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2화
어린아이들은 왜 엇나가는가.
부모의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겠고, 숨기기 힘든 열등감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때나 아이들이 엇나가기 시작하는 가장 큰 계기는 하나다.
친한 또래 아이의 꼬드김.
도련님에게 있어서는 한 살 위의 데미안이 그 계기였다.
한마디로 이 녀석도 도련님과 비슷한 망나니라는 말이다.
다만 도련님보다는 훨씬 분별이 있었고 뒤처리도 깔끔했다.
시안 아그리드의 소문이 잔뜩 퍼지고 아그리드 후작에게 방임 당하다시피 한 것과 다르게 데미안은 그런 소문도 일절 없고 오르커스 공작에게 무시당하지도 않는다.
아마 오르커스 공작은 데미안의 행보를 그냥 젊은 시절의 불장난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테지.
‘이미지 관리만큼은 철저하게 하는 놈이니까.’
아까 수인 아이에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제국우월주의에 선민사상까지 그득그득한 데미안은 수인이나 반요정들과는 닿는 것조차 싫어한다. 거의 결벽증처럼.
그런 주제에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선 친절한 신사를 연기하고 있지 않은가.
체면과 이미지, 그리고 타고난 혈통.
그런 것을 지키는 것이 귀족의 권위고 위엄이라 생각하는 녀석이다.
‘평범한 지인이면 모르겠는데 신분까지 높으니.’
시안이 도련님의 교우 관계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데미안과 줄리오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림자 역할을 위해서 반드시 익혀 놓아야 할 고위 귀족이었으니까.
덕분에 참으로 골치가 아팠다.
도련님의 지인 중 하나가 하필 이런 남자라니.
거기다 말투나 자신을 보는 표정만 봐도.
“정말 섭하구나 아우야. 내 너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느냐?”
생각 이상으로 시안 아그리드란 존재를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안이 속으로 혀를 찼다.
도련님과 데미안이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둘이 아는 사이라는 정도만 알지 그 이상은 몰랐던 그에게 있어선 완전히 새로운 정보였다.
그냥 가끔 만나 술이나 퍼담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에 한잔하겠느냐? 내 살롱에 초대하마. 훌륭한 이들이 많이 오는 곳이란다.”
아마 제국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자리겠지.
미안하지만 그런 골 아픈 것은 사양이다.
아그리드 가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에게 있어 그 자리는 적진이나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그런 자리는 끊었습니다.”
“응? 아하하, 후작님에게 크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구나? 걱정 말거라. 우리 살롱은 젊은 피가 모여 제국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는 건전한 모임이란다.”
“술이 들어가는데도 말입니까?”
“술 몇 방울 정도야, 이야기의 윤활유 역할로 빠질 수 없는 것이고.”
그건 동의하는 바다만, 몇 방울로 끝나야 말이지.
거기다 시안이 끊었다고 하는 것은 정확히는 술의 얘기가 아니다.
데미안과 마시는 술자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초대를 받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흠……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응이 영 미적지근하구나. 말투도 표정도 묘하게 딱딱한 것이…….”
순간적으로 그를 보는 데미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진짜 시안이 아니란 걸 눈치챘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설령 의심을 한다 해도 대충 개과천선했다고 둘러대면 될 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하하하, 녀석! 오랜만에 본 형님의 이 헌앙(軒昂)한 모습에 부끄러움이 올라온 모양이구나. 좋아 좋아. 뭐 당장 강요하지는 않으마.”
그가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뒤에 있는 줄리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줄리오가 그 손바닥 위에 금색의 선이 새겨진 까만 카드를 올려놓았다.
“우리 살롱에 오기 위한 출입증이란다. 받아두거라.”
후우. 시안이 한숨을 삼키며 데미안이 건네는 카드를 잡았다.
별 필요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면전에서 거절했다간 모욕이다. 그게 귀족들의 사회고 룰이었으니.
그런데 카드를 잡으니.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데미안이 카드를 놓지 않은 채, 시안에게 얘기했다.
“자카르타의 짐승 놈들이나 빙하백령의 날파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겠지?”
카드를 사이에 두고 데미안과 시안 사이의 대기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반대로 눈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명심해라, 시안.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그 땅은 언젠가 우리 제국이 짓밟아야 할 땅임을.”
대륙의 모든 영광과 칭송이 소메르와 함께할 것이니, 이 평화 또한 일시적일 뿐임을 항상 기억하거라.
녀석이 그리 당부했다.
오르커스 공작과 쏙 빼닮은 눈빛으로.
그걸 보며 시안은.
“어려운 얘기는 잘 모르겠군요.”
심드렁한 표정으로 카드만 쏙 빼 왔다.
잡고 있던 카드를 뺏긴 데미안이 두어 번 깜빡이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여전히 이런 쪽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구나. 뭐, 이 뒤는 다음에 하도록 하지. 가자, 줄리오.”
“예.”
데미안이 미련 한 점 남기지 않고 뒤돌아 떠나갔다.
그를 수행하며 줄리오가 한 번 이쪽을 돌아보았다.
시안을 보는 줄리오의 표정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표정.
떠나가는 두 사람을 일별하곤 시안이 살롱의 카드를 적당히 품에 쑤셔 넣었다.
‘대충 구석에 박아둬야겠군.’
정계에 진출할 것이 아니라면 하등 쓸모없는 카드다.
란의 가문과 달리 살롱의 귀족들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도 힘들다.
데미안의 살롱에 모일 정도면 아그리드 가와도 크고 작은 영향을 받는 이들일 테니까.
무시하는 것이 상책.
그리 결론을 내리곤 시안이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 * *
―기이이잉.
작동하는 샌드 골렘을 보며 시안이 몸을 움직였다.
“라비.”
“우웅!”
그의 손목에서 밤의 기운이 풀려나오더니 검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영체인 그 검은 시안의 손에 딱 맞는 최적의 형태를 갖추었다.
지난 며칠 동안 수없이 테스트해 보고 커스텀한 사양.
영체에서 벗어나 실체를 가지고 단조 된 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괜찮군.’
검을 몇 번 휘둘러 보더니 그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려왔다.
그동안 많은 검을 써봤지만 이렇게 손에 착착 달라붙는 검은 처음이었다.
마치 몸과 검이 합일을 이룬 것마냥 만족스러웠다.
‘검, 그리고 장갑.’
검령으로 만들어낸 흑검(黑劍).
그리고 검을 쥔 오른손에 끼고 있는 파워 건틀릿(Gauntlet of Power).
생긴 걸 보면 건틀릿이 아니라 글러브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뭐 제작자가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하니 굳이 바꿔 부를 이유도 없다.
‘…….’
건틀릿에 마력을 불어넣자 단번에 느낌이 왔다.
몸에 힘이 넘쳐흐르며 근질거린다. 전신의 근육이 한계까지 당겨진 용수철처럼 느껴졌다.
다만, 확실히 힘은 넘치고 있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는데.’
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구우우…….”
샌드 골렘이 몽둥이를 들고 쿵쿵거리며 다가왔다. 지난번엔 녀석의 모래를 모두 깎아내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었지.
이제는 라비도 있고 새로운 검도 있고, 파워 건틀릿도 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리라.
서걱!
그의 일검(―劍)에 샌드 골렘의 오른팔이 몽둥이째로 떨어져 내렸다.
파사삭, 떨어지는 모래를 보며 시안이 검을 회수했다.
생각대로 다시금 상대한 샌드 골렘은 이전보다 훨씬 쉬웠다.
이전에는 놈의 방어를 뚫고 대미지를 주기 위해 꽤 많은 공격 시도가 필요했는데.
다만.
‘역시.’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성장세는 확실히 보였지만, 동시에 문제점 역시 감이 잡혔다.
‘평소보다 힘이 훨씬 세지니까 힘의 배분이 엉망이 됐어.’
무기를 다루는 것은 무기의 무게와 스스로의 힘을 자유로이 통제하는 것.
비단 검에만 국한되지 않는 모든 무기술의 기본이다.
단순히 강한 힘으로 내려친다고 끝이 아니란 얘기.
라비를 얻고 마나가 대폭 증가했을 때랑은 또 달랐다.
또렷하게 느껴지는 마나와 달리 주술로 올라간 이 ‘힘’이란 녀석은 무척이나 애매하고 연기처럼 흐릿했다.
증가한 마나에 적응하는 것은 하루 이틀이면 되었지만, 이 힘은 그렇게는 힘들어 보였다.
‘고블린 킹이 아무런 기술 없이 단순하게 내려치곤 했었지.’
자신이 별다른 부상 없이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던 이유가 그것이다.
만약 놈이 이 타투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수였다면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겠지.
그 말은 즉.
‘연습이 필요해.’
자신이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훨씬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얘기.
“후우.”
몸 안에서 넘칠 듯이 술렁이는 힘을 느끼며, 그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연습 상대가 필요하다. 샌드 골렘도 좋지만 이 녀석으론 모자라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여기가 어딘가. 천하의 에버웨일이 아니던가.
이 학교엔 연습 상대로 쓸만한 이들이 말 그대로 넘쳐흘렀다.
멋대로 도전해 오는 학생들 말이다.
“앞으론 더 빡빡하게 가야겠어.”
시안에게 도전했다 깨진 적이 있는, 혹은 앞으로 도전할 생각이던 생도들.
그들이 들었다면 기겁했을 말을 뱉으며 시안이 검을 들어 올렸다.
* * *
대련광장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아카데미 부지 내에 있는 광장 중 하나로, 아카데미 측에서 학생들의 원활한 쌈박질…… 대련을 권장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이다.
입학 초창기에는 부지 곳곳을 가리지 않고 대련이 펼쳐졌지만 지금은 어지간해선 거의 이곳에서 치러지고 있었다.
장소도 넓고 대련 상대도 쉽게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의무실이 가까우니까.’
바로 근처에 의무실이 위치해 있다. 대련에서 입은 부상을 곧바로 처치할 수 있도록.
입지가 아주 좋다는 얘기.
시안이 수업이 빈 공강 시간을 이용해 이 대련광장을 찾았다.
널찍한 부지 곳곳에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인다.
개중 일부에선 자기들끼리 무기를 휘두르며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모두가 반지의 순위에 눈이 돌아가 어슬렁어슬렁 모인 이들이다.
테일 교관이 말했던 ‘자신의 숫자를 못 견뎌’ 단 한 등수라도 더 높이고 싶어 하는 이들.
시안이 잠시 그들을 살펴보았다.
‘패거리가 나뉘어 있군.’
얼핏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퍼지고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크게 세 흐름이 있었다.
소메르 제국의 학생들과 자카르타의 수인들, 그리고 요정궁의 반요정들.
아무리 같은 학교를 다니는 학우라고 하지만 같은 종족끼리 모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런 것에 관계없이 잘 지내는 이들도 왕왕 보이지만 그런 쪽은 적었다.
‘나랑은 상관없지.’
패거리들을 훑어보며 시안이 적당한 대련 상대를 물색했다.
당장의 그의 목표는 파워 건틀릿의 ‘힘’에 적응하는 것.
그걸 위해선 누구랑 붙는 게 제일 좋을까.
같은 인간 학생과? 아니면 신체 능력이 좋은 수인들? 반요정과의 대련은 힘의 적응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야, 쟤 걔 아니냐?”
“걔라니?”
“신입생 1위 말야, 1위. 반지 보니까 맞는데?”
먹잇감을 물색 중인 시안을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소곤거리며 쳐다보았다.
선배 학생들은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만. 동급생인 1학년들은 도전할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러던 중.
소메르의 학생들이 모여 있던 패거리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봐, 시안.”
시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줄리오 아델하이트.
아까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째려보고 갔었던 그 녀석이었다.
그가 나서자 소메르의 학생들도 자카르타와 요정궁의 학생들도 이쪽을 보기 시작했다.
시안은 모르고 있었지만 소메르의 파벌에서 줄리오는 상당이 지위가 높았다.
그 파벌의 리더가 그가 모시는 데미안 오르커스였기 때문이다.
즉 자카르타나 요정궁의 파벌 쪽에서 보면 줄리오는 경쟁 파벌의 2인자나 다름없는 이였다.
“뭡니까.”
물론 시안은 이 모든 사안은 모르고 있다.
그가 아는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자신에겐 대련 상대가 필요하고.
“네 더러운 소문은 귀를 막고 있어도 들려오더군. 그런 주제에 공자님한테 붙어서 단물이나 빨려고 하고, 부끄럽지도 않냐?”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뿐.
“내게 그런 걸 가르쳐 준 게 당신이 말하는 공자님입니다만.”
“잘 배웠어야지. 소문이 안 나도록 처리도 잘하고, 뒤끝도 남기지 말고. 근데 넌 못했잖아?”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순간, 시안은 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뻣뻣해진 것이 아니다. 속박 마법에라도 걸린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생각엔 네가 주변에 있으면 공자님의 행보에 방해밖에 안 될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
“아니면 아무 생각도 없나? 뭐, 상관없어. 처맞다 보면 너도 떠오르는 게 있을 테니까.”
데미안과 있을 때완 달리, 실실 웃으며 거친 말을 내뱉는 줄리오.
엮일 생각 따윈 없다.
라는 대답은 굳이 하지 않고, 시안이 오른손을 꿈틀거렸다.
손목의 각인에서 검은 기운이 풀려 나온다.
타타탕―!
그것은 검의 형태를 이루며, 동시에 시안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보이지 않는 실을 전부 끊어내었다.
줄리오의 웃음이 멎었다.
그런 그에게, 시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