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9화
“알렌 학생. 요새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요?”
“예, 아, 아뇨…….”
어느 날의 오후, 해가 중천에 뜬 시간대.
점심을 먹고 좋은 기분으로 간단하게 산책을 하고 있던 알렌에게 융이 접근했다.
융은 현재 아카데미에서 유일하게 알렌이 고대 정령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자이다.
때문에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에게는 이리저리 둘러서 접근하는 것보다는 정면으로 다가가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갑자기 말을 걸어와서 놀라셨나 보네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일단 앉으시죠.”
알렌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반겼고, 두 사람이 나란이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간단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제는 당연히 정령에 대한 것이다.
융은 알렌의 정령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애초에 둘 사이에 공통화제라곤 정령 외엔 없었다.
그중에서도.
“오…… 선물을 주면 까칠한 성격이 조금은 낫는단 말이군요.”
알티마의 까칠한 성격에 대해 알렌이 상담을 하는 식이었다.
“그렇죠. 사람도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정령도 똑같아요. 특히 정령은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이들이라 좋아하는 물건을 보면 환장하며 달려들 때도 있거든요.”
“그렇군요. 좋아하는 물건이라……. 근데 뭘 좋아할지를 모르겠네요.”
“알렌 학생이 데리고 있는 건 불의 정령이라고 하셨죠? 생김새나 아니면 특징 같은 걸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조금은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으음…… 그건 좀 힘들겠어요. 나중에 한번 뭘 좋아하는지 직접 물어봐야겠네요.”
“그것도 좋죠.”
조언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알렌을 보며 융이 빙긋 웃었다.
그러나 속으론 살짝 실망했다.
‘이 정도론 안 넘어오네.’
선물 얘기를 빌미로 알티마의 특성이나 성향을 조금이라도 캐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건 안 된단다.
결국 알게 된 것은 알렌이 알티마에 대한 정보를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단 사실뿐이었다.
다만.
‘이것도 성과라면 성과지.’
그것이 알렌의 뜻이든 알티마의 뜻이든,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풀고 싶지 않아 한다.
정보를 통제한다는 것은 통제할 이유가 있다는 뜻.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그 이유에 고향에 대한 단서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냥 입이 무거운 것일 수도 있다. 본인의 능력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은 것뿐인 이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그녀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이 정돈가.’
정령에 관한 화제로 캘 수 있는 것은 모두 캤다.
이 이상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알렌이 아닌, 그의 안에 있는 알티마에게.
그렇게 판단한 융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새 저녁부터 새벽 늦게까지 하수도에 있다 오신다던데.”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잡화점의 코니 씨한테 들었어요. 어떤 성실한 학생분이 하수도의 마수 퇴치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네요.”
그 말에 알렌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녀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훌륭한 일이라뇨, 전혀.”
그 모습에, 그녀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입질이 왔다.
단순히 잡화점 주인의 의뢰였다면 굳이 새벽 늦게까지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단순한 의뢰 이상의 것이 있다는 말.
그런 생각에 얘기를 꺼내봤는데 역시 뭔가 있는 모양이다.
“괜찮으세요? 혹시 고민이라도 있다면 상담해 드릴 수 있는데.”
“아하하. 그 녀석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 녀석이요?”
“시안이요. 어젯밤에 만났거든요.”
“오오, 무사히 친하게 지내고 있나 봐요. 보기 좋아요.”
“글쎄요…….”
알렌이 어젯밤 보았던 시안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니. 나는 빼고.
고민이 있으면 남한테 의지하라고 얘기해 놓고선 자기한텐 얘기하지 말란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리 말하는 시안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은근히 남을 신경 쓰는 모습이 왠지 알티마랑 비슷한 것 같기도.
―화륵!
‘미안 미안.’
그런 생각을 하니 알티마가 대번에 항의를 해왔다.
알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달래고는, 시안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이번엔 어제 만난 그가 아닌 더욱 이전에 만난 그에 대해서.
―이번 검술 대회의 우승자는 시안 아그리드! 이 어린 소년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와아아아아아!
3년 전, 발탄 백작령의 검술 대회가 종료되고 환호성이 쏟아지던 그 무대.
관객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전장에서 생환한 병사를 탐스러운 꽃으로 환영하는 소메르의 풍습이 깃들어 있는 축하 의식.
그때도 시안은 어제마냥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꽃을 받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관객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어린아이가 검술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에 모두가 취해 있던 그때.
―아얏!
인파에 밀려 한 아이가 넘어졌다.
길가에서 뜯어 온 것 같은 작은 꽃 한 송이를 든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가 넘어지든 말든 관객들은 환호를 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 아이가 부딪힌 일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을 테니.
알렌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 아이를 일으켜 주려고 했다.
그런데.
―염노. 무거우니까 이것 좀 가져가.
―저야 문제없습니다만 도련님은 괜찮으십니까? 도련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꽃다발 아닙니까.
―내 팔이 여섯 개씩 달린 것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다 들어.
―그건 그렇네요, 허허.
그렇게 말하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시안과 한 노인.
그런 그가 넘어져 있던 아이를 발견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를 일으켜주었다.
―저, 저! 이거!
일으켜진 아이가 눈을 빛내며 꽃을 건넸다. 다른 이들이 선물한 것과 같이 잘 포장된 꽃이 아니었다.
방금 막 따 온 것만 같은, 아직 흙이 묻어 있는 자그마한 들꽃.
―내 덩치엔 이거 하나면 충분하지.
그리 말하며 그가 주저 없이 옷깃에 꽃을 꽂았다.
폴짝 뛰며 기뻐하는 아이의 머리를 툭 치고는, 그가 노인과 함께 떠나갔다.
―잘 어울리십니다.
―말은.
그 이후로 그들을 만날 순 없었다.
시안이 아그리드 후작의 아들이란 것을 알게 된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걸 아니 더욱 놀라웠다.
후작가라면 위로 황실과 공작가 단둘밖에 없는 엄청난 대귀족이다.
그런 곳의 장남이 넘어진 아이를 손수 허리를 굽혀 일으켜 주다니. 거기에 흙 묻은 꽃을 스스럼없이 옷에 꽂기도 하고.
시안 아그리드에 대한 안 좋은 소문 역시 수없이 들려왔지만, 이미 알렌에게 그 소문들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형체 없는 뒷소문보다는 스스로의 눈을 더 신용하는 남자다.
그때 그가 본 시안이란 사내는 소문과 같은 천박한 남자가 아니었다.
“알렌 학생?”
“……상담은 괜찮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혼자 해보려고 합니다.”
어제, 시안과 얘기하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마 자신이 어떤 심각한 얘기를 털어놓든 간에 녀석은 평소처럼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일관하겠지.
그것을 상상하니 자신을 짓누르는 짐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자신의 고민이라고 해봐야 이 넓은 하늘과 대지에 비하면 티끌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시군요.”
알렌의 말에 융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뭐 어쨌든 파고들 틈은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했다.
성과라고 하기엔 조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강제로 캐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럼 저는 이만.”
“오후 수업도 힘내세요.”
융의 배웅을 받으며 알렌이 강의실로 향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별다른 진전 없이 끝이 났다.
* * *
다음 날 아침.
수업을 가기에 앞서 시안은 염노에게 받은 보약부터 데우기 시작했다.
염노의 말로는 보글보글 끓기 전에 살짝 데우기만 하고 먹어야 약효가 극대화된다고 그랬었지.
‘갑자기 웬 보약이지.’
12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염노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을 챙기고 있다는 것일까.
이윽고 약이 적당히 따뜻하게 데워졌다.
그릇에 담은 후 침대에 걸터앉아 쭈욱 한 모금.
그 순간, 시안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흡!”
저절로 비명이 나오려 하는 입을 반대쪽 손으로 다급히 틀어막는다.
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내내 느껴지는 식도가 타들어 가는 느낌.
그 뜨거운 열기는 뱃속에 들어가서도 꺼지지 않고 그의 몸을 갉아 먹을 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었으니.
절대 보약이 아니었다.
이건…….
‘영약?’
다른 고위 귀족의 아이들은 심심치 않게 먹고 있는, 그러나 그림자에 불과한 그는 단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조차 없는.
시안의 눈이 흔들렸다.
―뒷산에서 캐온 약초로 달인 보약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뒷산에서 캐온 것일 리가 없었다.
그런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캐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분명 거금을 주고 구했거나, 혹은 가주에게 하사받았거나. 그런 물건이 분명했다.
그걸 자신에게…….
‘…….’
시안이 천천히 입가에서 손을 치웠다.
그릇에 든 약을 보며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염노가 이걸, 굳이 자신이 돌아가는 길에 꾸러미에 넣어 안겨 주었는가.
짐작이 갔다.
만약 자신이 이것의 정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무조건 염노에게 사양을 했을 테니까.
……뜨거운 열기가 뱃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시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그릇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약이 넘어가는 내내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궈졌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지도 그릇을 놓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릇을 모두 비우고 나자.
태양을 고스란히 삼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후…….’
그가 호흡에 주의하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태양을 그가 천천히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몸에 새겨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난 후.
간신히 그것이 조금씩 깎이기 시작했다.
시안은 반쯤 눈을 뜨며 깊게 날숨을 뱉어냈다.
가만히 앉아 명상만 하고 있었음에도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빛 한 점 없는 절벽에서 등반을 하던 때보다도 심력 소모가 더욱 컸다.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연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미 수업에 갈 시간은 진작 지났지만 지금 수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풀리기 시작한 태양을 조금씩 건드리며 그 기운을 몸속에 새겨나갔다.
치이이이―
입가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전신에 쌓여 있던 독기가 태양 빛 기운에 모두 타들어 가며 폐를 통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한나절이 지나고.
해가 떨어진 후부턴 연공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약 기운을 풀어내는 것에 익숙해진 것도 있고, 밤이 되어 밤의 기운이 훨씬 강해진 것도 있다.
이윽고 그가 완전히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론 높다랗게 떠오른 보름달이 비치고 있었다.
“후우…….”
깊은 날숨으로 마무리 지으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그럼.’
시안이 잠시 일어나 몸을 움직여보았다.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음에도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관절은 훨씬 더 부드럽게 돌아갔고 근육은 팽팽히 당긴 활시위마냥 힘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은 눈.
마치 눈꺼풀 뒤쪽을 세척이라도 한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다. 창밖을 보니 어둑한 밤의 풍경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전신을 메우는 기운이 이전보다 촘촘하고 가득했다.
‘이건 아직은 안 되나.’
그가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태양과 같은 기운을 거의 다 풀어서 녹여내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뜨거운 열 덩어리.
그것만은 아무리 건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경지론 무리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지금 얻은 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했다.
[ 검령(劍靈) – 흑검(黑劍) ]
그가 흑검을 불러내었다. 그의 손에 꼭 맞는 단단한 검. 그곳에 의지를 담으니.
우웅―
어두운 밤하늘의 기운이 검을 감싸며 넘실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