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3화
피잉―
콜로세움 마법이 펼쳐졌다. 새로운 결투를 알리는 신호.
가뜩이나 줄리오의 등장으로 관심을 보이던 학생들이 흥미 깊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줄리오랑 상대는…… 응? 1학년이네?”
“1학년의 1위인 시안 아그리드. 그 아그리드 후작의 아들이래.”
“아…… 그러고 보니 이번 신입생 중엔 하이마스터의 자식이 둘이나 있다 그랬나.”
그 이름은 선배들 사이에서도 이미 퍼져 있었다.
산군(山君) 겐 아슬라의 딸 란 아슬라.
그리고 검왕(劍王)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아들 시안 아그리드.
홀로 전장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을 마스터라 한다면, 단 한 명의 존재로 전쟁 자체를 판가름하는 존재를 하이마스터라 하였다.
대륙에 단 열 명뿐인 초월자들.
“검왕의 아들이면 세겠지?”
“말이라고 하냐. 순위도 1위잖아.”
“그래도 줄리오도 2학년 중엔 6번짼데. 1학년이랑 2학년은 차이가 좀 있지 않나?”
“겨우 1년 차인데 뭘.”
“에버웨일에서 1년이면 크지.”
대련광장에서 죽치고 앉아 있는 싸움광들답게 그들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누가 더 강한가.
그들이 떠들썩하게 얘기를 나누며 줄리오와 시안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그 시선의 파도 속에서.
“쯧.”
줄리오가 혀를 찼다.
‘건방진 새끼.’
시안 주제에 자신한테 기어오르다니.
그는 옛날부터 시안이 싫었다. 데미안의 수행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시안과 만나는 일이 많았으나, 그때마다 빠짐없이 녀석을 패주고 싶어 했다.
이유는 뭐 다양했다.
가문의 이력도 있을 것이다. 소메르의 단 둘뿐인 후작가문, 아델하이트와 아그리드.
그 덕에 두 가문은 옛날부터 경쟁하는 사이였다.
오르커스 공작가에 붙어 힘을 키우는 아델하이트는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혼자 고고한 척은 다 하는 아그리드를 옛날부터 싫어하고 있었다.
데미안 공자님보다 훨씬 난잡하고 분별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가 지금껏 봐왔던 시안의 행패는 도저히 눈 뜨고 봐주지 못할 정도다. 소문이 오히려 축소되었다 생각될 정도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싫었던 점은.
“흥. 약해빠진 새끼가 허세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이, 아버지의 위세만 믿고 나댄다는 점.
그가 시안과 직접 붙어본 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데미안의 앞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를 리가 없다.
그러나 직접 붙어보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다.
평상시의 몸가짐, 발걸음의 간격, 주변을 보는 관찰력, 판단력.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방법은 수없이 많았고, 그 모든 것에서 시안은 줄리오의 기준치 미달이었다.
그런 주제에 세상 온갖 허세는 다 부리는 녀석.
“허세라 생각되면 와보든가.”
“……오냐. 안 봐줄 거니까 나중에 가서 울고불고하지 말고.”
“그래? 난 좀 봐줄까?”
으득.
줄리오가 이를 갈고는 양손을 펼쳤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보이지 않는 실이 꿈틀거렸다.
천련사.
아델하이트의 비고에서 가져온 B등급의 아이템.
그러나 등급만 B이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이의 손에 있다면 A급도 두렵지 않을 아티팩트다.
[ 강사(强絲) - 끌어잡기 ]
그의 실이 대지를 달려 시안에게 쇄도했다.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가 오고 있음을 민감하게 감지한 시안. 그가 줄리오를 경계하다가.
“!”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촤촤촤촥!
줄리오는 정면에 있었음에도 실은 뒤에서 덮쳐 들어왔다.
직전까지 시안이 있던 자리를 거세게 긁으며 당겨지는 실.
줄리오가 다시금 오른손을 흩뿌렸다.
[ 강사(强絲) - 하늘내림 ]
일순간에 몇 가닥이 꼬인 실이 세로로 길게 시안을 덮쳤다.
검으로 흘릴 만한 성질의 공격이 아니다. 실의 참격을 회피하며 시안이 땅을 밟았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콰앙!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점과 점을 잇는 듯한 최속의 일격.
과연 그것에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는 줄리오였으나, 그의 대처까지 어설프진 않았다.
[ 연사(軟絲) - 바람그물 ]
줄리오와 시안의 사이에 소용돌이치는 원형의 그물이 짜였다.
시안이 눈을 번뜩였다. 아까도 확인했듯, 이 실은 딱히 자르지 못할 실이 아니다.
찢어발기고 나아갈 생각에 그가 속력을 줄이지 않고 검을 뻗었다.
그러나.
꽈악!
실은 끊어지지 않고 그의 검을 확실하게 붙잡았다.
“…….”
움직이지 않는 검에 시안이 움찔거렸다.
“하여간 단순무식한 건 여전해.”
줄리오가 시안을 비웃으며 왼손의 약지 하나를 까딱였다.
그러자 실 한 가닥이 시안을 노리고 덮쳐들었다.
촤촤촤촤!
옆에서 쇄도하는 실의 기척을 느끼며 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시안은 오히려 팔과 검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느슨하게, 검의 무게에 의지하여 검을 회수했다.
투둑, 투두두둑.
그러자 검을 꽉 붙잡고 있던 실이 끊겨나갔다.
시안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그의 코앞으로 실이 지나갔다.
“쯧.”
줄리오가 혀를 찼다. 이렇게 빨리 상대법을 알아채다니, 눈치도 빠른 녀석.
“꽤 재밌는 무기군.”
시안이 실에서 풀려나온 검을 쓰다듬었다.
줄리오의 무기의 정체는 아마, 들인 마력에 따라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실.
강한 상태일 때는 평범하게 벨 수 있다. 실제로 아까 속박되었을 때 그렇게 베고 나왔으니까.
하지만 연한 상태일 때는 달랐다.
하늘하늘한 실을 열심히 베어봤자 휘감길 뿐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강하게 내리친다고 베이지 않는 것처럼.
그런 상태의 실을 베기 위해선 오히려 힘을 빼고 검 본연의 예기에 의지하는 것이 답일 터.
정체를 알았으니 더 꺼릴 이유가 없다.
그가 땅을 박찼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또 그거냐!”
줄리오가 다시 앞쪽에 바람그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안은 잡히지 않았다. 검을 감싸오는 실이 느껴지자 힘을 빼고 검을 회수하며 그것들을 모두 끊어냈다.
다만 그사이 줄리오는 더욱 거리를 벌렸다.
촤촤촤촤!
투두둑!
적을 향해 접근하는 시안과 어떻게든 떨어뜨리려는 줄리오의 대결.
둘 사이로 수십 합의 검격이 이어졌다.
강사와 연사를 자유자재로 전환하며 줄리오가 시안을 견제했다.
처음에는 다소 손발이 어지러웠던 시안이었으나 그것도 잠시.
“…….”
그는 줄리오의 공격에 급속도로 익숙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순간의 틈을 포착했다.
“굉장히 자유분방해 보이는 무기다만.”
그걸 놓치지 않고 시안이 줄리오에게 접근했다.
사각을 찔린 줄리오가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다급히 실을 끌어당겼다.
“결국 사용하는 건 사람이란 말이지.”
천련사. 무서운 무기다.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했고.
하지만 무기가 아무리 자유로워 봤자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걸 조종하는 사람의 인식은 그만큼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너, 이 새……!”
시안의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줄리오가 선택한 것은 연사가 아닌 강사.
바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을 연사로 막기에는 그의 배포가 아직 모자랐기에.
“…….”
그리고 그건 시안에게 모두 간파되고 있었다.
라비를 얻고 한층 증폭된 마나, 그리고 파워 건틀릿의 주술로 더더욱 강화된 힘.
거력이 담긴 검이 그대로 줄리오를 강타했다.
차차차창―!
그 한 수로 줄리오가 한껏 마력을 불어넣었던 실이 모두 끊어졌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를 감싸고 있던 콜로세움의 배리어 역시 와장창.
콜로세움 마법이 종료되었다.
승패가 결정되었다. 학년이 달랐기에 반지의 변동은 없었지만.
“…….”
“오…….”
“이거 꽤…….”
구경 중이던 관중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흘렀다.
줄리오의 승리를 점치던 이도 있었고 시안의 승리를 점치던 이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여기까지 예측하진 못했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나리라고는.
줄리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얕보던, 그 허접하기 짝이 없던 시안에게 패배했단 사실에.
그러고는.
“다, 다시 해! 잠깐 방심했다!”
“아까는 안 봐준다고 하지 않았나?”
“시끄러!”
얼굴을 잔뜩 붉히며 재대전을 신청하는 줄리오.
시안이 녀석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악수를 하자 콜로세움 마법이 다시 펼쳐졌다.
“이젠 진짜…… 진심으로 간다.”
“기대하지.”
전의를 다지는 줄리오를 보며 시안이 흡족한 기분이 되었다.
방금 대련으로 한 가지 밝혀진 사실이 있다.
강사와 연사를 자유로이 조절하여 이쪽을 옭아오는 줄리오의 스타일.
‘이거 힘 조절 연습에 최적이겠어.’
파워 건틀릿의 조절 연습에 이보다 적당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닌가.
시안의 눈이 반짝였다. 샌드 골렘에 이어 쓸 만한 구타…… 연습 상대를 찾았다는 생각에.
“……?”
그 순간 줄리오의 등줄기를 타고 왠지 모를 오한이 내달렸으나.
“간다!”
그는 그 오한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 * *
“큭…… 젠장!”
다음 날, 줄리오는 아직도 분해하고 있었다. 어제의 그 패배를 곱씹으며.
‘왜 진 거지? 그 녀석 실력이 그렇게 좋았나? 아니면 내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나?’
분한 것과는 별개로 대련의 복기는 철저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의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시안보다 하수라서.
그리고 그는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늘도 한 판 어때.”
그때, 그런 그에게 시안이 찾아왔다.
“오냐! 받아주마!”
줄리오가 벌떡 일어나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결과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시안이 한 번 더 그를 찾아왔다.
“덤벼, 이 자식아!”
그다음 날도.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그리고 다음 날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왔다.
그 모든 대련에서 줄리오는 참패를 했고.
무릎을 꿇고 엎어지는 그를, 딱히 비웃지도 조소하지도 않은 채 시안이 떠나갔다.
그리도 다음 날 시안이 다시 한번 찾아오고.
“적당히 좀 해라!”
울상이 되어버린 줄리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안은 결코 단련을 적당히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고, 기어이 줄리오는 시안을 보고 도망을 쳐버렸다.
“흠…… 방금 보였던 것 같은데 어디 갔지.”
허억…… 허억…….
시안이 보이자마자 건물 뒤편에 숨은 줄리오. 그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시안을 훔쳐보며 숨을 골랐다.
‘내가 왜 이런 꼴을……!’
긍지 높은 아델하이트의 삼남. 데미안 공자님의 수행집사이자 훗날 황실에 입궁할 사람인 이 내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시안이 자신보다 강하단 것을.
그런 놈이 매일의 일과마냥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하러 오는데 안 배길 재간이 있겠는가.
“거기 있었군.”
“허억!”
숨어 있던 그가 결국 시안에게 발견되었다.
시안이 다시금 결투를 신청하며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아아악! 제발 좀 꺼져!”
그걸 보며 줄리오는, 비명을 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비명을 들으며 시안은.
‘확실히 적응했어.’
파워 건틀릿의 ‘힘’에 적응할 수 있던 것에 만족스레 웃었다.
* * *
낡은 반지하.
한 줌의 햇빛밖에 들어오지 않는 그 낡은 집이 물에 푹 잠겨 있었다.
마치 폭우라도 쏟아진 것처럼.
요 근래 비는커녕 구름 한 점 낀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
그 물에 한 남자가 반쯤 잠겨 누워 있었다.
전신에 가득한 흉터.
차가운 물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흉터에 스며들었다.
남자가 눈을 감았다 뜨며, 아까 확인했던 편지를 다시 들어보았다.
―시안 아그리드, 생존, 에버웨일
그의 눈이 한껏 찌푸려졌다.
“어떻게 살아 있지……?”
분명 마차째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천애의 절벽이었다.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을.
그러나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며 편지를 보아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한 손으로 편지를 꾸깃, 구겨버렸다.
“에버웨일.”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못다 한 일을 끝마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