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7화
“이안! 옆쪽에 한 놈 추가!”
“어!”
시안의 말에 이안이 재빨리 옆으로 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서 나타나는 구울이 있었다.
달려오는 구울을 향해 이안이 아낌없이 불 세례를 퍼부었다.
콰콰콰콰광!
쏟아지는 아케인 플레어에 구울의 가슴팍이 걸레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어김없이 레이나의 화살이 틀어박혔다.
두텁게 마력에 휩싸인 화살은 아케인 플레어의 후폭풍도 강제로 뚫어내고 목표한 곳에 꽂혀 들어갔다.
“마석 줍고, 5분 후에 다시 출발하지.”
한 무리의 구울을 모두 쓸어버리고 일행이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특히 마력은 여유가 있을 때 틈틈이 보충해 주어야 한다.
시안 역시 눈은 계속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마나를 보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휴식 후, 그들이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 다른 구울 무리를 발견했다.
이번엔 6마리.
“지금까지랑 똑같이 간다. 드론드, 불러와 줘.”
“으, 응!”
드론드가 간단히 마력을 모아 주먹만 한 마력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구울 놈들을 향해 던졌다.
팍.
적중당한 구울이 두리번거렸다.
애초에 특별한 술식 없이 마력을 그러모았을 뿐이고, 그 마력조차 최소한만 담았기에 위력은 약했다.
하지만 구울들의 주의를 끌기엔 충분했다.
“그어어!”
구울들이 달려왔다.
녀석들을 향해 후위진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콰과과광!
땅이 패고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놈들은 그 특유의 단단한 피부 덕에 스치는 정도로는 상처 하나 없었다.
두어 마리 정도가 정통으로 가격당해 엎어졌지만 나머지는 흙먼지를 뚫고 이쪽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시안이 일할 시간이다.
‘두 놈은 엎어졌고 한 놈은 빌빌대고 있고. 멀쩡한 놈은 셋인가.’
일행보다 살짝 더 앞에 나와 있던 시안에게 세 마리의 구울이 모두 몰려들었다.
뒤쪽부터 친다는 식의 발상은 할 줄 모르는 녀석들이었으니까.
“끄어!”
기다랗고 더러운 손톱을 휘두르는 구울들.
시안이 검을 휘둘러 놈들의 손을 모두 쳐냈다.
카가가가강!
녀석들의 팔이 모조리 박살 났다.
무기라곤 손톱이랑 이빨뿐인 구울들. 그중 하나를 잃은 녀석들이 남은 이빨을 내세우며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콰콰쾅!
그사이 후열이 빠르게 구울들을 꿰뚫었다.
남은 건 한 마리.
다리가 부서져 뒤쪽에서 빌빌대던 녀석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푹.
‘이 정도 전력이면 그레이트 힐 때보다 오히려 편하군.’
시안이 검을 뽑고 마석을 주웠다.
분명 구울은 고블린보다 강한 몬스터였음에도 그때보다 더욱 수월했다.
이안과 레이나, 드론드의 실력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
에버웨일의 1학년 중에서도 9위, 13위, 21위를 하는 아이들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학생이니 아이니 하는 실력은 뛰어 넘었으니까.
“너무 편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네.”
이안이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그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더니 지금은 많이 편해진 모양이었다.
그야 조우하는 구울 무리들을 죄다 손쉽게 토벌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구울들의 숫자가 상당해서 전투가 길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도 문젠 없었다.
머릿수만 많다고 해서 놈들이 시안이라는 벽을 뚫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이안. 마력 상태는 어떻지?”
“문제없어. 그나저나 결국 네가 맞았네.”
이안이 슬쩍 시안을 바라보았다.
―전위는 오랫동안 합을 맞춘 사람들도 자칫하면 손이 꼬이는 곳이야. 차라리 혼자 있는 쪽이 나아.
혼자서 전위를 맡겠다는 말에 우려를 표하자 녀석이 했던 얘기다.
맞는 말이었다.
심지어 시안을 제외한 세 명은 평소 전위엔 서본 적도 없는 이들.
1:1 결투를 많이 해온 만큼 어느 정도는 하겠지만 전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까진 없었다.
그런 이들과 설 바엔 혼자가 편하다는 게 시안의 설명이었다.
애초에 후위의 화력이 강해지면 전위도 더 편해지고.
“다 쉬었으면 출발하지.”
잠깐의 휴식을 거친 후 네 사람이 다시금 유적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몇 무리의 강시들과 더 마주쳤지만 모두 문제는 없었다.
말도 안 되게 100마리씩 뭉쳐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나와 일행들의 발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도착했다.”
이윽고 첫 목표지였던 장소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그 앞, 커다란 건물로 향하는 다리에.
“오오…….”
“꽤, 꽤 크네.”
“여기저기 부서지긴 했지만 웅장한데?”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은 목조와 석재가 적절히 섞여 있는 건물들이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썩어 있긴 했지만 남아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웅장한 건물이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일행의 눈앞에 있는, 유적으로 향하는 다리조차 멋들어진 문양과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보다 빨리 온 사람들이 있나 봐.”
“그래?”
일행이 유적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시안은 인근의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쳤던 흔적이 있다.
아마 먼저 온 용병들이겠지.
“뭐 애초에 우리들만 있는 던전도 아니니까.”
“일단 들어가 보자.”
레이나의 중얼거림에 이안이 얘기했다.
사람이 있다고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사냥감을 나눠야되겠지만 대신 비교적 안전하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래, 가자.”
팀의 리더인 시안의 지시가 떨어지고, 일행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 * *
“에이~ 별거 없네~”
대략 두 시간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
레이나가 도서관 안쪽 구석에 털썩 주저앉고서 다리를 흔들거렸다.
안쪽에 구울이 별로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눈을 빛내며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나 별 소득이 없던 모양이다.
덕분에 그녀의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와 있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거라면 옛날 옛적에 털렸겠지.”
“하긴 그렇지?”
시안의 한마디에 그녀가 대번에 표정을 풀며 얘기했다.
그 빠른 표변에 이안이 혀를 내둘렀다.
“뭘 발견할 생각보다는 그냥 마굴의 공기를 기억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설령 무언가가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걸 자신들이 발견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당장 이 유적만 해도 2시간 동안 마주친 용병들이 스물이 넘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데 보물 비스름한 거라도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아아~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는데.”
“나, 나도…….”
레이나의 한탄에 드론드도 동조했다.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도 고대의 유적이라는 것에 나름 기대를 걸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어쩔 수 없다. 본래 현실이란 건 이 모양이니까.
세상에 남아 있는 유적은 많지만 실제로 보물이 남아 있는 유적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이런 텅 빈 유적들뿐.
‘…….’
그사이 시안은 꾸준히 운공을 하고 있었다.
밤이 아니었기에 밤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은 무리였지만 평범하게 마나를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마나는 정령 각인을 통해 밤의 기운으로 치환되었다.
‘우웅!’
덕분에 라비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시안이 살짝 웃었다.
의기양양하게 으쓱이는 녀석의 모습이 자연스레 상상이 되며 그의 기분도 같이 누그러졌다.
그때.
―콰과과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땅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마치 먼 곳에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뭐지!?”
“무슨 일이야?”
시안이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취했다.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
―아아아아악!
직후,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히 다급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이건 피를 동반한 소리가 분명했다.
세 사람이 시안을 바라보았다.
“…….”
그가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비명 소리의 음량과 울림으로 대략적인 거리를 파악해 보고, 방금의 굉음의 정체를 추측해 보고.
사람이 위험한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자였다면 시안도 망설임 없이 달려가 봤겠지.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일행들을 데리고 있고, 그 일행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자신에겐 있었으니.
단 10초.
열을 셀 동안 시안의 고민이 끝이 났다.
“가보자.”
끄덕.
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일행이 뛰었다.
철저하게 주변을 경계하면서.
그러던 중 시안의 눈이 가라앉았다.
다른 이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시안만은 알고 있었다.
굉음과 비명이 들린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
상황을 보러 가자고 결정한 것도 절반 이상은 이 방향 때문이었으니까.
이윽고 도착한 현장.
그곳에 희한하게 생긴 구울에게 곤욕을 치르고 있는 용병들이 보였다.
“저 녀석은…….”
녀석을 보며 이안이 신음을 삼켰다.
다른 구울들과 같은 맨몸뚱이에 더러운 이빨과 손톱뿐인 모습이 아니다.
다른 강시처럼 걸레짝 같은 복장이 아니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지긴 했지만 질기고 고급스러운 문양이 들어간 옷을 입고, 손톱 따위가 아닌 피처럼 붉은 흉흉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뭐, 뭐야 저 녀석은!”
“구울 맞아? 구울이 왜 칼질을 해?”
녀석을 보며 일행들이 당황했다.
검을 그냥 휘두르는 정도도 아니다. 몸놀림이 상당했다.
마치 구울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 무인인 것처럼, 놈의 검은 날카로웠고 몸은 날아다니다시피 하였으니.
따악!
그럼에도 중간중간 입을 쩌억 벌려 용병을 물어뜯으려고 시도하는 모습.
그것만은 영락없이 구울이었다.
“먼저 갈게. 엄호를.”
“응!”
“아, 알았어!”
당장에라도 물어뜯길 것만 같은 용병들을 향해 시안이 난입했다.
쿠웅!
순식간에 하늘에서 떨어지며, 시안의 검이 놈의 어깻죽지를 길게 베었다.
‘얕아.’
하지만 얕았다.
몸의 단단함조차 다른 구울들보다 아득히 위인 녀석이다.
“누, 누구야!”
“도와주러 왔구나!”
“살았어!”
시안의 등장에 용병들이 울먹거렸다.
그가 열일곱의 앳된 얼굴이란 것은 이 상황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끄그그그그!”
녀석이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쏘아 들어왔다. 입을 쩌억 벌리며 시안을 덮쳤다.
“큭!”
생각 이상의 속도에 시안이 다급히 검을 들었다.
날붙이가 가로막고 있음에도 아랑곳 않고 놈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까앙―!
녀석이 시안의 검을 물었다.
‘젠장.’
잘근잘근, 검을 씹어 부수겠다며 이를 잘근거리는 구울.
턱 힘이 어찌나 강한지 검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티팩트인 만큼 이빨 따위에 손상되거나 하진 않았지만…….
“시안!”
뒤늦게 뛰어온 이안이 지팡이를 그었다.
그러자 허공에 굵직한 불의 창이 생겨나더니 놈의 등판을 향해 쏘아졌다.
그런데.
파앙―!
기가 막힌 일이었다.
놈의 발이 깔끔한 반달을 그리며 뒤차기로 날아오는 창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의 검을 그대로 문 채로!
‘이 정신 나간 녀석이……!’
‘웅! 웅웅웅!’
이 상황에 라비만 울상으로 동동 발을 굴러댔다.
빨리 이 녀석 좀 어떻게 해달라며. 이러다 우리 집 다 부서지겠다며.
‘이 정도로 안 부서져.’
시안이 애써 녀석을 달래며 구울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그곳엔 이미 제2격을 쏘고 있는 레이나와 다른 일행들이 보였다.
얼타지 않고 빠릿하게 움직여서 좋다니까.
그가 작게 웃으며 몸속을 흐르는 주술 타투의 힘을 관조했다.
일순간,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
“끄기기기기기―!”
시안이 그대로 녀석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공중에 뜬 녀석의 발이 바둥거렸다. 그럼에도 검을 악문 입을 벌리지 않는 것이 정말로 지독한 녀석이었다.
“흡!”
들어 올린 구울을 시안이 그대로 휘둘렀다.
쏟아지는 불꽃과 마력화살들을 향해 직격으로.
콰과과과광!
“끄가가각―!”
순식간에 대여섯의 마법에 직격당하고 구울이 겨우 물고 있던 검을 놓았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며 녀석이 저 멀리 날아가 철푸덕 바닥을 굴렀다.
탓!
시안이 지체없이 먼지 속으로 쫓아갔다.
시간을 줄 생각은 없었다.
달려나간 시안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구울의 가슴에 검을 찔렀다.
그런데.
폭.
그 검 끝을, 작게 뭉쳐진 투명한 수막(水膜)이 막고 있었다.
‘…….’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이 강시의 능력인가?
이런 마법 같은 능력을 쓰는 구울이라고?
그런데, 수막의 정체를 채 깨닫기도 전에 그 일이 일어났다.
푹-
그의 검이 수막을 찢고 들어가며.
[친숙한 기운에 흑정령이 흥분합니다!]
‘우우-!’
‘라비?’
라비가, 수막에서 흐르는 정체 모를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