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5화
에버웨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시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휴식 공간도 존재한다.
잘 꾸며진 장미 정원도 있었고 아름다운 분수대가 있는 광장도 있다.
그리고 개중에는 소규모의 인원으로 티타임을 즐기기 위한 작은 테라스 같은 것도 존재했다.
“아. 머, 먼저 와 있었구나.”
테라스에 들어온 학생 둘이 두리번거리다, 이내 그곳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엔 이미 한 학생이 자리해 있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학생.
9위의 반지를 가진, 화염마탑의 메이지 이안 벨체스터였다.
“왔구나.”
“으, 응. 늦어서 미안.”
“미안.”
학생치곤 상당히 덩치가 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건넸고, 키가 작고 아담한 여자가 새침하게 얘기했다.
21위의 드론드 테일러.
13위의 레이나.
이안과 마찬가지로 반강제적으로 시안의 팀에 들어오게 된 두 사람이었다.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넨 이 제안을 왜 받은 거야?”
처음 나온 화제는, 왜 시안의 팀에 들어왔냐 하는 것이었다.
“왜냐니. 너처럼 대련했다가 졌으니까.”
레이나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하지만 이안이 물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졌다고 꼭 말을 들을 이유는 없잖아. 무슨 서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시안이 대련에서 이긴 후에 말을 걸었던 학생은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거절했다.
제안을 받은 것은 이 셋이 전부였다.
“그, 그게…… 얘기 들어보니까 팀이 되겠다는 애가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불쌍하기도 하고…….”
드론드가 얘기했다.
그 말에 이안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불쌍해? 그 녀석이? 너 걔 소문은 들어본 적이나 있어?”
“으, 응. 근데 그냥 소문이기도 하고…….”
목소리도 작고 말끝을 흐리는지라 정확한 의중을 알긴 어려웠다. 하지만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직접 보지 않았으니 소문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는 뜻이리라.
이안이 이번엔 레이나 쪽을 바라보았다.
“레이나 너는?”
그의 물음에 레이나가 도도하게 턱을 올리며 얘기했다.
“그냥.”
“그냥?”
“어차피 교외수업엔 갈 생각이었고, 마침 따로 팀도 구하기 전이었고. 굳이 말하자면 1위랑 같이 가면 좀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 받았어.”
“그랬군.”
결국 실력을 보고 제안을 받았다는 얘기.
탓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위험한 곳에 함께 들어가는 동료다.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것이 당연했다.
“걔가 안 좋은 소문이 있는 건 아는데 교외수업은 아카데미랑 정화교단이 협조해서 주관하는 거잖아? 뭐 큰일이라도 나겠어? 거기에 나도 따로 생각하는 게 있거든.”
“그래?”
그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따로 생각하는 거라니 무슨 얘기지?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책을 가지고 있단 소린가.
“그러는 너는?”
궁금증이 도지던 이안을 향해 레이나가 화살을 돌렸다.
그가 눈을 찌푸렸다.
“나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그가 고민에 빠졌다.
사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제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녀석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굳이 말하면 ‘신경이 쓰여서’란 말이 정답이리라.
‘나도 조금 있으면 하이메이지의 경진데.’
마법사의 경지는 크게 다섯으로 나뉜다.
견습마도사인 캐스터, 정식마도사인 메이지. 그 위로 하이메이지, 마스터, 하이마스터로.
하이마스터의 경지는 시대의 축복을 받은 극소수만이 올라가는 곳이니 실질적으로는 마스터까지 4단계라고 해도 좋으리라.
그중 이안은 하이메이지의 문턱을 붙잡고 있는 경지였다.
이 정도면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전장에 투입돼도 1인분은 할 수 있을 정도.
그런데도 졌다. 그렇게 손쉽게.
‘시안 아그리드…… 이미 하이나이트의 경지에 올라 있다는 건가?’
하이메이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검사의 경지는 하이나이트라 칭한다.
17살에 하이나이트.
이안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이 비록 하이메이지의 문턱이라곤 하나 그 문턱 하나 넘는 데 얼마나 오랜 기간이 필요할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 이미 그 문턱을 훌쩍 넘은 동갑이 있다니.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녀석의 진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보고 싶었다.
“내가 제일 늦었군.”
그때, 마침 생각 중이던 그 녀석이 나타났다.
이 인원을 그러모은 장본인, 시안 아그리드.
순간적으로 테이블에 긴장이 흘렀다.
그리고.
“차나 타 올게.”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직원에게 부탁하면 되는데 굳이 직접?
그리 생각했으나, 이내 적당히 납득했다.
아마 안 좋은 소문이 도는 시안과 가능하면 떨어져 있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시안이 그런 그녀를 힐긋 보고는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시간 맞춰 온 건데, 조금 일찍 올 걸 그랬나?”
“아, 아니야, 괜찮아.”
“지각한 것도 아니고 뭘.”
드론드가 손을 내젓고 이안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딱히 친해질 생각은 없어 보이는 어조였다.
뭐 상관없다.
시안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졌다.
곧 테이블 위에 교외수업의 신청서가 올라왔다.
“이것부터 쓰지.”
시안이 펜과 서류를 이안에게 넘겼다.
“이름만 쓰면 되냐?”
“학번도.”
사각사각.
그렇게 이름을 적고 있던 중.
“시안~ 여기 홍차. 페르논산 찻잎이 있길래 타 왔는데 괜찮지?”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비음이 짙게 섞인 목소리에 이안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괜찮아. 딱히 안 가려.”
“다행이다~”
이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와는 180도 다르게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시안에게 커피를 건네는 레이나가 있었다.
* * *
“이번에 갈 곳은 에버웨일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쿠르트 산이야.”
마차로 달려 반나절 거리.
정확히는 그 쿠르트 산에 있는 고대 유적이 목적지였다.
“나 가본 적 있어.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는데.”
시안의 말에 레이나가 맞장구를 쳤다.
고대의 유적이라고 해도 폐유적이다. 옛날 옛적에 탐사대가 휩쓸고 간.
보물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고 정화교단만이 그 땅의 정화를 위해 남아 있던 상황.
그곳에 구울이 다량 발생한 것이다.
“그 유적에 언제부턴가 구울이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야.”
“정말로? 웬일이래.”
“이유는 불명이다만, 뭐 위치가 위치니까.”
거인들의 무덤. 항시 땅에서 사기(死氣)가 올라오는 죽어버린 땅.
무슨 마물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의뢰인은 정화교단의 사제단. 쿠르트 산의 정화를 위해 작업을 하던 중 구울이 나타나 방해를 받은 모양이야. 그래서 본부나 용병 길드 등지에 협조 요청을 보냈다는군.”
“그리고 우리 학교에도 말이지?”
“그래.”
한두 마리 나타난 거라면 사제단의 전력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울의 발생 규모는 도저히 혼자서 해결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변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
에버웨일에 온 의뢰 말고도 용병 길드 쪽에도 의뢰가 들어가 용병들도 꽤 많이 참가한다고 한다.
“사제들도 큰일이겠다. 딱히 교단의 땅도 아니고 해결한다고 해봤자 근처 영주들이나 좋아할 텐데.”
“정화교단은 그런 물질적인 욕구는 별로 없는 곳이니까.”
“그건 그래.”
손뼉을 치며 활짝 웃는 레이나.
그런 그녀를 이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아니, 저 여자가 아까 그 여자가 맞긴 해? 그 까칠해 보이는 성격은 어디 갔어?
그렇게 쳐다보고 있자니.
째릿.
그녀로부터 몰래 찌릿거리는 시선이 돌아왔다.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구울은 보통 굼뜨고 느려서 간단한 마물이지. 이번 경우도 다르지 않을 거야. 다만 일반 구울보다 조금 단단하다는 정보가 있는 것 같으니 주의하고.”
한편으로 시안을 향해서도 이안은 혀를 내둘렀다.
녀석 역시 레이나 못지않게 징했다.
옆에서 저렇게 들이대고 있는데도 일절 반응 없이 브리핑을 하는 모습이라니…….
흔들리지 않는 팀장이라며 기뻐해야 하는 건지 뭔지.
“뭐, 뭔가 준비는 해놔야 하지 않을까?”
한편 이 자리에서 가장 시안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드론드가 더듬거리며 얘기했다.
그의 얘기에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내일이니까 오늘 밤에라도 대비할 수 있을 거야. 도착하고 나서도 조금은 시간이 날 테고. 기초적인 포지션이라도 정해놓고 가는 게 좋겠지.”
“알았어~”
“으, 응.”
하루 이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정도가 한계겠지.
시안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아치라는 소문 치고는 제법 착실하게 말하는 녀석이다.
그가 시안에게 물었다.
“포지션이라면 일단 전위 둘, 후위 둘이지? 아니면 전위 셋에 후위 하나나 정도? 그럼 각자 특기로 하는 마법이나 전투 스타일을 얘기해 보고…….”
“아니. 그건 이미 결정됐어.”
“응?”
시안의 얘기에 이안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아, 너는 우리 셋과 다 대련해 봤으니까 전투 스타일을 다 알고 있겠구나.”
그러나 곧 납득하는 모습.
시안은 이곳의 세 명과 모두 붙어보았으니 전투 스타일을 다 알고 있을 터.
미리 최적의 포지션을 짜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 처리 하난 확실하네.
“뭔데?”
“난 어디야? 전위? 후위?”
“나, 난 후위가 좋은데……. 그래도 전위로 가라고 하면 열심히 할게…….”
세 사람이 시안을 쳐다보았다.
호기심 짙은 세 명의 시선을 받으며 시안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다 후위야. 전위는 나 혼자. 이게 가장 효율적이다.”
* * *
인원만 채워지니 외부 임무의 신청은 수월하게 통과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일.
네 사람은 에버웨일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쿠르트 산의 폐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와…….”
이안이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드론드 역시 비슷한 반응.
한 번 와본 적이 있다고 하는 레이나 역시 놀라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겠지.
“사람 엄청 많네.”
“그, 그러게.”
일단 사람이 많았다.
유적 부지에서 구울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바깥쪽에 결계를 펴고 있는 정화교단의 사제들.
뿐만 아니라 용병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본디 용병은 일감이 있는 곳에 모이는 법. 이번 구울 퇴치를 위해 근방에서 모여든 용병들일 것이다.
거기에 어떻게 찾아왔는지 귀신같이 찾아와 식량이나 소모품 따위를 파는 행상인들까지 존재했다.
“수업은 이미 시작됐다. 임무에서 얼마나 활약하는가만 수업이 아니야. 들어가기 전, 어떻게 준비하냐 또한 수업이다.”
잠시 지도교관의 연설이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연설이랑 별다를 것은 없었다.
요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란 얘기.
연설을 들으며 시안이 주변을 살폈다.
‘의뢰인은 저쪽에 있군.’
용병들의 모습을 한 차례 살핀 후 의뢰를 주는 사제를 찾았다.
사제단이 묵고 있는 천막들 중 가장 안쪽의 천막. 그곳에 커다란 덩치의 기사에게 호위를 받는 사제가 보였다.
“그럼 출발해라. 무운을 빌지.”
그 말을 끝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안이 향한 곳은 우선 의뢰인이 있는 곳이었다.
일행을 이끌고 그가 가장 안쪽에 있는 사제를 찾아왔다.
“어? 에버웨일에서 오셨나요!”
“맞습니다.”
시안의 말에 사제가 활짝 웃으며 얘기했다.
“반가워요! 전 샤밀라라고 해요! 여기 사제단의 임시 리더를 맡고 있어요!”
커다란 성량으로 외치는 그녀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염노가 준 인명록에서 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샤밀라 드레이크.’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교단의 하이프리스트이자 차기 성녀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 중 하나.
정화교단의 성녀 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