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31화
“허억…… 허억…….”
이안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벽을 따라 둥글게 나 있는 나선형의 계단.
그곳에 빽빽하게 자리해 있는 구울들을 하나하나 처리해가며.
“기긱―!”
“큭!”
콰과광!
아까 시안과 함께했던 것과 같이, 3발의 불의 구체로 구울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다.
그러나 이곳에 마무리를 해줄 시안은 없었다.
성수를 묻힌 단검으로 스스로 마무리를 하며 이안이 놈들을 처리했다.
“개많네 진짜!”
그러나 그 숫자엔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의 구체로 가슴을 뚫고 마석에 단검을 찍고.
거의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한두 마리씩 처리하고 있는 듯했다.
“이걸 안 잡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물리적으로 계단을 막고 있었으니까.
휘익!
잠시 숨을 고르던 사이 구울이 손톱을 세우며 할퀴어왔다.
이안이 고개 숙여 그걸 피하고는 구울을 잡아 그대로 뒤로 넘겼다.
제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넘겨진 구울이, 아래쪽에서 올라오던 구울과 함께 떨어져 내렸다.
“하아…… 하아…….”
그리고 다시 올랐다.
슬슬 발이 무거워진다.
아무리 매일같이 단련에 힘쓰는 에버웨일의 학생이라곤 하지만 서서히 한계가 보여 왔다.
그러던 중 마침내.
“이안!”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곳의 한 방에서 이안은 묶여 있는 레이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창 튀어나온 벽돌 조각에 몸을 비비며 어떻게든 사슬을 끊으려 애쓰던 중이었다.
“레이나! 몸은!”
“괜찮아! 너 혼자 왔어?”
“나랑 시안이랑. 걘 지하에 범인 잡으러 갔어.”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며 이안이 레이나를 묶은 사슬을 끌러냈다.
“후우…….”
“너 괜찮아?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체력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야.”
“마력은?”
“괜찮…… 아니, 조금 빡세. 슬슬 바닥이야.”
사슬이 풀리고 레이나가 뻐근해진 손목과 발목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내려가자. 내가 앞장설게.”
“응.”
두 사람이 당당히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엔.
“그으으…….”
“기기…….”
아까보다도 더욱 가득한 구울들이 보였다.
레이나가 발을 멈추고 이안이 질색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
레이나가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 뭐야?”
“너 성수 있지? 한 병만 줘봐.”
이안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그래?”
암만 기다려도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자 레이나가 의아한 얼굴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있긴 있는데…….”
이안이 성수를 꺼냈다. 아직 남아 있긴 했다.
그런데 고작 한 병뿐이었다.
“한 병밖에 안 남았어?”
“오전에 사냥할 때도 썼고…… 여기까지 오면서도 펑펑 써버려서…….”
“그걸 생각 없이 다 써버리면 어떻게! 갈 땐 어쩔 생각이었어!”
“아직 넉넉한 줄 알았지! 아니, 그보다 네 건? 너도 4병 정도는 남았을 거 아냐?”
“있겠냐?! 나 납치한 그 새끼가 다 깨부쉈지!”
파삭.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구울들이 기어코 꼭대기의 바닥을 밟았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구울들.
이안과 레이나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일단 이거라도 나눠 쓰자고.”
이안이 단검에 성수를 바르고, 또 따로 가지고 있던 다른 단검에도 발라 레이나에게 넘겨주었다.
레이나는 성수를 포함해 모든 무기를 빼앗긴 상태였으니까.
지팡이의 여유분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건 감수해야 한다.
지팡이가 없다고 마법을 쓰지 못하거나 하진 않으니.
“레이나.”
“왜.”
“살아서 몸 성히 보자.”
“불길하니까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시야를 가득 덮는 구울의 파도를 보며, 두 사람이 침을 꼴깍 삼켰다.
* * *
상천검(霜天劍), 천뢰(天雷).
수많은 검술에서 뽑아내 벼리고 벼린 내려치기의 정수.
섬이 빠르기에 중점을 두었고 참이 고요함과 그 반경에 중점을 두었다면, 천뢰는 단 한 가지만을 고집했다.
파괴력.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끊겠단 의지.
때문에, 본래라면 이렇게 간단히 사용할 수는 없었다.
위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본디 검술이라 하면 그 어느 것이든 공(攻)과 수(守)가 일정 비율로 섞여 있게 마련이다.
70의 공과 30의 수를 가진 검술은 공격적이란 평을 받으며 30의 공과 70의 수를 가진 검술은 무척이나 단단하다 얘기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검술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자가 있는 검술이니까.
그럼에도, 시안은 천뢰에 한해서만은 일부러 모든 방어를 도외시했다.
무슨 철학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쪽이 더욱 활용도가 있어 보였다는 단순한 이유.
포기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육체의 한계 그 이상을 끌어오는 천뢰는 몸에 오는 부담이 결코 적지 않다.
자칫하면 팔 하나가 결딴나 그대로 실려 갈 만큼 과부하가 오는 기술.
그러나 지금의 시안은 최소한의 부담으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파워 건틀릿.
그 주술이 가져다주는 한계를 초월한 힘은 기술의 부담을 상당량 줄여주었다.
그가 주술의 ‘힘’ 조절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콰과과과광―!
천뢰가 혈기사에게 떨어져 내렸다.
시안의 검을 목도하고는 녀석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퀭하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우!”
녀석이 수검을 모두 들어 시안의 검을 막으려 했다.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수비 자세.
더불어 그 몸에서 핏빛 기운이 폭사되기 시작하며 녀석을 단단히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콰과과과광!
녀석이 취했어야 하는 행동은 수비가 아니라 회피였다.
베리엄이 남은 힘을 쥐어짜 벼려낸 수검도, 그리고 웅크린 태세로 들어간 핏빛 기운도.
그 무엇도 시안의 검을 막아내지 못했다.
천뢰(天雷).
하늘을 끊기 위한 의지가 담긴 초식.
고작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끄어어어어―!”
콰과과과과광!
폭음이 울려 퍼지며 시안의 검이 혈기사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내려오더니 녀석의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갈라내었다.
그 단면이,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와도 같은 구울의 신체 단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때.
“!”
반으로 갈라진 녀석의 몸통. 그중 하나가 튀어 오르더니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
그러나 딱 거기까지.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혈기사의 손은 시안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놈의 몸속에 있던 마석은 성수로 정화되기는커녕, 시안의 검에 아예 박살 나버렸으니까.
―도련…… 님…….
혈기사 프레델.
옛적에 몰락한 베리엄의 가문을 마지막까지 지켰던 충절의 기사.
그러나 그 오랜 방황도 여기까지.
풀썩.
그녀의 잔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시안이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승패는 갈렸으나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처음엔 피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처음 녀석이 천뢰를 목도했을 때.
크게 움찔거리던 그 모습은 분명히 공격을 피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자리에서 멈췄던 거지?
‘……자아가 없기 때문인가.’
베리엄이 조종하는 자아가 없는 언데드이기 때문인가?
몸에 기억된 것 때문에 반사적인 행동이 나왔으나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베리엄의 명령 탓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게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후우.”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며 검을 쓸어내었다.
이미 끝난 일이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그저 잿더미뿐.
녀석의 몸은 마석 한 조각조차 남기지 못하고 재로 돌아갔다.
그걸 일별하곤 시안이 뒤쪽 통로에 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광!
지하 통로가 마구잡이로 갈라지며 돌더미가 되어 우르르 쏟아졌다.
그가 지나온 길이, 통로가 완전히 틀어 막혔다.
“도망갈 길은 없어.”
자신의 퇴로를 막는 배수의 진.
하지만 동시에 베리엄의 퇴로를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에서 베리엄을 잡아야 했으니까.
‘가주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뽑아낼 건 뽑아내야 한다.’
모든 퇴로를 단단히 막아놓은 후, 그가 지하 깊숙한 곳으로 뛰었다.
* * *
“젠장! 젠장!”
탑의 가장 지하. 그곳에 존재하는 지하 호수의 한가운데서 베리엄이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프레델에게서 반응이 끊겼다.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뜻이었다.
“쓸모없는 년!”
그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여간 둔해빠지고 미련 곰탱이 같던 그 성격은 죽어서도 낫질 않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갑갑하기 그지없었지.
“입구 막아! 누가 들어오면 그 즉시 덮쳐서 죽여 버려!”
그가 금령을 울리며 명령했다.
호수 근처에 있는 구울들이 이곳의 입구로 향했다.
수십 구의 구울들이 대기를 하고 있음에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불안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시안 따위가 그렇게 강하다고?’
불안감의 원인은 시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실력 때문이었다.
프레델은 고작 학생 따위가 이길 수 있을 이가 아니었다.
생전에 하이나이트급의 경지였던,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스터에도 다다랐을 거라는 평을 받던 여성.
물론 이미 죽고 자신의 권속으로 되살렸기에 생전 실력의 일부밖에 내지 못하긴 했다.
하이나이트의 핵심인 검기(劍氣)도 사용하지 못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고위의 경지에 다다랐던 개체다.
그걸 고작 시안 따위가 처치했다고?
가능성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건방진 새끼……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자신과 있을 땐 실력을 숨겼다.
실력도 숨기고 스스로의 죽음도 숨기고.
결국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녀석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소리다.
으드득.
베리엄이 한껏 이를 갈더니, 이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니, 됐다.
실력을 숨기고 있든 아니든 자신이 할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놈을 처참하게 찢어발긴다.
이젠 사고사로 꾸미거나 할 이유도 없다. 베르페드 아그리드가 자신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 졌으니까.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처참하게 죽여서 경고의 의미로 삼는다.’
그렇게만 하면 뒷일은 다른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자신은 충분히 할 일을 하는 셈이다.
애초에 시안의 암살을 실패한 시점에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긴 했지만.
‘슬슬…….’
때를 가늠하곤 베리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프레델을 배치해 뒀던 위치와 당한 시간.
그걸 고려해 보면 슬슬 이곳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가 천천히 금령을 울리며 앞쪽의 입구를 응시했다.
당장에라도 공격할 태세를 취하면서.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음.
머리 위에서 들리는 폭음과 떨어지는 돌무더기에 베리엄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위쪽의 천장을 부수며 시안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앞이 아니라 위라고!?
“이 새…… 큭!”
돌과 함께 떨어진 시안이 베리엄의 손을 발로 찼다.
그 손에 들려 있던 금령이 저 멀리 떨어지더니 호숫가에 퐁당 잠겨 버렸다.
[해령궁주가 눈을 부릅뜹니다.]
[놈의 건방진 손목을 잘라내라며 고함을 지릅니다.]
‘나도 알아!’
베리엄이 거칠게 대답하고는 물을 끌어 올렸다.
지하 호수의 물이 순식간에 형태를 이루며 검의 모습을 이루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번엔 그의 핏물까지 섞여 들어갔다.
푸른 물줄기 속에 붉은 핏방울이 잉크처럼 번지더니 핏빛 검으로 변해갔다.
그걸 쥐고 단번에 반격하려던 베리엄.
그리고.
―번쩍!
그의 옆에 벼락이 내리쳤다.
“……어?”
그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방금 막 혈검을 만들어 들었던 그의 팔.
그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시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베리엄을 보면서도 그 눈은 북극의 빙하처럼 차가웠다.
그가 검으로 녀석의 어깨를 찍어내곤, 그대로 호수 바닥에 처박았다.
철썩!
얇은 호수의 표면에 붉은 핏줄기가 퍼져 나갔다.
“베리엄.”
“끄으으으으윽―!”
시안이 얘기했다.
“알고 있는 걸 전부 불어줘야겠다. 네놈은 누군지. 네놈 뒤에 있는 놈들은 누군지.”
움찔.
시안의 날카로운 눈빛 아래에서, 녀석이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