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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33화 (33/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3화

“대단해요! 굉장해요! 구울뿐만이 아니라 범인까지 잡고 나오시다니!”

“감사합니다.”

“제 13번째 스승이 되어주세요!”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자리가 모두 정리된 후, 정화교단과 용병들에 의해 남은 구울들의 토벌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 시안을 비롯한 일행들은 유적 밖으로 나와 샤밀라와 대면했다.

이 이상 구울들을 잡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 보수를 먼저 드려야죠! 그 중요한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샤밀라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 주섬거리더니 돈주머니 네 자루를 가져왔다.

그걸 받곤 일행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어떤 선물이라도 돈만 한 게 없었다.

‘임무 성과에 따라 학교에서 주는 추가 점수도 있으니까.’

학생 신분으로 더 바랄 게 없었다.

그러나 샤밀라가 주는 보수는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그녀가 품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반지를 꺼내 일행에게 건넸다.

안쪽에 작게 샤밀라 드레이크의 이름이 새겨진 은반지.

“이건 뭐죠?”

이안이 의아해하며 질문하자 샤밀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이 적힌 반지예요! 나중에 교단 본부에 올 일이 있거든 거기 사제님께 보여주세요!”

“예에…….”

“이름?”

다른 일행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당대 성녀의 것보단 못할지라도 성녀 후보의 반지라고만 해도 꽤 가치 있는 물건인데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네.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이들은 샤밀라가 성녀 후보란 사실을 모르지 않던가. 본인이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후후…….”

그걸 귀신같이 눈치챘는지, 아니면 이걸 노리고 일부러 소개를 안 한 건지.

샤밀라가 고개를 돌리곤 키득키득 숨죽여 웃고 있었다.

나중에 교단에서 반지를 보여주고 놀랄 일행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시안도 그냥 조용히 품속에 반지를 넣었다.

그녀의 장난에 어울려 줄 의리는 없었지만, 굳이 나서서 훼방 놓을 것도 아니니.

“이제 어쩔 거야?”

보수를 모두 받고 일행이 한쪽에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미안한데, 잠깐만.”

“?”

의아해하는 일행들을 두고 시안이 잠시 떨어졌다.

그리고 품속에 손을 넣어 엄지손가락만 한 보석을 하나 꺼냈다.

빛이 수백 갈래로 퍼지는 신비한 색상. 자세히 살펴보면 표면에 깨알같이 음각된 각종 도형과 문자를 볼 수 있었다.

시안이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를 섬세하게 조정하여 보석에 집어넣길 5분.

파앗―!

보석이 빛을 발하며, 시안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무기를 들어 올렸으나 그럴 필욘 없었다.

츠츠츠츠츠.

이내 마법진이 줄어들더니 사람 하나 서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그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람이 나타났다.

시안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왔구나, 염노.”

오랜만에 만나는 염노였다.

마법진 안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의 손에도 시안의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보석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보석은 처음과 달리 완전히 빛이 바래 있었다.

간이로 워프 마법을 사용하게 해주는 아티팩트.

한 번 사용하려면 꽤나 오랫동안 마력을 충전해야 한다. 그 충전을 다 써버린 것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걸 사용하셨을 정도면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

“그게 말이지…….”

염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런 그에게 이젠 쓸모없어진 보석을 건네며 시안이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했다.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가 있고, 높은 확률로 이 녀석이 진짜 시안을 죽인 범인이라고.

그의 설명을 듣고 염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이 한 천막 안에서 묶여 있는 베리엄을 찾았다.

“이 녀석입니까?”

“맞아.”

두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는 베리엄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묶인 채로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였다.

“읍! 읍읍!”

그가 눈을 부릅뜨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녀석은 구속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눈이 파르르 떨려오며 동정심을 자아냈지만, 이 자리에 그에게 안쓰러움을 품을 사람은 없었다.

“그렇군요. 이 남자를 가문에 이송하는 것이 제 일입니까?”

“그래. 나 혼자 이송할 수도 있긴 한데, 만에 하나 놓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잘 알겠습니다. 누구도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잘 배달하겠습니다.”

“읍읍! 으읍!”

시끄럽게 구는 베리엄의 이마에 염노가 손을 짚었다.

그 손끝에 마나가 모이는가 싶더니, 이내 녀석이 깊은 잠에 빠졌다.

“신수가 훤하십니다, 도련님. 아카데미의 생활은 몸에 맞으신지요?”

베리엄을 잠재운 후 염노가 시안에게 얘기했다.

천막을 나오며 두 사람이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 좋아. 매일같이 덤벼드는 놈들도 많고 수업도 수준 높고. 밥도 맛있고.”

“그거 다행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좀 사귀셨습니까?”

“으음…….”

염노의 말에 시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얼마 전에 교외수업에 함께 갈 사람을 모집하던 때가 떠올랐다.

단 세 명 있는 지인, 그마저도 모두 거절당해 편법으로 팀을 짤 수밖에 없었던.

친구가 생겼냐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게…….”

“시안.”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이안과 레이나, 그리고 드론드.

함께 온 일행들이었다.

“방금 그 마법진, 워프 마법진 맞지? 네가 직접 썼을 리는 없고, 아티팩트?”

“어. 가문에서 가져왔던 게 하나 있어서.”

“크…… 역시 후작가는 달라도 다르구만. 뒤에 계신 분이 워프로 오신 분인가?”

세 사람이 시안의 뒤에 시립해 있는 염노를 보았다.

염노가 일행들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친구분들이신가요?”

그 환한 표정에 일행들이 살짝 놀라고 있을 때, 염노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얘기했다.

“시안 도련님을 모시고 있는 염노라고 합니다.”

“아, 집사시군요.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아, 안녕하세요.”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염노가 벅차오르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다행입니다. 우리 도련님이 사람 사귀는 것에 서툴러서 항상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런 거 아냐, 염노.”

“하하하.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정하는 시안의 말을 자연스럽게 흘려버린 채 염노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일행들이 살짝 눈을 돌렸다.

그들은 차마, 자신들이 결투에 져서 강제로 팀이 되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도련님이 비록 안 좋은 소문이 많지만 모두 오해입니다. 사실은 아주 마음씨 좋고 착하신 분입니다.”

“그, 그런가요?”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 도련님 좀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염노의 옆에서 시안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 그가 이내 한 아이를 톡톡 건드리고 따로 불러냈다.

“레이나.”

베리엄에게 납치를 당했었던 레이나였다.

“왜?”

“미안하다. 괜한 일에 휘말리게 해서.”

“…….”

레이나의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항상 방긋거리는 얼굴로 달라붙어 오곤 그랬는데 지금은 칼 같은 거리감이 느껴졌다.

화날 법도 하지.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었으니.

시안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염노는 이안, 드론드와 함께 하하 호호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그 모습을 일별하곤 그가 레이나에게 마저 얘기했다.

“아마 가문 차원에서 보상이 갈 거다. 아그리드의 체면을 생각하면 적은 보상은 아닐 거야.”

사실은 사죄의 의미보단 다른 의미가 더 큰 보상일 것이다.

입막음의 의미가 더 큰.

“괜찮아. 별로 신경 쓰지 마.”

쌀쌀맞은 표정이던 레이나의 얼굴이 정중한 시안의 태도에 조금은 풀어졌다.

사실 그녀는 딱히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지금까지 시안 앞에서 하던 연기를 때려치우고, 본래의 성격대로 행동하는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그녀는 이런 새초롬한 성격이었으니.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시안이 얘기했다.

그런 말을 하는 시안을 레이나가 빤히 바라보았다.

“왜?”

“아니, 그냥.”

레이나가 옆머리를 둥글게 꼬며 시선을 돌렸다.

시안과 만난 것은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도저히 소문의 망나니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토벌 중에도 막 나가는 모습은 전혀 없었지.’

오히려 솔선하여 위험한 곳에 들어가는 모습은 여러 번 있었다.

자신이 납치되었을 때도 그렇다.

시안과 이안.

바깥의 도움을 기다리며 늑장을 부릴 수도 있었는데도, 단둘이서 곧바로 쫓아와 주었다.

정말로 저 노인의 말처럼 시안의 소문은 전부 오해인 것일까?

‘글쎄, 모르겠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안이 소문 그대로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까지는 잘 알겠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내막까지는 전혀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이제 시안에게 들이대기는 포기했으니까.

“그런데 어쩔 거야? 교외수업은 아직 며칠 남았는데 계속 들어갈 거야?”

“아, 그거 말인데…….”

시안이 얘기했다.

자신은 이 길로 본가에 가보려고 한다고.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때문에 이곳에 더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잘 생각했네. 당연히 가봐야지. 부모님도 걱정하실 텐데.”

“부모님이라…….”

시안이 얘기했다.

말끝을 흐리는 것이 무언가의 사정이 있음을 짐작게 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염노.”

시안이 염노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본가로 돌아가죠.”

“예. 모시겠습니다.”

시안이 일행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염노가 열어준 마차에 올라탔다.

베리엄이 실린, 정화교단에서 빌려온 마차였다.

떠나가는 마차를 남은 일행들이 배웅했다.

“레이나.”

“왜?”

“너 시안한테 쌀쌀해진 것 같다?”

이안의 질문에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높으신 귀족이니까 한번 꼬셔볼까 했었지. 근데 포기했어.”

“왜? 보니까 소문이랑은 전혀 딴판이고 괜찮던데.”

왜냐고?

이유야 간단했다.

“같이 있으면 위험할 거 같으니까.”

오늘 같은 일은 애교로 생각될 정도로.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망나니라는 소문 정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그런 냄새가 난다고.

“그래? 뭐 때문에?”

“여자의 감이야.”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여자의 감이라니, 그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는 이유였다.

새초롬하게 대답한 레이나는 이 이상은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위험하다라…….’

이안이 그녀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보았다.

확실히 시안에게는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단순히 후작가의 아들이라는 것만이 아닌 무언가가.

이런 녀석한테서 어째서 그런 망나니 소문이 퍼져 나왔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녀석의 실력은 과연 어디까진가.

그때 탑에서 두 개의 흔적을 찾았을 때, 어떻게 레이나와 범인의 위치를 바로 구분할 수 있었는가.

‘위험해 보이긴 하네.’

이안이 피식 웃었다.

레이나의 말에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수상함밖에 없긴 했다.

대체 정체가 뭔지.

그가 다시 정면을 쳐다보았을 때, 시안을 태운 마차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 * *

유적을 나온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유설은 현장에 남았다.

이미 용병들도 모두 떠나가고 사건을 조사하는 정화교단의 사제들만이 남아 있는 장소.

‘이건…….’

위쪽을 모두 살핀 후 그녀는 탑의 지하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도중에 엉망진창으로 무너진 통로를 발견했다.

용케 사람 하나 통과할 구멍만 남아 있는.

‘구울이 파괴한 게 아냐. 검으로 자른 흔적……. 시안이 직접 부순 건가?’

그녀는 제법 정확하게 당시 상황을 추측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통로를 부순 결단.

어째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이런 상황에서는 그와 똑같이 판단했을 거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다.

‘아까 봤던 그 흔적도 범상치 않았지.’

아까 봤던 흔적이란 탑의 정문을 부쉈던 천뢰의 흔적이었다.

그걸 봤을 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검 한 자루로 그런 일격이 가능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이윽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하 호수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녀가 가장 먼저 느낀 건.

“……!”

감탄도 뭣도 아니었다.

당황이었다.

‘이 기운은…….’

그녀가 차분히 호수를 살폈다.

그곳에 남은 전투의 흔적. 그리고 기운의 잔향.

그리고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느낀 ‘이 기운’은 시안이 아니라 구울을 조종한 범인 측의 기운이었다.

―…….

“아…… 맘대로 나오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녀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 혼자뿐이었다.

―…….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들키면 큰일 나는 거 잘 알잖아.”

그녀가 작게 한숨을 쉬며 들려오는 사념을 달래었다.

그녀가 가문에 숨기고 있는 비밀.

마나 절맥증을 가지고 태어나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린 날의 그녀를 구해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유일한 벗이자 스승인 존재.

[겨울의 뱀이 입술을 삐죽입니다.]

[재수 없는 물비린내가 난다며 질색합니다.]

겨울의 뱀 프시케.

그녀의 존재는 절대 비밀이었다.

안 그래도 가문의 장로들은 자신을 쫓아내려고 벼르고 있다.

거기다 대고 약점을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 마나가 아닌 전혀 다른 기운이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다 나았다고 얘기한 마나 절맥증이 사실 전혀 낫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장로들이 어떻게 물어뜯을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겨울의 뱀이 활짝 웃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적한 곳에서 둘이 살아가면 되니 신경 쓰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들키지 않게 신경 좀 써줘…….”

그 무신경한 사념에, 유설이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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