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2화
알렌이 유적 아래로 내려갔다.
다행히 데릭 교수의 흔적은 끊기지 않았다. 그도 어지간히 당황하고 있단 뜻이리라.
‘시안.’
괜찮을까, 혼자서?
괜히 자신 때문에 말려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쓴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방금 막 걱정했던 직후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안이 쓰러지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녀석은,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당당하고 꼿꼿하게 서 있을 것 같은 녀석이었으니까.
그렇게 유적 더욱 깊숙이 나아가던 중.
알렌이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
낡아빠진 근처와는 달리 최근까지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보이는 연구실.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 알렌 학생.”
그곳엔 데릭 교수가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사뭇 괴이했다.
전신에서 식은땀을 펄펄 흘린 채 한쪽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
그 한쪽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그것이 보였다.
검붉은 흰자와 검은 동공.
흑마법사의 증표가.
‘강림.’
악마의 존재를 그 몸에 받아들이는 행위.
알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을 넘었어, 데릭 교수.
“사, 살려주세요, 알렌 학생! 저, 저저저 전 몰랐어요. 이런 물건인 줄 몰랐어요. 다신 안 쓸 테니까 저 좀 구해주세요!”
괴이하게 변한 한쪽 눈과 얼굴. 데릭 교수가 땅을 기며 알렌에게 손을 뻗었다.
그는 베리엄과 달리 알고서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주운 ‘혈석’이란 물건이 악마의 것이었을 뿐.
하지만 강림을 했다면 얘기는 또 다르다.
강림은 숙주의 허락이 없으면 행해지지 않는다.
몸의 절반쯤 강림을 받아들인 데릭 교수를 알렌이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살려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아, 알렌 학생…….”
데릭 교수가 울먹거렸다. 그가 알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는 혈석의 정체도 흑마법사의 존재도, 지옥계가 뭐 하는 곳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갑자기 들린 사념에 대답했을 뿐.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그런데 갑자기 몸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그것에 그는 다시 없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이라곤 눈앞에 보이는 알렌뿐이었으나.
“저세상에선 잘살 수 있을 겁니다.”
“하, 학생?”
알렌이 다가온 데릭 교수를 향해 주저 없이 칼을 휘둘렀다.
“히익!”
데릭 교수가 잔뜩 몸을 웅크리며 검을 피하려 했으나 연구직인 그가 알렌의 검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검이 정확히 데릭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캉!
막혔다.
알렌의 눈이 커졌다.
데릭 교수의 목, 그곳에서 흉측한 살덩어리가 부풀어 올랐다.
그러곤 쭈욱 찢어지더니 톱날과 같은 이빨이 달린 입으로 변했다.
그 이빨이 알렌의 검을 막고 있었다.
“이봐, 교수 친구.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 되지. 이 녀석 완전히 우릴 죽일 셈이라구.”
“허억……!”
자신의 목에서 부풀어 오른 괴이한 살덩이를 보곤 데릭 교수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음? 기절했나? 재미없는 인간이로군.”
검을 문 채 얘기하는, 데릭 교수의 목에 생겨난 입을 바라보며 알렌이 이를 갈았다.
“알티마!”
화륵.
그 검에서 청염이 피어올랐다.
입이 화들짝 놀라더니 퉤퉤 검을 뱉어내었다.
“앗, 따가! 뭐야 이거!”
알렌이 거리를 벌리곤 두 손으로 검을 틀어쥐었다.
알렌의 노려보는 시선을 한눈에 받으며 입이 히죽 웃었다.
“거기 파란 친구는 좀 재밌어 보이는구만.”
입이 달려 있는 살덩이가 더욱 부풀어 오르며 굳고 비틀렸다.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돋아난 그 끝에 사마귀와 같은 낫이 생겨났다.
휘익!
서걱!
“호오.”
날아오는 낫을 알렌이 팔째로 잘라냈다.
입이 감탄했다.
“델리스의 팔을 자르다니 제법이야. 아, 델리스란 건 내가 기르는 마물 중에 하난데…….”
“정화구역, 파(波).”
가로 그은 검로를 따라 부채꼴의 불의 지대가 피어올랐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녀석을 노리고 덮쳐들었다.
녀석이 눈을 찡그리며 탓, 뒤쪽으로 뛰었다.
알렌이 놈을 향해 일직선으로, 자신이 피어 올린 불꽃을 뚫으며 돌진했다.
“뭐야? 넌 안 뜨거워?”
“…….”
캉!
알렌이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을 다시금 자라난 마물의 팔이 막아냈다. 이번에는 낫이 아닌 가시가 잔뜩 달린 팔이었다.
이번에도 그 팔을 잘라내는 것에 성공했지만.
“큭!”
슈슈슈슈슉!
거기서 수없이 많은 가시들이 쏘아져 알렌에게 쇄도했다.
알렌이 일순간 크게 화염을 둘러 가시들을 태워버렸다.
그렇게 막아내고 고개를 드니, 이미 놈의 목덜미에선 또 다른 마물의 신체가 뻗어나는 중이었다.
베고 또 베어도 녀석에게선 끊임없이 뭔가가 돋아났다.
기다란 손톱이 달린 팔도 있었고 파충류의 꼬리 같이 생긴 것도 있었다.
심지어는.
―크앙!
악어를 닮은 얼굴이 돋아나 알렌의 머리를 그대로 씹어 삼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괜찮네, 너. 너만 괜찮으면 말인데 내 실험체로 들어올래? 너한테 어울릴 만한 부위가 몇 개 있는데 어때? 지금보다 두 배는 세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닥…… 쳐.”
힘 싸움을 하던 오우거의 두꺼운 팔을 베어내며 알렌이 숨을 토해냈다.
‘하아…….’
쉼 없이 공방이 이어지는 건 아까와 같았지만, 한 번 한 번의 밀도가 차원이 달랐다.
바닥에 떨어진 각기 다른 마물의 신체가 못해도 100체 이상.
당장에라도 자신을 씹어 삼킬 공격을 100번을 막아냈단 뜻이었다.
애써 막아내고 있었으나, 솔직히 벅찼다.
‘한 호흡……. 한 호흡만 더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밀리지는 않았을 텐데.
체력이 떨어진다. 남은 마력도 결코 많지 않았다.
―화륵!
알티마가 그에게 얘기했다.
도망치라고.
아까도 똑같이 얘기하긴 했지만, 그때와는 말의 온도부터가 달랐다.
그녀도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단 뜻이리라.
하지만.
‘……안 돼.’
그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킥킥, 고작 백 마리쯤 잡았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데.”
녀석이 그리 얘기하며 다시 마물의 팔을 꺼내 들었다. 아까 처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낫이 달린 팔.
“아직 구백팔십 마리 정도 남았는데 그것도 다 썰어야 포기하게?”
“……뭐?”
낫이 떨어져 내린다.
알렌이 다급히 그것을 막았으나, 무사히 막을 수는 없었다.
챙강!
반 토막 난 검신이 툭 하고 땅에 떨어졌다.
알렌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릭 교수의 목에 난 입이 길게 찢어지며 키득거렸다.
“아니, 뭐, 이 몸뚱이 상태가 안 좋아서 다 꺼낼 수 없긴 하니까 좀 더 덤벼보든지?”
유약한 데릭 교수의 몸뚱이. 그마저도 반 정도밖에 강림하지 못했기에 그가 꺼낼 수 있는 마물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부라 해도 막대하다.
다크 이터(Dark Eater). 그 몸에 천의 마물을 사역하는 지옥의 존재.
근래 숫자가 좀 줄었고 방금도 100마리쯤 떨어져 나갔지만 그 정도야 그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한참은 더 남아 있었으니까.
툭.
알렌의 손에 힘이 풀리며 그가 들고 있던 반 토막 난 검이 땅에 떨어졌다.
놈이 혀를 할짝였다.
“포기했나. 뭐 걱정 마, 자의식이 강하든 아니든 난 차별하지 않으니까.”
높게 치켜든 녀석의, 아니, 녀석이 사역하는 마물의 신체가 쩌억 갈라졌다.
“어차피 다 똑같아지거든.”
다섯 갈래로 갈라진 그 안에는 수백 수천의 이빨이 자글자글 돋아나 있었다.
그것이, 알렌을 삼키기 위해 떨어져 내렸다.
“……알티마.”
알렌이 가라앉은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포기해?
그럴 리가.
상대가 수백이든 수천이든 상관없다. 자신의 손에 멀쩡한 검 한 자루 남아 있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런 걸로 무너질 정도로 그의 정신은 약하지 않았고, 새겨진 상처는 얕지 않았다.
그가 손을 펼쳤다.
화르륵!
그 손에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며 한 점으로 뭉치듯 타올랐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푸른빛을 띠는 하나의 구체.
청류옥(淸流玉).
크루거 가에 거둬지기 전, 불타는 마을을 뒤로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손에 들린 유일한 일족의 유산.
고대 정령이 잠들어 있다고 하던 ―그리고 실제 잠들어 있었던― 일족의 신기.
“조금만 쓸게.”
파아아아―!
그 강대한 오브(Orb)를 중심으로 푸른 불꽃의 파형이 유적 전체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온 사방과 바닥, 천장까지 육면이 불의 커튼으로 덮여갔다.
이윽고 그것은 공간을 가두는 관이 되어 둘을 엮어 넣었으니.
[ 정화구역, 쇄(鎖) ]
알렌이 평소 검을 드는 이유. 그것은 알티마의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함일 뿐.
그는 검사가 아닌 정령사였다.
* * *
마지막 마물의 몸에서 칼을 빼었다.
단단한 피부와 근육을 뚫고 놈의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이 시안에게 회수되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처럼 쌓여 있는 마물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 장소에 있는 마물들을 단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처치했다.
‘조금 오래 걸렸군.’
빠르게 끝내고 싶었으나 숫자가 숫자다 보니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더욱이 쥐새끼 한 마리 놓치지 않게 하려다 보니 더 걸린 것 같았다.
알렌은 괜찮을까? 흑마법사와는 조우했나?
약간의 걱정을 안고 시안이 알렌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도착한 장소에서.
‘이건……?’
푸른 불의 커튼이 연구실을 감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알렌의 기술인 정화구역, 쇄(鎖).
육면체의 불의 관을 만들어 적을 가두고 유리한 전장을 만들어내는 기술.
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일렁이는 불꽃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게 알렌이 쫓던 흑마법사인가?’
전투 중인 알렌과 적의 모습.
무수히 많은 마물을 쏟아내며 알렌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알렌의 손에는.
‘검이 아냐?’
검이 아닌 푸른 오브가 떠다니고 있었다.
놀라웠다.
알렌이 쏟아내는 기운이 떨어져 있는 이 장소까지 찌릿찌릿 울리고 있었다.
일전에 정령술 수업에서 마나를 측정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의 알렌은 다른 평범한 정령사들과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의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콰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아악!
알렌이 적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꺼내는 마물은 꺼내는 족족 푸른 불꽃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고 있었으며, 알렌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콰앙!
흑마법사가 커다란 한 방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그런데도 언데드마냥 다시 일어나는 질긴 녀석.
그런데, 녀석의 뒤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일순간 혼란이 왔다.
일어선 흑마법사는 다시 아까처럼 알렌에게 달려든다. 그리고 나가떨어지고, 다시 일어나 달려들고.
그런 와중에 뒤쪽에선 작은 그림자가 뽈뽈거리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상함의 극치였다.
알렌은 눈앞의 흑마법사를 상대하느라 뒤쪽으로 빠지는 그림자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
어느 쪽으로 가세해야 하는지 시안이 잠시 고민했으나, 고민은 짧았다.
‘웅!’
라비가 한쪽을 가리킨다.
끄덕.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곤 주저하지 않고 그쪽 통로로 향했다.
뒤로 튀어나온 작은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