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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38화 (3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8화

체샤는 볼일이 있어서 남는다고 하고, 시안이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아그리드 영지로 돌아온 그가 워프 게이트를 타러 가기 전 염노를 만나러 왔다.

“도련님. 용무는 모두 끝나셨나 보군요.”

“응. 그 붕대는?”

염노를 본 시안이 곧바로 달라진 점을 눈치챘다.

그의 소매 안쪽에서 살짝 하얀 붕대가 보인 것이다.

염노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얘기했다.

“업무를 보는데 책상에 못이 하나 튀어나와 있더군요. 그냥 스친 상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시안이 잠시 염노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그의 자세와 동작에선 부상자 특유의 움츠린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별것 아닌 상처란 얘기겠지.

“워프를 타러 가시는 길입니까?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염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그가 마차에 올라탔다.

도시 내부를 돌아다니는 용도의 천장이 오픈된 마차였다.

천천히 도심지를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시안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가주님과의 만남은 어떠셨습니까?”

“나쁘진 않았어.”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시안의 대답에 염노가 웃었다.

“도련님. 이거 받으시지요.”

“이건?”

염노가 옆자리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더니 꾸러미 하나를 꺼내 시안에게 건넸다.

시안이 의아하게 그것을 받았다.

안에는 찰랑이는 액체가 들어 있는 나무 상자, 그리고 손바닥에 쏙 들어갈 크기의 검은 구체가 있었다.

“요새 소일거리 삼아 설렁설렁 뒷산에 오르고 있답니다. 도련님이 아카데미에 가시니 할 일이 없어져서 말입니다. 거기서 캐온 약초로 달인 보약입니다.”

“보약? 염노나 먹지 나한테 왜…….”

“허허허. 저도 물론 매일매일 마시고 있습니다. 그건 도련님 드리려고 따로 달여 놓은 겁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고마워.”

시안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그가 검은 구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뭐지?

“아, 그쪽은 폭탄입니다.”

“……뭐?”

염노의 말에 구체를 만지작거리던 시안의 손이 흠칫 멈췄다.

염노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폭발마법을 새겨 넣은 녀석입니다. 폭뢰라고 하죠. 제 불꽃을 담아 놓았으니 적잖이 쓸만할 겁니다.”

“호…….”

“간이 워프석도 써버렸으니까요. 여차할 때 몸을 지킬 물건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위력이 제법 세니까 사용에 주의해 주십시오.”

“그래, 알았어.”

검사인 그에게 광범위하고 강력한 공격 수단은 없었다.

비록 일회용이긴 하나 아주 요긴하게 쓰이리라.

시안이 폭뢰와 보약이 담긴 꾸러미를 다시 꽉 동여매었다.

이윽고 영지의 워프 게이트에 도착하고, 그곳에 있는 천둥마탑의 마법사에게 대금을 건넸다.

시안이 게이트에 한 발짝 발을 디뎠다.

“항상 몸조심하십시오.”

그런 시안을 보며, 염노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시안이 그에게 살짝 웃어주곤,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 * *

그날 저녁.

시안은 평소처럼 뒷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 기숙사 방에 있었다.

연공을 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라비에 대한.

“라비, 넌…….”

“웅?”

시안의 생소한 모습에 라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녀석을 보며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라비는 베리엄의 힘을 친숙한 기운이라며 받아들였다.

그리고 가주의 말에 따르면 베리엄은 지옥의 악마에게 힘을 빌리는 흑마법사다.

그 말은 즉, 라비 역시 지옥의 존재라는 뜻.

그리고 가주는 얘기했다.

지옥의 악마들은 항시 숙주의 몸을 탐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라비도 그런 것일까?

자신의 몸을 노리고 있는?

“우웅.”

“……!”

움찔.

생각에 빠진 시안에게 라비가 다가왔다. 언제나처럼 쓰다듬어 달라며 손 쪽으로 다가온 라비.

그러나 시안이, 무심코 손을 뒤로 빼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항상 생각하고 관찰하고 판단해야 했다.

그림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항상 사람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그 버릇과도 같은 경계심이 불쑥 도져버렸다.

“우……?”

그러자 라비가 떨리는 눈망울로 시안을 보았다.

연결되어 있는 정력 각인을 통해 라비의 감정이 고스란히 시안에게 전해져 왔다.

당황, 당혹, 슬픔.

울먹이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뭐 하고 앉았냐.’

라비의 감정이 자신에게 전달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 역시 녀석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뜻.

자신의 불안과 나아가 지옥의 존재라는 것에 대한 경계심 역시 전달되었을 터였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존재여야 할 계약자가 그런 감정을 보내다니.

“우웅!!”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라비는 그러나 울지 않았다. 오히려 강단 있게 스스로 시안에게 뛰어들었다.

시안이 녀석을 받아 들었다.

녀석은, 그 작은 몸집만큼이나 가볍기만 했다.

“미안하다.”

그가 사과의 말을 건넸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와 라비는 각인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우웅! 웅!”

화를 내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는 라비.

그러나 분노의 감정은 겉으로 보이는 감정일 뿐이고 그 안은 달랐다.

사그라지는 불안, 그리고 피어오르는 안도감.

“네가 나보다 낫구나.”

그런 녀석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아기고양이의 머리라도 쓰다듬는 것 같은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작게 한숨을 쉬며 시안이 상황을 정리했다.

‘……판단 근거는 하나.’

다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이성적인 근거가 필요했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살아왔던 17년의 삶이었기에.

이번 경우에 근거는 하나.

라비의 힘에는 확실한 메리트가 있다. 그 메리트 없이 앞으로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것.

시안이 손바닥을 펴곤 스스로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내 재능이 모자라다 생각해본 적은 없다.’

잘난 척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어지간한 것들은 한 번 보고 기억할 수 있었고, 어려운 검술 동작도 한 번의 시연으로 완벽히 따라 할 수 있었다.

배움에 막힘은 없었고 숙달은 빨랐다.

14살부터는 단순한 배움의 영역을 넘어 상천검이라는 검술을 만들어내기까지.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충분하냐고 물어본다면, 고개를 젓게 된다.

베리엄의 건은 어찌 보면 운이 좋은 것에 불과했다.

미지의 적들이 자신이 진짜 시안이라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기에 찾아온 행운.

지금 당장은 그 행운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들키는 날이 올 것이다.

들키지 않더라도 적들이 방심하지 않게 되는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가 되어, 가주도 자신을 버리겠다 판단을 내렸을 때,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알량한 재능 따위로?

‘필요한 건 재능이 아냐.’

필요한 건 당장의 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형체 없는 위협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안전한 길이 아니라, 리스크가 있더라도 확실하게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이니까.

“라비.”

“웅?”

그가 라비와 함께 시련의 정상에 도달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봤던 눈물.

그것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냐.”

“우웅.”

그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라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골골거렸다.

‘흑마법사 퇴치에 조금 더 공을 들여야겠군.’

안 그래도 가주의 탓에 흑마법사 녀석들과 엮일 판이다.

녀석들을 퇴치할 이유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할 일에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이전에는 그저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동적인 이유뿐이었다.

하지만.

“잘 부탁한다.”

“웅웅!”

이제는 적극적으로 잡아다 뽑아먹을 이유가 생겼다.

* * *

라비와 화해한 후 ―싸운 적도 없긴 했지만― 언제나처럼 뒷산에 올라 밤의 기운을 연공했다.

가만히 앉아 그 기운을 빨아들이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과거 평범하게 마력을 쌓을 때보다 기운의 축적이 빠르니 수련하는 맛도 나고.

그렇게 오늘도 새벽까지 연공을 하고 내려오던 중.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알렌 크루거가 담을 넘어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어? 시안? 안 자고 뭐 해?”

“그건 내가 물을 말이다만.”

시안이 알렌을 향해 턱짓을 하였다.

그의 모습은 도저히 정상은 아니었다.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폐수 같은 것에 옷 곳곳이 젖어 있었다.

“냄새난다, 너.”

“하하…… 미안. 일이 좀 있어서.”

녀석이 볼을 긁적이며 얘기했다.

“무슨 일인데?”

“잡화점의 코니 아저씨한테 의뢰를 하나 받았거든. 하수도의 시궁창 쥐를 토벌해 달라고.”

“시궁창 쥐면 마물 말인가?”

“응. 쥐새끼들이 항상 그렇긴 하지만 어느새 숫자가 불어나서 가게에까지 올라왔던 모양이야.”

뭔가 묘했다.

그냥 평범하게 얘기하고 있을 뿐이긴 했지만, 묘하게 알렌의 어조가 거친 느낌이었다. 쥐새끼라는 단어도 그렇고.

이렇게 강하게 말을 하는 애가 아니었는데.

“낮에 미리미리 해놓지.”

“낮에도 갔지. 사실 잡화점 근처는 이미 다 청소했는데, 하는 김에 안쪽까지 청소해 놓을까 해서.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뭐지?”

“그때 그레이트 힐에서 고블린 킹 상대할 때 말야.”

“어.”

“그 녀석 상태가 좀 이상하다거나 그러지 않았어? 눈이 붉었다거나.”

“마물들 눈이야 금방 붉어지고 그런 거 아닌가?”

“음, 뭐 그런가. 그러면 다른 점은? 갑자기 놈의 힘이 강해지거나 정신이 이상해 보이거나 그러지는?”

“힘이 강해지긴 했다만 그건 주술의 힘이었고, 정신은 글쎄…… 내가 마물의 정신세계까지는 모르겠군.”

시안이 그에게 오른손에 끼고 있는 파워 건틀릿을 보여주었다. 정확히는 손등의 주술 타투를 보여준 것이다.

“그렇구나…… 흐음…….”

그 대답으로 만족했는지 아닌지, 알렌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심에 빠졌다.

“걱정이 많아 보이는군.”

“……티 많이 나?”

평소 웃고 다니는 녀석인 만큼 고민하고 있을 때 더 티가 많이 난다.

“고민이 있다면 고집부리지 말고 누군가에게 상담해. 룸메이트라던가 뭐라던가.”

“게일한테?”

“친한 사이라면 상담 정도는 받아주겠지.”

그 말에 알렌이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그게 사실은…….”

“아니. 나는 빼고.”

“하하, 농담이야 농담.”

시안이 한숨을 쉬었다.

“빨리 들어가 씻고 자라.”

“아하하. 알았어, 너도 잘 자.”

함께 사파이어관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연공을 하느라 땀과 노폐물이 흘렀기에 시안도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간단한 샤워 시설 정도는 방마다 있었기에 공동 시설에 갈 필요는 없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시안이 이것저것 떠올려 보았다.

근래 있었던 여러 일들.

그것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사그라들었다.

‘샤워를 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떠오른다더니.’

모 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었던 것 같다.

사람의 몸은 자극을 받을수록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고, 전신에 물줄기를 받는 샤워를 하면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그런 쪽의 학문은 교양 수준으로밖에 모르기에 검증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지금 시안의 상태가 그러했으니.

‘알렌.’

그러던 중, 문득 그가 방금 만난 알렌을 떠올렸다.

고블린 킹의 힘이 갑자기 강해지거나 정신이 이상해 보이진 않냐고 묻던 말.

그러자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베리엄도 흑마법사였단 말이군요.

―그래. 싸우던 중에 갑자기 놈의 힘이 강해지거나 정신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더냐?

가주와의 대화.

알렌이 한 말과 가주의 말이 완전히 겹쳐서 들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가만히 멈춰 있던 시안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를 닦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냥 우연이겠지.”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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