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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9화 (19/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9화

“아…….”

“…….”

쏟아지는 핏물 너머로 에르제와 알렌의 시선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데릭 교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기묘하게도 에르제였다.

뭔가 깨달은 것이라도 있는 것일까.

―푸슉!

시안의 눈에 베이다 만 고블린 킹의 목이 보였다.

부러진 검이었던 탓에 리치가 조금 짧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없었다.

종의 한계를 넘어섰다 하더라도 일단은 고블린이다. 목의 절반이 베어지고 살아 있을 고블린은 없었으니.

다만.

“크…… 르…….”

놈이, 눈에 빛이 사라지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최후의 투기를 발휘했다.

녀석의 굵은 팔이 움직이며 시안을 향해 철봉이 떨어져 내렸다.

죽지 직전의 일격이라곤 하지만 나름 매서웠다.

맞으면 필히 부상은 피할 수 없겠지.

‘발악을 하는군.’

그래도 이제 와서 이런 최후의 발악에 당할 시안이 아니었다.

그가 살짝 뒷걸음질 치며 몸을 뺐다.

그런데 그때.

―서걱.

누군가가 둘 사이로 난입하며 검광이 번뜩였다.

철봉을 든 고블린 킹의 팔이 잘려나갔다. 동시에 놈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놈의 최후의 일격은 그렇게 허무하게 실패했다.

쿠웅!

원통하다는 듯이 부릅뜬 눈으로 쓰러지는 고블린 킹.

시안이 난입자를 바라보았다.

‘알렌.’

푸른 화염을 든 검을 들고 있는 알렌 크루거.

저 화염이 그의 정령의 힘인 것일까?

“괜찮아? 괜히 끼어든 건가?”

괜한 짓은 맞았지만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아니, 고맙다.”

그에게 한마디 남긴 후 시안이 고블린 킹의 사체로 향했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놈의 어깨 가죽을 베어냈다.

전부는 필요 없다. 딱 타투가 있는 그 부분만.

그가 에르제를 향해 물었다.

“이 가죽은 내가 가져도 되겠지?”

“응, 응! 당연하지! 네가 다 했는데…….”

잠시 멍하던 에르제가 정신을 차리더니,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업혀 간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그녀는 조금, 아니, 꽤 많이 기가 죽은 듯한 모습이었다.

시안이 가죽을 주머니에 잘 넣어놓고는 그대로 단검으로 고블린 킹의 몸을 갈랐다.

녀석의 안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마석이 있었다.

그걸 꺼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에르제에게 던졌다.

“왁!”

“네 몫이야.”

“뭐? 이런 거 못 받아! 난 진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래도 그녀 덕분에 기절한 그 8명을 전장에서 치울 수 있었다.

그 후에 잠깐잠깐 견제를 해준 것도 도움이 영 안 되진 않았고.

그런 마음에 시안이 친절하게 얘기했다.

“잔말 말고 받아.”

“으, 응!”

시안의 말에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꽤 값이 나가겠지.’

고블린 킹의 마석이니 나름 값이 나가는 물건일 것이다. 그러나 그걸 건네주는 것에 아쉬움은 없었다.

그가 생각한 것이 맞다면, 그의 품에 들어 있는 주술타투가 저런 마석보다는 수십 배 가치 있는 물건일 테니.

‘얼추 정리됐군.’

고블린 킹을 쓰러뜨린 시안을 보며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는 알렌과 마석을 품에 안고는 히죽거리는 에르제.

알렌의 룸메이트인 게일은 시안의 소문을 신경 쓰는지 서먹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데릭 교수는…….

“끄응…….”

시안이 데릭 교수에게 향하려던 그때, 절벽 아래의 바위에서 얼굴을 잔뜩 구긴 남자가 기듯이 바깥으로 나왔다.

부하를 이끌고 시안을 공격했던 리위였다.

녀석이 시안을 보고 흠칫거리더니 이내 옆에 있는 데릭 교수를 발견했다.

“교수님! 잘 오셨어요! 저 녀석이 저랑 제 친구들을 폭행했습니다!”

“네, 네?”

리위가 한 줄기 빛이라도 찾은 것처럼 밝아진 얼굴로 다급히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나와 내 친구들을 폭행했다. 역시 망나니란 소문은 사실이었다. 저런 놈은 에버웨일의 기강을 위해서라도 곧바로 징계를 내려야 한다, 등등.

“부, 분쟁이 있었단 말인가요?”

“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이었습니다!”

데릭 교수가 어쩔 줄 모르는 듯이 눈알을 굴렸다.

그는 교수긴 하지만 테일 교관처럼 담임으로서의 경험이 있는 이는 아니었다.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때 리위의 말을 가만히 경청하던 알렌이 말을 꺼냈다.

“그래서, 먼저 손을 댄 건 누군데?”

“그, 그건…….”

그가 말을 멈췄다.

그 틈에 얼굴을 붉히며 분을 참고 있던 에르제가 크게 소리쳤다.

“얘예요! 가만히 쉬고 있는 나랑 시안을 갑자기 포위하곤 공격했어요!”

말끝을 흐리며 대답에 궁해하는 리위와 그를 가리키며 울분을 토해내는 에르제.

답은 바로 나왔다.

알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데릭 교수님. 아무래도 그의 담임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그렇군요. 학생 이름과 반을…….”

“그, 그게! 먼저 시비를 걸긴 했지만 저희는 맞기만 했어요! 손도 안 댔단 말입니다!”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진실만을 얘기한다고 해서 알렌의 안목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 댄 거야, 못 댄 거야?”

“…….”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듯 입을 다무는 리위.

알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걸 들으며 리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이렇게 일이 꼬였지? 이렇게 흘러갈 게 아니었는데!

그가 찌푸린 표정으로 시안을 쏘아보았다.

“…….”

“…….”

허공에서 가만히 마주치는 시선.

그 직후, 리위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팍 고개를 숙였다.

시안의 얼굴을 보니 아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기에.

그리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그가 갑자기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으, 으아아악!”

바로 발밑에 보이는, 새빨간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고블린 킹.

놈을 보곤 그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다시 보니 그것은 그냥 시체일 뿐이었다. 목이 절반 이상 갈라져 있는.

“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에르제의 헛웃음 소리에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 *

시안과 에르제가 현장에서 떠났다. 리위와 쓰러져 있던 학생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그리고 현장에는, 알렌과 게일 그리고 데릭 교수만이 남게 되었다.

‘왜 안 가!’

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알렌과 게일을 보며 데릭 교수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만약을 위해 고블린 킹의 사체를 회수하고 싶은데 저 두 녀석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게일은 그냥 알렌 때문에 남은 것 같은데, 문제는 알렌이었다.

혼자 고블린 킹의 사체를 이모저모 살펴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데릭 교수님.”

“왜, 왜 그러시죠, 알렌 학생?”

“혹시 아까 보셨나요? 이 녀석 눈이 빨갰었죠?”

“그, 그그그랬던가요? 전 잘 못 봤습니다만…….”

알렌의 말에 데릭이 흠칫 놀라며 재빨리 부정했다. 그러고는 다급히 변명을 짜냈다.

어찌나 팽팽 머리가 돌아가는지 평소와 달리 말도 더듬지 않았다.

“눈이 충혈되는 정도야 마물들에겐 흔히 있는 일이니까요. 마나가 활성화됨에 따라 피가 빠르게 돌아 눈에 있는 모세혈관이 도드라져 보인 것이겠죠.”

“그렇다고 하기엔 아까는 조금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그, 글쎄요! 말했다시피 저는 전혀 보질 못해서요!”

“……그렇군요.”

알렌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그 옆얼굴을 보던 데릭 교수가 꿀꺽 침을 삼켰다. 항상 상냥한 표정으로 남들을 배려하던 알렌의 얼굴이 지금은 전혀 달랐다.

날카롭게 베일 것 같은, 보이는 모든 것을 찢어내는 칼날과도 같은 그런 눈빛.

“저희도 이만 가겠습니다. 가자, 게일.”

그러나 그가 게일을 돌아봤을 때, 이미 그런 기색은 싹 사라진 후였다.

“볼일은 다 끝났냐?”

“응. 기다리게 해서 미안.”

“나중에 뭐 맛있는 거라도 사주든가.”

머리를 벅벅 긁는 게일과 함께 알렌이 숲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데릭 교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 있었다.

저 녀석 설마, 뭘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

‘뭘 알고 있는 건가……?’

그의 눈빛이 복잡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 * *

그날 하루, 외부 임무가 끝나고 모두 에버웨일로 무사히 복귀했다.

오늘만큼은 시끌벅적하던 기숙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모두 퍼질러 자고 있으리라.

첫 실전이 준 피로가 상당했으리라.

그리고 다음 날.

“시안, 여기.”

그가 에르제와 함께 어느 장소로 향했다.

실전 훈련의 수업은 어제 끝났지만 아직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바로 모아온 마석의 개수에 따라 주겠다던 추가 보상.

“여긴가 보군.”

“여기가…….”

본관 지하 깊숙한 곳, 어느 장소에 도착한 우리 둘.

그런 우리의 앞에 금고의 문을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강철 문이 자리해 있었다.

에버웨일의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는, 비고(祕庫)였다.

“이야~”

“다 좋아 보이는데?”

비고에 와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대략 20명 정도의 인원들.

각각의 임무에서 상위 성적을 받은 이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와 있었다.

아마 나랑 아일린이 가장 마지막으로 온 것 같았다.

“D급…… D급…… 내가 D급 아티팩트를?”

한편 시안의 옆에서 에르제가 넋 나간 표정으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시안과 에르제. 두 사람은 모아온 마석도 상위권이었고 거기에 고블린 킹의 마석이란 희귀한 물건까지 챙겼다.

명실공히 최고의 공적을 올린 팀이었다.

상위권의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보상은 D급 아티팩트 하나.

평민인 그녀에게 D급 아티팩트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비싸니까.’

단적으로 말해 비쌌다.

D급이라 하면 아마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의 물건은 아니고 강철마탑에서 제작한 양산형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아티팩트는 아티팩트다.

D급 정도만 돼도 보통의 평민은 만져보기도 힘든 물건이었다.

생활용의 F급 아티팩트라면 또 몰라도.

“시, 시안. 혹시 이거 몰래 팔면…… 안 되겠지?”

판다는 말부터 꺼내는 그녀를 보며 시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 그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가 후작가 사람이라곤 하지만 본래는 평민이니까.

“교수님한테 들었을 텐데. 아카데미를 중퇴하거나 쫓겨나게 될 땐 반납해야 한다고. 멋대로 팔았다가 나중에 그대로 빚이 될 수도 있어.”

“그랬었지…….”

그녀가 진한 아쉬움을 채 감추지 못했다.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그녀의 나이에 목돈이 손에 들어올 기회는 흔치 않은데.

그래도 아쉬워만 할 건 아니다.

여기서 얻을 아티팩트가 언젠가 목숨 한 번을 구해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앞으로의 수업과 임무 등지에도 요긴하게 쓰일 것이고.

“왔구나. 너희가 마지막이야.”

두 사람을 보곤 비고 입구에 서 있던 경비가 다가왔다.

도시의 경비와는 별도로 아카데미에서 자체적으로 고용한 경비원.

그의 손에는 물품을 받아갈 학생들의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

“얘기는 들었겠지? 들어갈 수 있는 데는 D급 비고까지야. 혹여라도 C급 이상에 들어가 볼 생각은 꿈에도 말고.”

설명을 들으며 시안과 에르제가 교수에게 받았던 지급권을 내밀었다.

그것의 진위를 확인하는 경비를 보며 시안이 생각했다.

‘고블린 킹의 타투에 D급 아티팩트.’

이번 임무로 수확이 둘이나 있었다.

주술타투가 새겨진 고블린 킹의 어깨 가죽은 여기 오기 전 공방에 맡겨 놓았다. 장갑으로 가공해 달라고.

거기에 지금부터 얻을 D급 아티팩트.

마침 고블린 킹과 싸우며 저택에서 가져온 검이 부러진 참이다.

타이밍이 딱이었다.

‘쓸만한 검이나 한 자루 챙기면 되겠어.’

비고에 어떤 검이 있을지.

약간의 기대와 함께 그가 비고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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