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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29화 (29/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9화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아들을 잃은 가주와 대면했을 때부터 이럴지도 모른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진짜 시안의 죽음.

그것이 사고가 아닌 사건일 가능성.

그럼에도 가주는 자신에게 그걸 얘기하지 않았다.

‘이 녀석의 생존도 몰랐을 리가 없어.’

그가 바닥에서 몸을 비트는 베리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사고 이후로 아그리드의 조사단이 현장을 철저하게 수색했다. 도련님의 시체를 포함해서, 타고 있던 모든 이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 시체 중에 한 구가 모자란다는 것. 그런 중대한 사실을 가주가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신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날 미끼로 대어를 낚을 생각이셨군.’

자신을 정말 말 그대로 미끼로 사용한 것이다.

만약 암살이 의심되는 상황.

분명히 죽였다고 생각한 타깃이 멀쩡히 살아 돌아다닌다면 범인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다시 죽일 궁리를 하지 않겠는가.

다만, 이것이 녀석의 단독범행이라면 곧바로 추적해서 잡아들이면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풀어놨다?

그 말은 가주에겐 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아주 줄줄이 끌어 올릴 생각이야.’

베리엄의 뒤에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존재.

가주는 베리엄 혼자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 뒤에 있는 존재가 아마 가주가 보고 있는 녀석일 테지.

자신과 베리엄은 단지 그들의 싸움에 편리하게 쓰이고 있을 뿐인 장기 말일 뿐이고.

‘모두 추측일 뿐이지만.’

증거라곤 없이 그저 정황뿐인 추측이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

다만 시안은 잘 알고 있었다.

최악의 가능성이란 것은 매우 높은 확률로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방금 그 비명은 뭐야!”

“무슨 일이야! 구울 들어왔어!?”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베리엄의 비명 소리에 근처에 있던 용병들의 시선이 이쪽에 쏠렸다.

개중엔 레이나와 이안도 있었다.

드론드는 반대편에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는 중이라 이 자리엔 없었다.

“시안?”

“너 뭐 해!? 걔는 누구야?”

시선이 쏠리자 베리엄이 뭐라 얘기하려 입을 열었다.

그걸 가만 놔둘 시안이 아니다. 그가 조금 더 바짝 검 끝을 가져다 대었다.

녀석의 목에 검이 파고들며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큭……!”

닥치라는 의도가 잘 전해졌는지 베리엄이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시안이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주위에 얘기했다.

“어쩌면 이 구울 소동을 일으켰을지도 모르는 놈입니다.”

“뭐? 무슨 소리야?”

“이 소동을 일으켜?”

당연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이 돌아왔다.

“방금 특이한 구울과 싸우다 누군가의 마법으로 놓쳤습니다. 그 마법을 쓴 녀석이 이 녀석이구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용병들 대부분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안과 레이나, 그리고 예의 특이한 구울에게서 죽을 뻔했던 용병들은 시안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 시안의 검을 막았던 수막을 목격했으니까.

그들이 서로 눈짓을 하고는 베리엄을 포위하듯 둘러섰다.

‘젠장!’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베리엄이 욕지기를 삼켰다.

멀찍이서 아직 반신반의하는 용병들을 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둘러싼 인원들을 돌파하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눈앞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시안을 따돌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이 새끼가 그 시안이라고? X신같이 여자나 밝히던 양아치 새끼가 이놈이라고?’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목을 파고든 차가운 칼날은 의심할 여지 없는 현실이었다.

그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이 시안이라는 사실 역시.

그가 최선을 다해 눈을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순간적으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유적 입구에서 인파 속에 섞여 몰래 시안을 감시하고 있을 때, 시안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던 여자다.

아마 에버웨일의 학생이겠지.

아까 불리던 이름이…… 레이나였던가?

‘저년이다.’

분명 시안이랑 찰싹 달라붙어 있었지. 아마 애인이라거나 뭐 그런 관계이리라.

그가 품속에 있는 방울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시, 시안.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변명은 나중에 듣지. 일단 저 구울들에 대해서나 얘기해 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파동이 울려 퍼진다.

이 자리의 누구도, 시안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베리엄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파동이 금령(禁鈴)의 음색에 실려 저 멀리 퍼져 나갔다.

그리고.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도 그냥 사냥하러 왔다가 여기 갇힌 거라고!”

“웃기지도…….”

쿠웅―!

유적이 진동했다.

“뭐야!”

“구울이 습격하기 시작했다!”

“거기! 뭔지 모르지만 빨리 해결 좀 봐봐!”

구울이 유적 주위를 빼곡히 둘러싸곤 공격을 시작했다.

바리케이드에 마구 부딪히며 입구를 뚫으려 몰려들었다.

“…….”

시안의 눈이 결단을 내렸다.

주위의 혼란에도 아랑곳 않고 그가 검을 휘둘렀다.

촤악!

“끄아아악!”

베리엄이 몸부림쳤다.

어깻죽지부터 가슴을 가로질러 옆구리까지.

피부가 갈라지며 피가 솟구쳤다.

“빨리 와, 프레델!!!”

그가 오열하듯 소리쳤다.

그 순간, 시안의 눈이 커지더니 몸을 옆으로 돌렸다.

콰과과광!

바로 옆에 있던, 베리엄이 쌓는 척만 했었던 바리케이드를 뚫고 구울 한 마리가 난입했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졌지만 고급스러운 복장을 입고 있는.

예의 특이한 구울, 혈기사 프레델이 맹수처럼 덮쳐오더니 돌려차기를 날렸다.

“큿!”

시안이 검을 들어 녀석의 발을 막았다.

그러곤, 막아낸 검째로 튕겨 날아갔다.

콰앙―!

“구, 구울이 들어왔다!”

혼란이 더더욱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베리엄이 눈을 빛냈다.

‘지금이다!’

그가 단숨에 몸을 일으켜 뛰었다.

그러곤 날아간 시안을 보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여자를 그대로 낚아챘다.

“꺄악!”

베리엄이 무너진 바리케이드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이 개 같은 새끼야! 여자를 되찾고 싶으면……!”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고 튀려던 베리엄.

그런데 말을 하다말고 그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묵색의 검 한 자루가, 맹렬히 회전하며 그에게 날아오고 있던 것이다.

“이런…… 커억!”

곧바로 도망가려 뒤로 돌았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배에 흑검이 박혔다.

한마디고 뭐고 할 때가 아니다.

피를 뚝뚝 흘리며 베리엄이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어느새 배에 박힌 검이 일렁이다 사라진 것을 그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이거 놔!”

“기절시켜!”

발버둥 치는 레이나를 혈기사 쪽으로 던졌다.

혈기사가 그녀의 명치에 주먹을 날렸다.

레이나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런 그녀를 혈기사가 어깨에 둘러멨다.

“젠장…… 젠자아아아앙!!”

베리엄의 욕 소리가 유적 안쪽까지 크게 울려 퍼졌다.

시안이 영체 상태로 자신의 손에 돌아온 흑검을 쥐었다.

‘우웅웅우우웅우…….’

라비가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 웅얼거렸다.

검이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간 것 때문에 어지간히 어지러웠던 모양.

한마디 해주고 싶긴 했지만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레이나!”

미친 듯이 돌아가는 상황에 이안이 반쯤 패닉에 빠졌다.

시안이 빠르게 주위 상황을 살폈다.

금방이라도 밀고 들어올 듯 공세를 펼치는 구울.

그걸 막고 있는 용병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리 쉽게 뚫릴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원래 그런 용도로 지어졌는지, 유적의 내부 구조가 수비에 유리한 구조였다.

“이안.”

“시, 시안! 레이나가……!”

“이안 벨체스터!”

시안이 이안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잡았다.

이안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녀석을 추적한다.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덮쳐야 돼.”

“어, 어어, 응! 아 잠깐, 드론드는? 걔도 데려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드론드는 발이 느려서 안 돼.”

덩치의 탓인지 몰라도 드론드는 발이 느렸다. 어쩌면 지원형 마법사니까 그쪽의 단련은 별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한시 빨리 쫓아야 하는 지금 상황엔 맞지 않았다.

“따라와. 너랑 나면 충분해.”

“어, 어 응. 알았어!”

시안이 이안과 함께 유적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이곳에 남은 용병들이나 드론드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레이나 쪽이 우선이었다.

그의 눈이 바닥을 살폈다.

“가자.”

“응.”

그곳에 뚝뚝 떨어져 있는 핏자국을 확인하곤, 두 사람이 땅을 박찼다.

* * *

“큭…… 크윽…….”

배에 구멍이 난 채로 베리엄이 도착한 곳은 근처에 있던 탑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미리 봐두었던 장소.

높은 탑 형태로 되어 있는 유적이었다.

그 1층에 있는 방에 베리엄과 혈기사, 그리고 기절한 레이나가 도착했다.

“젠장…… 빨리 치료해야…….”

그가 벽에 등을 기대며 철푸덕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물병 하나를 꺼내 몸에 부었다.

손바닥,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난 상처, 마지막으로 배에 관통상.

하나하나는 참을 만한 부상이었지만 3개나 되다 보니 쉽게 볼만한 게 아니었다.

거기에 여기까지 도주하며 흘린 피도 있었고.

“후우…….”

몸에 부은 물이 상처 부위로 스며든다.

아직 전혀 낫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으로 응급처치 정도는 되었다.

이제 지하에 있는 그곳으로 향하기만 하면…….

―슈욱!

그때, 그를 향해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베리엄이 눈을 크게 뜨고는 다급히 상체를 옆으로 피했다.

날아온 것의 정체는 투척용의 비도였다.

“이년이…….”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레이나가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기습이 실패했음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품에 손을 넣어 다음 한 자루를 꺼내었다.

그에 비해 베리엄이 한 일은, 가볍게 턱짓을 하는 것뿐이었다.

퍽!

“아악!”

혈기사가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챙그랑!

그녀의 품에서 비도 몇 자루가 더 떨어져 내렸다.

혈기사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그녀의 몸을 뒤지더니 모든 무장을 걷어내었다.

차차차차창.

비도에 쇠구슬에 짧은 소검에 밧줄에. 무기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베리엄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가는 몸 어디에 저렇게 가지고 다녔던 건지.

“놔! 이거 놓으라고!”

“잘 묶어놔.”

레이나가 발버둥 치며 몇 번이나 발길질을 날렸으나 혈기사에겐 일절 소용없었다.

혈기사가 사슬을 꺼내와 레이나의 몸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우릴 공격하는 이유가 뭐야! 에버웨일을 노리는 테러리스트야?!”

“…….”

악다구니를 쓰는 그녀를 베리엄이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곤 쯧, 혀를 차며 얘기했다.

“에버웨일이고 뭐고 관계없어. 내가 노리는 건 시안 그 새끼거든.”

“뭐……?”

“네가 이 꼴을 당하는 건 네 애인 때문이라고. 그러게 사람은 가려서 사귀었어야지.”

“대체 뭐 때문에…… 꺄악!”

물을 전부 들이부은 베리엄이 빈 물병을 그녀에게 집어 던졌다.

별것 아닌 화풀이였다.

그러곤 그가 품속에서 방울을 꺼내 울렸다.

“그으으…….”

“그그…….”

그러자 대기 중이었던 구울들이 모여들었다.

레이나가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녀를 일별하고는 베리엄이 구울들에게 지시했다.

“이년 데리고 꼭대기로 가. 도망 못 치게 잘 감시해라. 그리고 쳐들어오는 놈이 있으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

구울 중 한 마리가 레이나를 둘러메었다.

그녀가 발버둥을 쳤으나 이미 사슬에 묶여 손도 발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프레델, 넌 날 따라와. 지하로 간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상처의 회복과 병력의 보충.

그걸 위해선 지하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은 다른 게 아니었다.

‘시안 그 새끼, 이곳으로 제대로 오고 있겠지?’

최악은 바로 시안이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 것.

녀석이 여자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 가문에 틀어박히는 것이 그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다.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가 아는 시안은 남을 버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래서 애인을 데려온 거긴 한데…….’

남자였다면 무조건 버릴 테지만 여자라면, 그것도 애인이라면 되찾으러 올지도 모른다.

그것에 건 도박이었다.

‘어쩔 수 없어. 어느 쪽이든 상처 치료가 먼저다.’

별수 없는 선택이다.

이렇게 큰 상처가 난 상태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지금은 상처를 치료하며 녀석이 쫓아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쿠우웅!

지하에 깊숙이 박혀 있던 베리엄이 지상 쪽의 흔들림을 느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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