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4화
염노가 모는 마차가 매끄럽게 달려 나갔다.
목적지는 에버웨일. 그곳에 있는 대규모 워프 장치이다.
가격이 상당히 나가긴 하지만, 아그리드 영지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 도시에 도착한 두 사람이 베리엄을 짊어지고 워프 장치를 사용했다.
이윽고 시안이 아그리드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다.
커다란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내성벽.
벽 안쪽으로 보이는 본성과 몇 채나 되는 건물들. 그리고 연병장들.
―스르르.
염노가 모는 마차가 검문 하나 없이 내성벽까지 모두 통과했다.
그리고 도착한 본성.
시안이 마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시안 도련님.”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가문의 하인·하녀들이 줄 서서 그를 맞이했다.
시안이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쭉 살펴봤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얼굴을 익혀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본성의 하인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가 지내던 곳은 도시 구석에 숨겨지듯 있던 작은 저택이었고, 본성을 밟은 적은 거의 없었다.
“…….”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하인들의 혈색이 하나같이 파리해졌다.
마치 당장에라도 해코지를 해오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처럼.
본래의 시안이 본가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이것만으로 눈에 훤했다.
“쯧쯧.”
옆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염노가 기분 나빠하는 소리다.
이런 일로 괜히 소란 떨 필요는 없지. 시안이 염노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염노가 순식간에 표정을 풀며 얘기했다.
“아직 바깥일을 하고 계십니다. 곧 돌아오신다고 하시니 그때까지 쉬시도록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예.”
따라오려는 하인들을 내치고 두 사람이 저택 안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 시안이 얘기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서먹하군.”
“죄송합니다. 일이 일인지라 뭐라고 언질을 줄 수도 없어서…….”
“괜찮아, 그런 건. 이 정도 거리감이 딱 좋아. 오히려 친한 이가 있었다면 더 피곤했을걸.”
“그것도 그렇군요.”
시안의 말에 동의하며 염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본래의 도련님과 친한 하인이 있었다면 지금의 시안에게서 뭔가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건 가주도 염노도, 시안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기에 거리가 있는 쪽이 편하다는 게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사람을 만드셔야 합니다, 도련님.’
살면서 찾아올 많은 일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가주의 사람이 아닌 시안 자신의 사람이.
하지만 염노의 입장에선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가주의 사람이었으니까.
“이곳입니다.”
방에 도착했다. 본래의 시안이 어릴 때부터 쓰던 방이었다.
시안이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았다.
요 몇 달 동안 아무도 쓰지 않은 방이었음에도 깔끔하고 청결했다.
매일같이 하녀가 청소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는 가주님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아마 저녁 전에는 돌아오실 것 같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
염노가 가고 방에는 시안 혼자만 남았다.
잠시간 비어버린 대기시간.
검을 휘두르기에도 애매하고 기운을 쌓기에도 애매했다.
시안은 유적에서 얻었던 것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정체 모를 기운이라…….’
자신의 심상세계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꿈의 시련. 그 시련에서 얻은 라비가 가진 기운과.
그리고 본래의 시안을 암살한 녀석이 가지고 있던 기운이 동일하다.
이건 그냥 우연인가?
알 수 없다. 가주에게 놈들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얻기 전까진 추측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만 한 가지 소득이라고 한다면.
‘이 기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
자신이 정령을 가지고 있단 정도는 공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정령이 이 정체 모를 기운을 가지고 있음은 아무도 모른다.
기운을 빼앗긴 베리엄 본인조차도 모르겠지.
베리엄이 모른다는 것은, 가주 역시 모른다는 말이었다.
가주가 아무리 녀석을 걸레 짜듯 쥐어짠다고 해도 모르는 정보를 뱉어낼 순 없지 않은가.
‘이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주가 모르는 힘을 가지게 된 건 큰 수확이야.’
이것만으로도 에버웨일을 다닌 보람이 있었다.
에버웨일이 아니었다면 라비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일단 가주를 만나고 와서, 바로 수련장에 틀어박힐까.’
어찌 됐든 자신의 기운이 되었으니,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그것도 있지 않은가.
‘새로 얻었다는 능력.’
라비가 새로 얻었다는 검령.
그것도 확인해 봐야 했다.
―똑똑.
그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시, 실례합니다.”
끼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들어왔다.
하녀였다.
“차랑 간식을 좀 가져왔습니다.”
“고맙군.”
누가 봐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가 차와 다과를 테이블에 세팅했다.
염노에게도 얘기했지만 적당한 거리감은 있는 편이 좋다.
시안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일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런데, 세팅이 모두 끝나고도 그녀는 방에서 나가질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시안이 먼저 물어보자 머뭇거리기만 하던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아가씨께서 걱정하고 계셨어요!”
“아가씨?”
잠깐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내 기억해낼 수 있었다.
분명 본래의 시안에게 동생이 한 명 있었었지.
죽은 그를 대신에 남몰래 후계자로 세워진 후작가의 영애.
체샤 아그리드.
“체샤가?”
“예, 예. 사고가 난 후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마침 아가씨께서 저택에 계십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한번 방문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체샤 아그리드.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본래의 시안에게서 얘기는 많이 들었다.
귀여운 여동생이라며 시시때때로 자랑을 하곤 그랬었지.
그 망나니조차 본성을 숨기고 귀여워했던 작은 아가씨.
그러나, 솔직히 별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시안을 연기하고 있다지만 가족 앞에선 어느 정도로 속일 수 있을까 확실치 않았으니.
“일단 알았다. 알아서 할 테니 일터로 복귀해.”
“예, 예에…….”
딱 선을 긋는 시안의 말투에 그녀가 어깨를 축 떨구며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악평이 자자했던 망나니 도련님과 달리 아가씨 쪽은 가문의 일원들에게 나름의 인망을 얻고 있는 듯했다.
그녀를 위해서 시안에게 직언을 올리는 하녀까지 있을 정도니.
“가급적이면 피해야겠군.”
그래서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죽은 시안을 계속 연기하고 있는 이유는 새로이 후계자가 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외부엔 아직도 장남인 시안이 건재하다고 어필함으로써 진짜 후계자를 가리기 위한 위장술.
그러니 되도록 만나지 않는 쪽이 상책이다.
미끼가 피보호자에게 접근해 봐야 좋은 점 따윈 하나도 없다.
“후우.”
차를 마시며 그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한쪽에 연무장이 보였다. 몇몇 검사들이 검을 나누고 있는 모습.
그걸 지켜보며 차 한 잔을 다 마실 때쯤.
“도련님. 가주님께서…….”
염노가 면목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찾아왔다.
“무슨 일 있나요?”
시안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 * *
듣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가주가 오늘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
고작 그런 일에 염노가 쓴웃음을 지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더 늦어지겠습니다.”
시안이 에버웨일로 돌아가는 것이 하루 더 늦어지는 것에 대한 염려였다.
그가 피식 웃으며 얘기했다.
“하루 정도야 상관없어. 애초에 교외수업 때문에 정규 수업은 미리 빼놔서 문제없다.”
“그래도 학교를 빠지는 것은…….”
염노가 걱정스레 얘기했지만 무슨 수단이 있을 리도 없었다.
가주의 일정을 미룰 수도 없고, 바쁜 가주에게 시안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오늘 밤은 자고 가야겠군.”
“그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염노는 시안의 개근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뭐 애초에 결석이 잦을 수밖에 없는 에버웨일에는 개근상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럼 난 저녁까지 수련장에 있을 테니 그때 불러줘.”
“알겠습니다.”
염노와 헤어져 시안이 수련장으로 향했다.
시안의 개인 수련장. 보다 정확하게는 본래의 시안이 쓰던 개인용 수련장.
그곳에 도착한 시안이 잠시 수련장의 상태를 살폈다.
“완전히 새거 같군.”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제 막 지어진 새것이라 해도 믿을 만하겠다는 것.
깔끔히 청소되어 있던 방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방은 청소만 잘 되어 있을 뿐 오랫동안 써왔던 흔적은 제대로 남아 있었다.
반대로 이 수련장은 전혀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본래의 시안이 얼마나 농땡이를 피워왔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뭐 상관없지.’
수련장이 새것이든 헌것이든 전혀 상관없긴 하다.
몸을 움직일 공간만 있다면 뭐가 됐든 상관없다.
‘그럼 일단.’
먼저 확인해 볼 것은 이거다.
베리엄을 처치하고 라비가 새로 얻었다는 능력.
[ 검령(劍靈) – 창해(蒼海) ]
능력을 사용하자 시안의 손에 밤의 기운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물줄기를 토해내었다.
그것은 이윽고 얇고 수려한, 한 자루의 검을 만들어갔다.
마치 보석처럼 보이는 푸르고 투명한 검신.
‘또 검이라…….’
다시 보니 새삼 미묘했다. 왜 하필 또 검이란 말인가?
라비가 검의 정령이었으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라비는 흑정령. 정황상 밤의 정령과 비슷한 계통의 정령이었다.
검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창해를 다시 각인에 집어넣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명상과 동시에 연공을 시작하며, 그의 의식이 점차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스스로의 세계에 파고든 그가, 그 안에서 라비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3가지 정도.’
첫째는 베리엄의 능력을 가져왔을 가능성.
녀석도 물로 검을 만들고 갑주를 만들고 그랬었다. 그 능력을 흡수한 것이라면 새로 얻은 것이 또 검이어도 이해가 간다.
‘둘째는.’
라비가 본래는 검과 관련 있는 존재일 가능성.
이 경우 어쩌면 이건 큰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라비의 정체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은.
‘……내가 검을 써서.’
자신이 검을 쓰기 때문에.
그 때문에 라비의 새로운 능력도 검으로 발현되었을 가능성.
이런 경우는 뭐라고 해야 좋을까. 라비가 자신을 닮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까?
마치 아비와 아들처럼 성장해 가며 점차 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지금 당장은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군.’
앞으로 또 새로운 능력을 얻을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밝혀지는 것이 있을 테지.
라비에 대한 것은 그렇게 일단락을 내고, 그가 연공을 이어갔다.
1시간…… 2시간…….
한껏 집중 상태에 빠진 그는 시간을 잊고 연공에 몰입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창 연공을 하다 한 번 일단락을 볼 때쯤.
“…….”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들끓던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한 여성이 쪼그려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깨까지 오는 흑단발.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된 베이지색의 얇은 드레스 차림의 여성.
“오라버니가 이렇게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은 처음이에요.”
체샤 아그리드.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딸이자 지금은 죽은 본래의 시안의 동생. 아그리드의 새로운 후계자.
그녀는 자신…… 그림자에 대해 알지 못한다. 염노의 말에 따르면 오라비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리지 않았다고.
그것을 고려하여 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앞에서 꽤 많이 수련하지 않았나?”
아직 죽기 전의 시안에게 들은 말 중 하나였다.
동생에게는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수련장에 종종 데려가곤 한다고.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체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수련하는 척만 하던데요.”
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수련하는 척만.
본래의 시안의 의도를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냥 평범한 일상의 한중간, 염노가 스치듯이 했던 얘기.
―가주님의 피는 체샤 아가씨가 훨씬 짙게 이은 것 같더군요.
가주의 피.
단순히 딸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흐뭇한 얘기는 아닐 테지.
“정말로 오라버니는 죽은 거네요.”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