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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28화 (2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8화

‘친숙한 기운?’

그게 뭐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념이었다. 라비가 이 물의 막에서 어떤 기운을 느꼈다는 것인지.

그동안 마나를 흡수할 때도 밤의 기운을 받아들일 때도 이런 사념은 나오지 않았었는데.

그렇다면 마나도 밤의 기운도 아닌 다른 기운이란 뜻이다.

대체 그게 뭘 말하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으―”

아니, 이걸 살피는 것은 일단 나중이다.

지금은 눈앞의 구울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휘익-

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그극!”

그 순간, 엎어져 있던 구울이 시안의 종아리를 강하게 차왔다.

퍽!

시안이 눈이 찌푸렸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올라오는 고통에 자세가 순간 흐트러지고 말았다.

타탓!

그 틈을 타 놈이 강하게 땅을 차더니 그대로 내빼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녀석의 등을 보며 시안이 혀를 찼다.

‘구울은 생전의 실력에 1/10도 채 못 낸다고 하던데.’

그런데도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눈이 돌아가 입을 벌리고 달려들 때는 그냥 까다로운 마물이라는 느낌뿐이었는데.

이렇게 간혹 나오는 범상치 않은 움직임이 영 마음에 걸렸다.

“시안! 괜찮아?”

“시, 시안!”

일행들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용병들도.

“아이고, 고맙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혹시 에버웨일의 학생들…… 이신가요?”

용병들은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시안이 그들을 짧게 훑어보았다.

상처는 꽤 많았지만 다행히 중상은 없어 보인다.

“예. 교외수업으로 왔습니다.”

“역시!”

시안의 말에 용병들 사이에서 감탄이 오고 갔다.

에버웨일 아카데미는 대륙에서도 유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학교다.

설사 아직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기사들과 다름없는 실력을 가졌다는 인식.

용병들의 시선에 다른 일행들이 볼을 긁적였다.

이런 종류의 시선에 영 익숙지 않은 모습.

시안이 작게 호흡을 골랐다.

흐뭇하고 풋풋한 광경이긴 했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아까 그 소리는 뭐죠?”

“그 소리요? 아, 제가 놈한테 물릴 뻔해서…….”

“아뇨, 비명 소리 전에.”

비명 소리 전에 들렸던 굉음.

그제야 그것을 떠올린 용병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희도 그 소리 때문에 보러온 참입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이제 보니 용병들도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시안이 그들을 둘러보고는, 이윽고 앞장서서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시안, 어디 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불길한 예감.

시안이 뚜렷한 목적지를 가지고 똑바로 걸어갔다.

그 뒤를 일행과 용병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했다.

―젠장! 이게 갑자기 왜 무너져!

―올 때만 해도 튼튼했잖아!

―아니 여기저기 부서져 있긴 했었지…….

―정화교단에서 준 지도에는 튼튼한 다리라고 적혀 있다고!

이미 용병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무너진 다리 앞에서.

“이, 이거…….”

“설마 다리가 무너진 거였어?”

“진짜로!?”

당황하는 일행과 용병들.

시안이 눈을 찡그리며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다른 길은…… 있긴 있군.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 길이 없는 건 아니야.’

불행 중 다행이다. 유적에서 이어지는 우회로가 있긴 했다.

거리상 3배가량 차이가 나긴 하지만 아예 갇힌 것이 아니란 것만 해도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딱 거기까지였다.

“어? 저게 뭐야?”

“뭐가?”

“저기 저거…….”

용병 하나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그곳을 보았다.

마치 파도처럼,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건.

“구, 구울이다!”

“구울 떼다!”

물경 수백에 달하는 구울들의 무리.

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마치 유적 전체에 퍼진 모든 구울이 모이는 것처럼, 셀 수 없이 많은 구울이 이곳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

“대피! 유적 쪽으로 대피하세요!”

직후, 시안이 목소리에 강하게 마나를 실어 소리쳤다.

* * *

“으아아아악!”

“뭐가 저렇게 많아!”

“미친! 다리도 끊겼는데 어디로 가!”

패닉에 빠지기 직전.

“대피! 유적 쪽으로 대피하세요!”

그들의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또렷이 틀어박혔다.

마치 뇌리를 강타하는 듯한 소리에 용병들이 앞다퉈 유적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같이 달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말도 안 돼……. 내 수막이 뚫렸다고?’

남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는 시안 아그리드는 절대 그 정도의 강자가 아닌데?

[해령궁주가 길길이 날뜁니다.]

[그 건방진 꼬맹이를 잡아다 피를 죄 뽑아내라며 소리칩니다.]

“큭…….”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이 자식은 또 왜 이렇게 반응이 격렬하지?

시안이 수막을 깬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수막이 깨진 일 자체는 딱히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다른 때는 이런 식으로 반응하진 않았는데.

‘조금만 기다려!’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지만 걱정 말라. 그때는 곧 찾아올 테니.

그가 간신히 사념을 달랬다.

다행히 두통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사념의 주인이 분노를 가라앉혔다는 뜻이었다.

‘일단 유적에 들어가서 틈을 보자.’

그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유적 안으로 들어왔다.

구울들은 아직 멀다.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유적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남자도 그 사이에서 적당히 돌을 나르며 바리케이드를 쌓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

남자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시안이었다.

시안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의문과 의심이 가득 뒤섞인 눈으로.

‘언제부터 내 앞에……. 아니지, 지금은 일단.’

순간 눈이 흔들린 남자였으나, 이내 정신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시안과 마주쳤을 때를 위해 준비한 말이 있었으니까.

“설마…… 너 시안이야? 살아 있었구나!?”

그의 얼굴이 감격으로 차오르고 목소리는 바르르 떨려왔다.

자신이 봐도 훌륭한 연기였다.

“베리엄.”

남자는, 시안이 알고 있는 이였다.

시안의 표정과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만지면 얼어붙을 것만 같이.

“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베리엄 폴튼.

도련님, 진짜 시안이 사망했던 그 마차 여행에서.

시안과 함께 추락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 * *

“그거 이리로 가지고 와!”

“이쪽은 안 막아도 돼!?”

“일단 나중에!”

유적 내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아까 보았던 수백의 구울 무리.

녀석들이 혹여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입구를 틀어막고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이쪽 길도 안 돼! 구울들이 가득해!”

“젠장! 역시 여기서 농성할 수밖에 없나?”

이곳의 인원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구울들을 돌파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낙오자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딱히 가족도 친지도, 하물며 군대와 같은 조직원들도 아니다.

남남에 불과한 일개 용병들.

그들로서는 도중에 진형이 붕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래도 이 정도 규모의 이상 사태면 바깥도 금방 눈치챌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입구에서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니다.

분명 누군가가 눈치채고 구조를 부를 터.

그때까지만 버티자며 용병들이 합심해서 보이는 입구를 전부 틀어막았다.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참이라 다들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시안은 누군가와 대면하고 있었다.

“설마…… 너 시안이야? 살아 있었구나!?”

“베리엄.”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몸은 물론 얼굴에도 있는 커다란 흉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흉터 속에 남아 있는 얼굴 형태, 그리고 도련님을 아는 듯한 태도.

‘살아 있었구나’라는 멘트.

“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누군지 알았다. 시안을 태우고 절벽에서 떨어졌던 마차.

그곳에 같이 타고 있던 시안의 옛 친구였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놈도 살았는데 죽여도 안 죽을 것 같던 네가 그렇게 갈 리가 없지!”

녀석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이보다 반가울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사고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디 해안가더라고. 아무래도 아래쪽 강에 휩쓸려 밀려왔었나 봐.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구해줘서 간신히 살았어.”

베리엄이 그렇게 얘기하며 소매를 걷어 팔에 난 화상 흉터를 보여주었다.

얼굴과 보이는 피부뿐만 아니라 옷에 가려진 부분에도 흉터가 가득한 모양이었다.

“신성마법이 대단하긴 하더라. 가까이 있는 정화교단에서 처치를 받았는데 후유증도 없이 다 치료해 주더라고. 흉터는 어쩔 수 없이 남아버렸지만.”

“그랬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거동이 가능해지고 다른 애들도 수소문해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 죽은 것 같더라. 큰맘 먹고 너네 집에도 가봤는데 문전박대당했고.”

“……네가 살아 있는지도 몰랐다. 아마 아버지가 정보를 통제한 것 같군.”

“그래? 하긴, 니네 아빠는 네가 우리랑 어울리는 거 못마땅해한다고 그랬었지. 근데 말투가 그게 뭐냐? 정보 통제? 너답지 않은데.”

베리엄이 낄낄 웃으며 얘기했다.

시안이 간단히 덧붙였다.

“사고 때문에 기억이 좀 오락가락해서.”

“아하.”

마차가 통째로 천애절벽으로 추락한 대사고다.

이 정도 후유증은 충분히 있을 법했다.

“일단 움직이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까.”

“알았어.”

그리 얘기하며 등을 돌리는 시안을 보곤 베리엄이 웃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시안. 생각보다 더 경계심이 없었다.

심지어 어디 내버렸는지 무기도 안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거 일이 쉬워지겠군.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금령(禁鈴)을 빌려올 필요도 없었겠어.’

그가 자연스럽게 걸었다. 시안의 뒤를 향해서.

어느새 그의 손엔 푸른 물로 벼려낸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으면 얌전히 집에나 틀어박혀 있지 그랬냐.’

그가 시안의 뒷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힘 한 점 들어가 있지 않은 듯이 가벼운, 그러나 단단한 기초가 담겨 있는 암살검.

그리고 피가 솟구쳤다.

“어?”

시안의 목이 아닌, 베리엄의 손바닥에서.

수검(水劍)을 든 그의 손바닥을 어느새 나타난 흑검이 꿰뚫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았어, 라비.”

시안이 중얼거렸다.

그가 베리엄을 찾아 그 앞을 막아섰던 것.

모두 라비 덕분이었다.

유적 입구에서의 위화감. 그것과 완전히 동일한 반응을 이 남자에게서 보였던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유적 내에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시안이 그 손바닥을 밟으며 검을 비틀어 뽑았다.

그의 검 끝이 베리엄의 목을 파고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정말이었을 줄은.”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도련님이 타고 가던 마차가 마물에 쫓기다 추락한 사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혹시, 사고가 아닌 사건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근거가 없었기에 확신하지는 못했다.

“너냐?”

그런데 지금, 그 근거가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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