친구 아니다.”
「하지만 알렌이…….」
“그 녀석이 날 친구라 그러던가?”
「응.」
후우.
시안이 한숨을 쉬며 알렌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이 오자 알티마가 입을 꾸욱 다물더니, 휙! 옆으로 비켰다.
그러곤 다시 눈초리를 치켜뜨며 시안의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하기 시작했다.
혹시 알렌에게 위해를 끼치진 않는지.
그런 알티마에게 콧방귀를 한번 뀌어준 후, 시안이 반대편 손으로 알렌을 들었다.
왼쪽 어깨엔 데릭 교수가, 오른쪽 옆구리엔 알렌이.
통로로 빠져나오는 그의 뒤를 알티마가 쪼르르 따라왔다.
「알렌한테 손가락 하나 댔다간 가만 안 둬!」
“손가락은 이미 댔다만.”
「그, 그게 아니라! 알렌을 다치게 했다간 가만 안 둔다는 말이야!」
“그래그래.”
몸만 어린 게 아니라 정신연령도 어린 건지, 아니면 순수한 존재인 정령이라 이런 것인지.
그 나이대의 꼬맹이와 비교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는 꼬마 정령을 옆에 끼고는 시안이 도시로 올라왔다.
“…….”
도시는 조용했다.
잠에 빠진 새벽의 도시.
시안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불도 무사히 진화된 모양이고, 마물들이 빠져나온 모습도 없어 보였다.
‘딱히 도시를 지키고자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문득 가주와 대화를 할 때, 가주가 창밖을 쳐다본 것이 기억났다.
가주도 그때, 지금과 같은 평화로운 도시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었지.
……물론 가주가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따라와.”
「말 안 해도 따라갈 거야!」
기절한 두 사람과 건방진 꼬마 정령을 데리고, 시안이 아카데미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