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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화 (1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화

―쿠웅!

고블린 킹이 발로 지면을 크게 내리찍었다. 그러더니 쿵쿵거리며 시안을 향해 마구잡이로 돌진해 왔다.

틈을 봐 단검을 쑤셔 넣으려던 에르제가 놈의 움직임에 당황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단검이란 무기는 은밀함에 초점을 둔 것이다.

때문에 멧돼지마냥 무식하게 돌진하는 적은 막아내기 힘들었다.

“후우…….”

무섭게 돌진하는 고블린 킹을 보며 시안이 호흡을 골랐다.

‘내가 도망치면 누워 있는 녀석들이 위험하다.’

리위와 그 부하 놈들.

녀석들을 지켜줄 의리 따윈 하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어차피 교수가 오면 사태는 끝이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게 가장 리스크가 적은, 안전한 선택이었다.

‘침착해라.’

시안이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놈을 관찰했다.

녀석의 발걸음에 땅이 울리고 놈의 기백에 공기가 떨리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보는 법’을 잊지 않았다.

“크라아아아아아!”

놈이 돌진하던 기세를 죽이지 않고 그대로 철봉을 휘둘렀다.

흡사 대기가 압축되는 듯한 착각까지 들 지경.

아무리 그라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었다. 달려드는 전차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격이었으니.

그래서, 놈이 철봉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움직였다.

뒤가 아닌 앞으로. 놈의 철봉이 휘둘러지는 곳을 향해서.

“크륵?”

사냥감이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다가오자 고블린 킹이 얼굴을 씰룩였다.

그 표정을 보고 시안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뒤로 빠졌으면 더 크게 당했겠지.’

본디 모든 타격이란 타격점을 정해놓고 휘둘러지게 마련.

무기를 휘두르며 타격점을 바꾸는 것은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무리였다.

고블린 킹은 그 정도 고수가 아니었다.

콰앙!

“큭!”

철봉이 온전히 전부 휘둘러지기도 전에 시안의 검이 먼저 부딪혔다.

사선으로 세운 검으로 놈의 철봉을 막자 그의 몸이 뒤로 쭈욱 밀려났다.

땅에 남겨진 두 줄의 발자국.

다소 기세를 죽인 놈의 돌격은 다행히 지금의 그라도 충분히 흘릴 만한 정도였다.

“크허엉!”

나름 회심의 일격이 엇나가자 놈이 더욱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시안이 황급히 상체를 숙였다.

부웅! 스쳐 지나가는 철봉이 그의 머리칼을 몇 가닥 잘라냈다.

캉! 캉캉!

놈의 철봉과 시안의 검이 몇 번이나 허공에서 부딪혔다.

철과 철의 부딪힘에 불씨가 튀기며, 양쪽 모두 치명적인 일격이 오가고 있었다.

‘…….’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철봉을 옆으로 굴러서 피해냈다.

그리고 자세를 가다듬자마자 놈의 발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놈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발을 뺐다. 동시에 그 기세를 이용하여 철봉을 휘둘렀지만 시안의 검에 막혀 빗나갔다.

‘힘이 장난이 아니군.’

그가 눈을 찌푸렸다.

분명 정확한 각도로 제대로 흘려냈음에도 팔 전체가 저릿거렸다.

그가 흘깃 녀석의 어깨를 보았다.

그 어깨에 새겨진 기이한 타투가 마력을 품어 빛나고 있었다.

‘힘이 강화되는 주술인가?’

분명 녀석의 덩치와 근육은 상당했지만 그것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힘이었다.

저 주술에 담긴 마력의 힘이 분명하리라.

‘그래도 기술적으론 내가 훨씬 위야. 충분히 할 만하다.’

그리 생각하며 놈의 철봉과 정면에서 맞부딪친 순간.

파직.

‘……!’

작은 금이 느껴졌다.

다른 어디에도 아닌, 자신이 들고 있는 검에 생겨난 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날 위의 균형과 같았던 지금의 상황에 금이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이! 도와주러 왔어! 일단 물러나!”

“시, 시안 학생!”

그 직후, 뒤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쿠웅!

먼지가 피어오르며 두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하나는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 일어나는 데릭 교수.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푸른 불꽃을 두른 검을 당당하게 들고 있는 알렌 크루거였다.

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알렌?’

저 녀석이 왜 여기에?

근처에 있다가 소란을 감지하고 달려온 건가?

“시안!”

알렌에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안이 이제야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몸을 뺄 타이밍이라고.

그런데.

―카앙!

그런데, 자신의 몸은 전혀 빼지 않고 있었다.

“크허엉!”

“흡!”

고블린 킹의 철봉을 막으며 그의 눈이 의문으로 차올랐다.

분명히 몸을 뺄 기회는 몇 번이나 있다.

아니, 기회를 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뒤돌아 도망쳐도 데릭 교수가 왔으니 잘 처리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발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부웅!

날아오는 철봉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다.

직접 가격당한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 풍압만으로 그의 어깨에 미약한 생채기가 생겨났다.

무의식적으로, 몸에 익은 듯이 그가 반격을 내질렀다.

‘아.’

그제야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머리는 ‘충분히 버텼으니 이제 빼야 한다’ 외치고 있었지만, 자신의 가슴은 아직 이 전투에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아직 수가 하나 남아 있다.’

놈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든 것을 해보지 않았으니까.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걸어보지 않았으니까.

그의 가슴이 외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남았는데도 도전하지 않고 몸을 빼는 것.

적은 리스크를 좇으며 안정적인 선택지만을 고르는 것.

그런 편한 길만 택한다면, 너는 결국 아그리드의 그림자라는 운명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그저 그 순간을 원만히 넘기기 위한 선택으로는 모자라다. 필요한 것은 언제나 한계를 넘기 위한 도전.

그걸 거듭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미래 역시 일절 바뀌지 않을 거라고.

그는 그 외침에 완전히 납득했다.

* * *

조금 전.

언덕 위에서 데릭 교수는 오로지 시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제가 중간중간 견제를 넣고 있긴 했지만 결국 이 전투의 핵심은 정면에서 고블린 킹을 상대하는 시안이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고블린 킹과 저렇게 대등하게 승부를 펼칠 수 있지?

데릭 교수의 눈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그는 마물학 교수다. 당연히 고블린 킹이라는 개체가 가지는 파괴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저놈은 붉은 돌의 힘으로 한층 강화된 상태가 아니던가!

‘학생 수준으로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닌데!’

그런데 눈앞의 광경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학생에 불과한, 그것도 올해 막 입학한 신입생이 당당히 맞상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선 본래의 계획 같은 것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시안이 보여주는 광경이.

그때.

“교수님?”

“여기서 뭐 하세요?”

“히익!”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돌아보니 눈에 익은 학생들이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알렌 학생! 게일 학생! 어, 어떻게 여길……!”

자신의 표적이었던 알렌과 그 룸메이트인 게일.

설마 지금 자신을 본 건가? 절벽 아래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자신을?

데릭 교수의 표정이 안절부절못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알렌과 게일이 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캉! 캉캉!

“!”

“아래쪽!”

그때 절벽 아래에서 들려오는 칼부림 소리에 알렌과 게일이 단숨에 달려 나갔다.

데릭 교수는 머리가 하얘져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그를 지나쳐 아래쪽을 목격한 알렌.

“뭐 하세요! 당장 도우러 가야죠!”

“어, 으응…… 그게…… 자, 잠깐! 으아아악!”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데릭의 손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데릭 교수의 입에서 떠나가라 비명이 튀어나왔다.

쿠웅!

그리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 두 사람.

알렌은 멋지게 두 발로 무사히 착지를 했고, 데릭 교수는 꼴사납게 넘어졌다.

“어이! 도와주러 왔어! 일단 물러나!”

“시, 시안 학생!”

두 사람이 소리쳤다.

데릭 교수는 그저 반사적으로, 죄책감에 부른 것에 불과했다. 반대로 알렌은 정말로 시안을 도와주고자 부른 것이었고.

그가 검에 푸른 불꽃을 두르며 소리쳤다. 시안이 뒤로 물러나기를.

지금 시안과 고블린 킹은 너무 가까운 데다 쉼 없이 검격을 나누고 있었기에 도저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고블린 킹에게서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난입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상했다.

“시안 아그리드!”

시안이 전혀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 * *

“시안! 교수님 오셨어! 이제 그만해도 돼!”

“시안 아그리드!”

주변에서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모두 그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그 마음은 고마웠지만.

‘시끄러워.’

시끄러웠다.

지금 시안은 오롯이 고블린 킹 한 녀석에게만 집중하기도 모자랐으니까.

점점 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에르제와 알렌은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고요한 그곳.

집중의 세계.

오로지 나와 적, 두 존재만이 남아 검을 나누는 무음의 검투장.

―파직.

“크아아아아아!”

그 와중에도 검의 금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한번 금이 난 둑이 급속도로 터져 나가듯, 그의 검도 그렇게 깨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검이 깨지는 순간.’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스스로를 지킬 유일한 무기이자 유일한 방패인 검.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이니.

하지만 동시에.

‘그때가 가장 큰 기회다.’

그 순간만큼은 상대 역시 방심할 수밖에 없다.

방심이라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독과 같은 것이다.

제아무리 마음을 수양하고 투지를 다진다고 해도 미처 지울 수 없는 감정. 생물의 근저에 새겨져 있는 본능과도 같은 녀석.

검이 부러지는 순간, 고블린 킹의 그것이 불쑥 고개를 내밀 터이니.

그러던 직후.

쩌적! 쩌저적!

챙그랑!

기어이, 한계에 달하던 검이 부러져버렸다.

칼 조각들이 비산하며 반짝이는 햇빛을 난반사했다.

동강 난 검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단검이라 불러도 될 만한 짧디짧은 검.

“크카카카카!”

짧아진 검을 보며 고블린 킹이 크게 비웃었다.

아직 주변엔 놈의 적이 많이 남아 있다. 알렌도 있고 에르제도 있고 게일도 있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본능의 명령을 따라 승리의 환호를 질렀다.

“…….”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시안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파고들며, 짧아진 칼을 놈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그 검격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대기를 가르는 소리도, 팔을 휘두르는 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는다.

소리도, 기척도, 나아가 그것에 담긴 살기마저 사라진 검격.

‘이르기를.’

고요하기가 호수와 같으니,

깨달으면 그곳엔 붉은 바다뿐이더라.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순간,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과 같은 선이 그의 눈에 비쳐왔다. 그가 긋는 검로를 따라 공간의 위아래가 나뉘었고.

다른 절초였던 섬과 같은 폭발력과 스피드는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조용히 검을 긋는 어린 검사.

그리고.

―서걱.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줄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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