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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21화 (21/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1화

시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란 아슬라는 본디 차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모종의 일로 2위의 반지를 잃어버린 상황.

그 잃어버린 반지를 옆에 있는 하얀 머리의 반요정이 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묘한 조합이군.’

전 2위와 현 2위.

나란히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함께 팀을 짠 것 같은데.

“……시안.”

유설이 발을 멈추고 가만히 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시안은 그녀를 모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소문을 통해 시안을 알고 있었다.

그 눈에 섞인 희미한 열기.

리위가 보였던 것과 같은 천박한 적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하게 달궈진 투기였으니.

“…….”

시안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누가 쏘아본다고 고개를 돌릴 그가 아니었으니까.

“너 우리 반 에르제 맞지?”

한편, 란이 시안의 옆에 있는 에르제를 발견했다.

에르제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 으응. 맞는데……요.”

“요는 뭐야. 같은 학년이면서.”

섬에서 시안과 팀을 짤 때와 완벽히 똑같은 대화.

“이 녀석이랑 같은 팀이었나 봐?”

“으, 으응. 어쩌다 보니 둘만 남게 돼서.”

“흐응.”

란이 묘한 목소리를 내더니 유설과 한창 눈싸움 중인 시안을 힐끔 보았다.

그녀가 에르제에게 얘기했다.

“혹시라도 이 녀석이 괴롭히거나 뭘 하려는 것 같으면 바로 나한테 얘기해.”

“어, 어?”

“우리 가문도 쟤네 못지않으니까 안심하고.”

그녀로서는 호의의 뜻이었다.

시안이 만약 횡포를 부린다면, 같은 반에서 막아줄 수 있는 인물은 자신뿐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녀의 생각과 달리 에르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방금까지의 내성적이던 모습과 전혀 다른 강한 어조에 란이 눈을 깜빡거렸다.

“가자, 시안!”

“응?”

그러더니 그녀가 시안의 손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그때까지도 유설과 말없이 눈싸움을 하던 시안.

그와 유설의, 걸린 것이라곤 별거 없는 자존심밖에 없던 눈싸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불만족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는 유설의 옆에서, 란이 에르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애였어?’

그 표정에, 다소의 놀람이 깃들어 있었다.

* * *

관엽식물의 화분이 놓여 있는 개인연구실.

한쪽에는 작은 케이스가 있어, 햄스터가 그 안에서 쳇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돌돌돌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그 방에서, 데릭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알렌 크루거…… 혹시 이 돌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가?’

그때 봤던 알렌의 표정. 분명 뭔가가 있어 보였다.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써오고 있긴 하다만 그는 이 돌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우연히 주워서 쓰고 있었을 뿐이니까.

그래서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알렌에게 신경이 쓰였으나.

‘물어볼 순 없어.’

당연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이 붉은 돌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해왔던가.

개중에는 세간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부당한 이득도 얼마든지 있었다.

만약 그게 밝혀진다면.

최악의 경우 발표했던 논문이 모두 취소당하고 교수직은 박탈당하고, 나아가 구속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것은 알렌에게 붉은 돌의 정체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들쑤시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퇴학이라도 시켜? 말도 안 된다. 정식으로 입학한 학생을 일개 초빙 교수인 자신만의 판단으로 퇴학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뭔가 대형 사고를 치지 않으면야.

‘대형 사고……. 사고를 치게 만든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그는 연구만 할 줄 알지 이런 음모를 꾸미는 덴 젬병이었다. 그런 것으로 교수직을 얻은 것이 아니기에.

하지만 애써 얻은 교수직을 지키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될 때였다.

그때.

―똑똑.

“힉!”

갑자기 들리는 노크 소리에 그가 흠칫 놀랐다. 나쁜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더더욱.

‘아, 알렌인가!’

그놈이 기어이 직접 담판을 지으러 온 것일까?

데릭 교수가 다급히 붉은 돌을 주머니 깊숙이 쑤셔 박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릭 교수님? 저 융이에요.

그러나 문밖에서 들려온 것은 알렌이 아닌 융 교관의 목소리였다.

긴장 탓에 바짝 올라가 있던 데릭 교수의 어깨가 내려왔다. 알렌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유, 융 교관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다급히 그러모아 서랍 하나에 쑤셔 넣었다.

그가 융에게 문을 열어준 것은 1~2분 정도는 지난 후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싱긋 웃으며 인사를 해주는 융 교관.

그런 그녀를 보곤 데릭 교수가 머뭇거리며 마주 인사했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이렇게 아침부터 어쩐 일로…….”

“그때 부탁드렸던 것 때문에 왔어요.”

“그, 그렇죠! 그것 말고는 오실 이유가 없을 테니…… 아! 일단 들어오세요!”

“실례할게요.”

데릭 교수가 그녀를 자리에 앉히곤 차 한 잔을 내왔다.

그녀가 고맙다고 얘기하며 한 모금 차를 받아 마셨다.

그 모습에 데릭 교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자신의 교수실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녀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는 것만으로.

“……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깔끔하게 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알렌과 붉은 돌 때문에 그녀와의 약속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뭐였더라, 분명히 알렌에 대해서 지켜봐 달라던…….

“데릭 교수님!”

“예, 예!”

융 교관이 조금 크게 이름을 부르니 그제야 데릭 교수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그, 그게 말씀드릴 걸 잠깐 정리해 보느라…….”

“아 그러셨군요. 생각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서…… 알렌 크루거는 어땠나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알렌 학생은 그…….”

데릭 교수가 더듬더듬 자신이 본 알렌에 대해 얘기했다.

그가 사용하던 푸른 불꽃이나 외상을 입히지 않고 마수를 처치하던 독특한 능력에 대해서.

물론 붉은 돌과 관련된 것은 쏙 뺐다.

융 교관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외상 없이 마기만을 태우는 능력…….’

고대 정령 알티마.

듣기로 온갖 삿된 것들을 정화하는 정령이라고 하던데, 구체적으로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구나.

그녀가 잘 들어주니 데릭 교수 역시 신나선 말이 많아졌다.

여성이 이렇게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준 경험은, 그는 처음이었다.

말을 더듬고 어눌거리는 탓에 항상 지루하단 시선이 전부였는데.

“감사해요.”

“아, 아닙니다. 힘든 일도 아니었고…….”

이윽고 설명이 모두 끝났다.

그녀가 감사를 표하며 무언가를 꺼내 데릭 교수에게 내밀었다.

“약속했던 사례예요.”

“이건……?”

“교수님께 어울릴 만한 넥타이를 사봤어요.”

무늬가 없는 검은 넥타이.

가운데엔 은색의 나뭇잎 모양의 넥타이핀이 끼워져 있었다.

데릭 교수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걸 받았다.

“가,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이라…….”

“돈 몇 푼만 드리는 건 너무 성의가 없어 보여서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일 보세요.”

“아, 예. 살펴 가세요.”

그가 일어나 융 교관을 배웅했다.

그러고는, 문을 닫고 교수실에 돌아온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넥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매고 있는 넥타이를 풀고는 그걸 대신 매보았다.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역시…….’

역시 포기할 수 없다.

그가 이 넥타이를 받을 수 있던 것은 자신이 에버웨일의 교수이기 때문이다. 붉은 돌로 얻은 이 지위 덕분에.

그의 눈이 결의의 빛으로 번뜩였다.

지켜야 한다.

논문도, 지위도, 명함도.

그리고 앞으로 얻을 모든 것들도.

* * *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시안은 공방으로 가 부탁했던 물건을 받아왔다.

고블린 킹의 주술타투가 새겨진 어깨 가죽으로 만든 한 짝의 장갑.

‘좋아.’

마나를 불어넣으니 타투에서 은은한 빛이 흐르며 솟아오르는 힘이 느껴진다.

마나와 같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운은 아닌, 마치 연기처럼 뭉게뭉게 느껴지는 힘이었으나 분명히 그것은 존재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작은 돌멩이 하나를 쥐었다.

파삭!

힘을 주니 가볍게 바스라진다.

악력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샌드 골렘으로 확인이라도 하러 가볼까.’

이 장갑과 비고에서 얻은 검. 새로 얻은 두 아이템을 시험해 보기엔 딱 적절한 상대이리라.

그런 생각에 수련동에 가던 도중.

―꺄악!

작은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아닌 잠깐 놀라는 듯한 소리.

쳐다보니 누구랑 부딪혔는지 한 여학생이 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쫑긋거리는 귀와 꼬리를 보니 자카르타의 수인이었다.

―이거 미안하군. 괜찮은가?

그녀의 앞에 있는 두 남학생.

그중 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넘어진 수인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매고 있는 넥타이 색으로 선배인 것을 알아봤는지, 수인 아이가 그의 손을 잡았다.

매너 좋게 그녀를 일으켜주는 선배라는 학생을 보며 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고 있는 녀석이다.

짙은 남청색의 머리칼과 치켜 올라간 눈초리.

소메르 제국에 단 하나 있는 공작가. 제국의 재상직을 겸하고 있는 오르커스 공작의 아들.

‘데미안 오르커스.’

자신과 한 살 차이니 지금은 2학년일 것이다.

그리고 데미안의 뒤쪽에 시립해 있는 학생은 줄리오 아델하이트.

아델하이트 후작가의 삼남으로 오르커스 공작가에서 집사 일을 하고 있는 녀석이다.

듣기로는 황족의 시종 자리를 목표로 오르커스 공작가에서 수학 중이라던가.

―다친 곳은?

―괘, 괜찮아요!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수인 아이가 잠시 데미안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급히 고개를 숙이곤 둘에게서 벗어났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일별하고 앞을 보니, 데미안과 줄리오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본 데미안이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한 동생이라도 본 것처럼.

“시안! 오랜만이구나.”

사실 그게 맞기도 했다.

그의 입장에선 전혀 달갑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말이다.

“섭하구나 섭해. 입학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인사 한번이 없단 말이냐. 내가…….”

데미안이 그리 얘기하며 장갑 낀 손으로 시안의 어깨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그 손이 살짝 멈췄다.

“이런, 미안하군. 더러워진 손으로 널 만질 뻔했어.”

그가 그리 얘기하며 손가락 끝을 잡고 장갑을 벗었다.

줄리오가 건네주는 새 장갑을 받아 끼며 데미안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하하, 1년이나 지냈는데 이것만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더러운 짐승 놈들과 같은 학교에 있다는 게 말이다.”

한 점 고뇌 없는, 신념마저 느껴지는 듯한 깔끔한 어조.

녀석이 지금 벗은 장갑은 수인 아이를 일으켜 주었던 그 장갑이었다.

새 장갑을 낀 채로 녀석이 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안이 작게 한숨을 뱉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입니다, 데미안 형님.”

분명 도련님이 이 녀석을 부르던 호칭이 이거였었지.

“그래그래. 잠시 기분이 상하는 일도 있었다만 오늘은 전체적으로 좋은 날이구나. 귀여운 동생과 재회도 하고 말이다.”

소메르의 재상인 오르커스 공작의 아들, 데미안 오르커스. 녀석은 지금은 죽고 없는 본래의 도련님의 지인이다.

그것도 그냥 아는 사이 정도가 아니라, 도련님을 망나니의 길로 이끌었던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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