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7화
딸랑-
고요한 회의실에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그 방울이군.”
가주가 시안이 건넨 금령을 들어 보았다.
물론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구울은 없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은연히 풍겨오는 흉흉한 마력만으로도 이것이 귀물(鬼物)임은 틀림이 없었다.
“거인들의 무덤의 사기(死氣)를 이용해 제작한 물건으로 보입니다. 기운의 패턴을 해석할 수 있다면 역추적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고대의 유물이 아닌 제작된 아티팩트는 모두 어떠한 마력의 패턴을 가지고 있다.
제작자 특유의 버릇이 들어간 고유의 패턴.
때문에 경험이 많은 고위의 마도사는 아티팩트를 보기만 해도 그것의 제작처를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 경우에는 패턴을 가려놓으려 애를 썼을 테니 해석이 따로 필요하겠지만…….
“좋은 의견이야. 착수해 보도록 하지.”
가주가 테이블에 방울을 내려놓곤 시안을 쳐다보았다.
그 눈에 흥미가 포함된 고민의 빛이 비쳤다.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요 녀석을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하는 모습.
시안은 가만히 서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의 그는 가주와의 관계에서 능동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직은.
“칠흑마탑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
서론조차 없이 가주가 화두를 던졌다.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마탑의 종류는 강철마탑, 화염마탑, 서리마탑, 자연마탑, 천둥마탑 5개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론 그렇지. 하지만 사실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게 칠흑마탑.
현세의 대가를 바쳐 지옥의 악마들의 힘을 빌리는 사악한 흑마법사가 모인 곳.
일반적인 마탑이 저 하늘에 닿고자 높디높게 쌓아 올려진 것에 비해 칠흑마탑은 다르다.
놈들은 지하로 파고들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하늘이 아닌 지하 나락의 끝이었으니.
“나는 개미굴이라고 부르고 있다만.”
지독한 멸칭을 내뱉는 가주를 보며, 시안의 눈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칠흑마탑. 그 녀석들이 베리엄의 뒤에 있던, 그리고 가주가 노리고 있는 놈들이었군.
그리고 그 말은 라비도…….
‘아니, 이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가주에게서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듣는 것이 먼저다.
생각은 그다음.
“칠흑마탑의 시초는 거인족이다.”
“거인…… 말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거인과 종족 연합 사이의 전쟁에서 거인의 편을 들었던 배신자들이 그 시초지.”
생각보다 더 유래가 깊었다.
“인간의 마나는 물과 같다, 들어본 적 있겠지?”
“예. 유명한 역사책에 나왔던 말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나는 물과 같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웅덩이를 만들고 강을 이루며 이윽고 바다에 다다른다.
수인의 마나는 불과 같아 일순간을 불태우며, 반요정의 마나는 바람과 같이 자유로워 구속받지 아니한다.
그리고 거인의 마나는…….
“거인의 마나는 땅과 같이 진중하며 이윽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 닿는다.”
“그래. 그것은 단순히 비유의 표현이 아니다. 당시 거인들은 정말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지.”
지옥, 지옥계, 혹은 나락의 끝.
그것에 닿았기에 비로소, 거인들은 세계의 패권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이 가주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영웅들의 헌신과 희생 끝에 거인은 멸망했고 지옥의 문은 닫혔다.
남은 것은 거인의 편에 붙었던 지독한 배신자들.
“배신자들은 아직도 남아 있어.”
가주가 회의실의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 그것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수많은 집들과 논밭, 그리고 목축지들.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물건을 옮기는 상인이 보였고, 어린아이를 업고 빨래를 너는 젊은 아낙이 보였다. 나뭇가지를 들고 뛰어다니는 개구쟁이 꼬마 아이도.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도시의 풍경이었다.
“마법이란 본디 스스로 쌓아 올리는 것. 하지만 놈들은 다르다. 그들은 대가를 바쳐 제 것이 아닌 힘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지. 그렇기에 흑마법사라 불린다.”
스스로의 단련도 섭리에 대한 탐구도 그 어느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샛길로 받은 힘만을 부리는 자.
5대 마탑은 그들을 마법사라 규정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하여 지어진 명칭이 흑마법사.
“그렇다면 베리엄도 흑마법사였단 말이군요.”
“그래. 싸우던 중에 갑자기 놈의 힘이 강해지거나 정신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더냐?”
시안이 잠시 눈을 찌푸렸다.
그야.
‘그런 적 없는데?’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니까.
그런데도 가주는 마치 그랬을 것이 틀림없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
어째서?
‘그러고 보니.’
시안이 슬쩍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보이는 건 라비가 잠들어 있는 흑색의 문양.
베리엄을 베어냈을 때 갑자기 라비의 기운이 폭풍처럼 증가했던 순간이 있었지.
‘혹시 그때가?’
그때가 가주가 말하는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놈들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라비의 능력 탓에 베리엄의 어떠한 노림수가 엇나갔다든가.
그거라면 이해가 되었다.
여기까지 결론을 내린 시안이 가주에게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물로 무구를 만들어 쓰던 놈이더군요. 마지막 순간에 전신을 뒤덮는 갑주를 만들어내려고 했었습니다. 완성되기 전에 베어버렸습니다만…….”
거짓을 말하진 않았다. 얘기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
베리엄이 마지막에 만들려고 했었던 갑주. 그 갑주도 그때까지 상대했던 베리엄의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주의 말처럼 갑자기 힘이 증대된다거나 폭주하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던 것이다.
그래도 그걸 모두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야 가주가 알아서 오해해 줄 테니까.
“잘했군. 숙주에게 완전히 강림하기 전에 목을 베는 것이 가장 좋아.”
가주가 피식 웃었다.
시안의 말에서 딱히 의심스러운 것은 발견되지 않았던 탓이다.
시안이 잠시 가만히 있다 질문을 던졌다.
“혹시 흑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진 않지만, 적지도 않아. 일단 황제 폐하를 포함해 황실의 주요 인사들은 다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도 마찬가지겠지.”
“가문에서는 누구누구가 알고 있습니까?”
“나랑 염노뿐이다. 애초에 염노가 우리 가문에 몸을 의탁하게 된 것이 흑마법사 때문이었으니까.”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단지, 어찌하여 그들의 존재를 공표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은 있었다.
아마도 그건.
‘놈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얻는 게 있나 보군.’
무언가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겠지.
역사상 권력자가 무언가를 숨기는 이유는 그것 외에는 없었다.
백성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같은 허울 좋은 명분 따위 시안은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할 일은 놈들로부터 아가씨를 지키는 일이군요.”
“그래. 하지만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좋다. 하던 대로 학교나 다니면 돼.”
가주가 말을 이었다.
“네가 사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아이는 안전할 테니까.”
“…….”
대놓고 미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뒷사정을 모두 얘기했으니 더는 숨길 것도 없다는 것일까?
‘아니.’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리라.
설령 자신이 배신을 하여 흑마법사의 편에 붙는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체샤의 방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가주에게 있어 자신은 체샤를 감싼 울타리 중 가장 바깥에 있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딱히 문제 될 게 없는 그런 존재일 테니까.
흑마법사의 손에 살해당한 본래의 시안과 똑같이.
“명 받들겠습니다.”
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그 아래에서,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흑마법사의 존재.
어찌 보면 새로운 산이 나타난 셈이다. 가주라고 하는 큰 산을 넘기 전에 넘어야 하는 산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그 두 산이 서로 부딪히고 있는 상태라면?
범들의 싸움에 강아지의 등은 터지게 마련이지만, 반대로 매와 살쾡이의 싸움에 사냥꾼은 득을 보는 법이다.
강아지가 될 것인가 사냥꾼이 될 것인가.
결국은 자신에게 달렸다는 얘기.
“그럼 저는 아카데미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이 이상 들을 말은 없었다.
가주에게 인사를 하곤 시안이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아.”
“……체샤.”
그리고 그곳에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체샤를 발견했다.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힐끔 가주를 보았다.
이미 의자를 돌린 채 창밖을 향하고 있는 모습. 체샤가 엿들었다고 타박하는 듯한 모습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게도 흑마법사의 존재를 알릴 생각이었나.
“가자.”
“넵.”
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건 없다.
그녀를 데리고 시안이 회의실을 뒤로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묘한 울림이 되어 퍼져 나갔다.
* * *
지난밤.
본성에서 떨어진 별채. 그 앞을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베리엄을 감시하기 위한 아그리드의 기사들.
그들이 사나운 기세를 풍기며 날카로이 사위를 살폈다.
그 기세가 어찌나 험악한지 베리엄을 치료하러 온 치유사들이 벌벌 떨 정도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윽……!”
“커헉!”
그들이 갑자기 눈을 떨더니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기절한 그들을 지나쳐 거뭇한 무언가가 별채의 문틈으로 빨려들었다.
불이 꺼진 별채 안으로 들어온 무언가.
그것이 마치 뱀처럼 고개를 치켜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내 목표를 찾은 그것이 사르르 침대에 접근했다.
“!”
잠시 후, 그것을 목격한 베리엄이 눈을 부릅떴다.
읍! 읍읍! 그가 덜커덩거리며 마구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꼼꼼히 구속된 그의 몸은 침대를 흔드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 앞에서 검은 뱀이 쩌억 아가리를 벌렸다.
“으읍―!”
베리엄의 눈에 핏발이 서며 그가 더욱 거세게 덜컹거렸다.
그러나 별채 안의 소란으로 그칠 뿐,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바깥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그 순간. 핏대를 세우며 발버둥을 치는 베리엄을 검은 뱀이 물어뜯으려는 그때.
“조치가 빠르군.”
뱀의 목을 누군가의 손이 틀어잡았다.
베리엄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여기로 데려온 노인, 염노였다.
“붙잡혔다고 곧바로 살인멸구라니. 꽤나 훌륭한 상관을 갖고 있구나, 꼬마야.”
덜덜 떠는 베리엄을 날카롭게 내려다보며, 염노가 손에 힘을 주었다.
잡혀 있던 검은 뱀이 뿌직,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화르륵.
그 잔해를 염노가 피운 불이 모조리 불태웠다.
“으, 으으으…….”
베리엄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염노가 내심 의아해했다.
뭐지? 이 정도로 강단이 없는 사내였나?
목숨을 걸고 도련님을 암살한 녀석이라기엔 지나치게 겁먹은 모습.
염노는 모르고 있었지만, 베리엄의 모든 배짱과 담력은 그를 수호하던 해령궁주가 있기에 나온 것이었다.
그 힘이 편린도 없이 떠나간 지금, 베리엄은 극심한 공포와 고독을 느끼는 중이었다.
‘들을 게 많겠어.’
아그리드 가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다.
그만큼 아는 것을 술술 불어줄 테니까.
“일단 장소는 옮겨야겠구나.”
염노가 구속된 베리엄을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살인멸구를 위한 암습이 들어온 이상 이곳에 그대로 놔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구속구에 손을 가져가 댄 그때.
뚝.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염노가 발치를 쳐다보았다. 그곳에 두어 방울, 검은 물방울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직후.
샤아아아―!
검은 방울이 순식간에 방 전체로 퍼져 나가더니,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을 모두 뒤덮었다.
그곳에서 빽빽한 나뭇가지처럼 검은 가시가 돋아났다.
그 선단이 모두 염노와 베리엄을 향했다.
“오늘 밤은 잠들긴 글렀군.”
염노가 작게 한숨을 쉬며 검은 장갑을 꺼내 끼었다.
그 손에서, 핏빛처럼 붉은 화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