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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7화 (1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화

시안이 땅이 울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배는 될 법한 거대한 덩치. 울퉁불퉁한 거대한 철봉을 손에 들고, 허리춤엔 손도끼를 몇 개나 두르고 있는 녀석.

어깨에 새겨진 기이한 타투. 눈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 그리고.

전신에 묻어 있는 채 마르지 않은 핏자국.

시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블린 킹……?’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끊임없이 동족을 포식하여 마기를 축적해온 개체.

오래도록 영기를 쌓아온 동물이 영물로 거듭나듯, 오랫동안 마기를 쌓아온 마물은 본연의 한계를 넘어선다.

녀석은 단순히 고블린이란 카테고리에 묶을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녀석이 왜 여기에?’

시안의 눈빛에 의문이 차올랐다.

고블린 킹은 그레이트 힐의 중턱은 들어가야 나타나는 개체다.

절대 이런 초입에 나타날 만한 녀석이 아닌데.

‘안 좋은데.’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시안이 혀를 찼다.

“으으…….”

“끄으…….”

지금 이곳에는 온통 환자들뿐이다.

시안이 끙끙거리는 리위를 언덕 쪽으로 집어 던졌다.

괴롭히려고 한 것은 아니다. 고블린 킹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한 일이다.

이미 녀석은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시안, 저거…….”

에르제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안에게 물었다.

“고블린이긴 한데. 좀 센 녀석인 모양이야.”

“저게 좀 센 정도야……?”

“……좀 많이.”

그의 말에 에르제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그녀도 에버웨일의 학생이다. 고블린 킹에 대해선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뭐 녀석은 지식 이전에 외형만으로도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놈이었지만.

“크아아아―!”

고블린 킹이 철봉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포효했다.

구부러져 있던 것을 억지로 두드려 편 것 마냥 울퉁불퉁한 철봉.

무게만 해도 장난이 아닐 그것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는 것을 보고 에르제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 어떡하지?”

“글쎄.”

시안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적은 인원으로 고위급 마물을 만났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도망가는 것이다.

에르제는 은폐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도주가 쉬울 테고 시안도 스스로 몸 하나 뺄 자신은 있었다.

고로 도주는 99% 성공할 수 있을 테지만…….

‘이 녀석들이 문제군.’

땅에 엎어져 있는 8명의 학생들.

이 녀석들을 두고 갈 순 없었다.

“너는 일단 쓰러진 애들을 한곳에 모아줘. 잘 안 보이는 곳에.”

“시안 너는?”

결국 답은 정해져 있다.

뚜둑.

시안이 검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풀었다.

“싸워야지.”

그 순간, 시안의 검 끝을 보곤 고블린 킹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 * *

데릭 교수는 마물학의 권위자였다.

세상의 온갖 마물들의 습성과 행태, 버릇 등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연구자.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권위자라 불릴 정도로 대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데릭 이 멍청한 녀석! 너 때문에 사체가 전부 썩어버렸잖아! 당장 오늘 연구는 어떻게 할 거야!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직 일개 연구원이었던 시절.

그는 항상 동기들에게 비교당하던 이였다.

날카로운 식견을 갖추지도 못했고 실수만 연발했으며 지식 수준조차 동기들에 비해 높지 않았다.

유일하게 한 가지 책상머리에 붙어 있는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길었으나, 그것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학회란 곳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재능이 없는 성실함은, 그를 연구원까지는 올려주었으나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 돌을 주운 날.’

데릭 교수가 목에서 끌러 주머니에 넣은 붉은 돌을 흐뭇하게 만지작거렸다.

이 돌을 얻게 된 후로 그의 위치는 달라졌다.

마물을 조종하는 돌.

마물학 연구에서 그것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처음에는 실수가 줄어든 정도였지.’

말단 연구원으로서 해야 할 일 중 하나인 마물들의 관리.

광포하고 폭력적인 마물에게 먹이를 주고 적정한 상태로 컨디션을 유지하는 일.

가장 힘들고 실수가 잦아 구박을 받았던 그 일이 그렇게 수월해질 수가 없었다. 붉은 돌의 존재 하나로.

‘그 이후로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붉은 돌의 효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위험한 마물의 생태를 연구하러 갔을 때 남들보다 훨씬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가끔 보이는 이유 모를 마물의 행동을 밝혀내는 것이 몇 배는 수월했다.

모든 연구 과정에 있어서 그는 동기들을 앞지를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더 이상 말단 연구원이 아니었다. 동기들이 모두 지쳐 떨어져 가는 와중, 홀로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 경력과 권위를 인정받아 대륙 최고의 학교인 에버웨일에 초빙받았다.

동기들과 교수에게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던 자신이.

“흐, 흐흐…….”

모두 이 붉은 돌 덕분이다.

돈도 명예도 권위도 얻었다. 에버웨일의 교수라는 이름은 대륙의 그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 이름이다.

이제 딱 한 가지.

그의 인생에서 이룰 것은 딱 한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융 교관님.’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할 반려.

그의 눈빛이 꿈이라도 꾸듯 몽롱히 풀려왔다.

첫눈에 반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외모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있으면 편안했다.

화장과 분의 냄새로 가득한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융에겐 싱그러운 초목의 향기만이 피어올랐다.

멸시만을 받아왔던 자신에게 꾸며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여준 여성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잘 보이고 싶었다.

“알렌…….”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그 남학생이 밉다. 자신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가는 그에게 질투가 났다.

필시 태어날 때부터 승승장구만 해오던 인생이겠지.

‘그러니 한 번쯤은 실패해도 돼.’

그래야 균형이 맞는 것 아니겠는가.

고블린 킹에게 혼쭐이 날 알렌 크루거의 모습을 상상하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를 구하고 몸을 던져 학생을 구한 교수가 될 생각에 더더욱 즐거워졌다.

그러면 융 교관님도 조금은 더 나를 봐주지 않을까.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만 한 알렌이 아니라 그를 지킨 든든하고 듬직한 나를.

그래서 알렌이 습격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했는데…….

“뭐, 뭐야!”

언덕의 위에서 그가 언덕 아래를 바라보곤 소리를 질렀다.

고블린 킹이 누구와 싸우는 소리가 들려 단숨에 달려와 보니 이게 웬걸.

바라던 알렌이 아니라 웬 놈팡이랑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건…… 시안 아그리드?’

심지어 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번 기수 신입생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녀석. 엘리트만이 가득한 이 에버웨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망나니 소리를 듣는 남자.

아그리드의 첫째 시안 아그리드.

“왜, 왜 저 녀석이 여기에……!”

그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젠장. 알렌이 습격받았어야 했는데. 그래야 융 교관님에게 더 어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다.

여기서 고블린 킹을 뒤로 물리는 건 너무 이상하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선 가까이 가서 붉은 돌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알렌이 아닌 건 아쉽지만 시안이어도 상관없다.

시안이 위험한 순간에 난입하여 그를 구하자. 그리고 용맹한 자신의 소문을 널리 알리고 퍼뜨리자.

그런 생각에 그가 몸을 낮추고 언덕 아래의 전투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

놀랍게도 시안은, 광포화한 고블린 킹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급 기사, 하이나이트 둘이 달려들어도 불가능할 일을 단 혼자.

아니, 한 여학생의 서포팅만을 받으면서.

* * *

―쿠웅!

“응?”

“왜 그래?”

미세하게 울리는 땅의 진동을 감지한 알렌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게일이 그를 향해 물었으나 알렌은 그저 눈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방금 건?’

알렌이 눈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레이트 힐의 초입, 자신들이 있는 이 구역은 고블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고블린들은 절대 방금과 같은 땅 울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방금 것은 대체…….

‘가볼까?’

―화륵.

그의 내면의 불꽃이 뭐라 대답했다. 알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지랖이라고 하지 마. 혹시 모르잖아.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벌어졌을지.’

―화르륵.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널 불러내는 일도 불가능했을걸.’

―…….

까탈스러운 고대 정령이 침묵한 것을 보곤 알렌이 작게 웃었다.

툴툴거리는 것 같아도 결국엔 항상 고집을 받아주는 그녀였다.

“게일. 잠깐 어디 좀 가보자.”

“응? 어딜?”

“음…… 나도 방향밖에는 모르겠는데. 일단 움직여 보자고. 뭔 일이 있는 것 같아.”

“뭔 일?”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게일은 그저 의아해할 뿐이었으나, 이내 두말없이 알렌의 뒤를 따랐다.

고작 일주일 남짓 룸메이트였을 뿐이지만 그는 알렌이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게일과 함께 진원지로 향하며 알렌이 툭 얘기했다.

“별일 없다면 뭐, 조금 산책한 셈 치자고.”

* * *

“괜찮아 시안!? 별일 없어!?”

별일이 없진 않다. 고블린 킹의 철봉이 무섭게 그에게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까앙!

잘 쳐내는 데는 성공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흘려내는데도 손이 저릿저릿했다.

그 틈을 타 에르제가 뒤에서 놈에게 단검을 찌르려 하였으나, 그녀의 존재를 귀신같이 눈치챈 녀석이 허리춤에 있는 손도끼를 집어 던졌다.

“읏!”

그녀가 황급히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칼 끝자락을 자르며 매섭게 날아간 손도끼가 콰직, 나무에 틀어박혔다.

“…….”

무려 손잡이까지 틀어박힌 도끼를 보며 그녀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캉! 캉캉!

그런 고블린 킹을 시안이 정면에서 맞서고 있었다.

사실 시안이 힘으로 막는 것은 아니고 기술로 흘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어느 쪽이나 결국 마찬가지다.

그가 충분하게 버텨주고 있다는 얘기.

다만 버티는 것만으론 사태 해결은 되지 않는다.

“시안! 빨리 가서 교수님 찾아올까?”

에르제가 소리쳤다.

지금 현재 고블린 킹과 자신들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수가 필요했다.

그중 가장 좋은 수는 당연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괜찮아. 도와줄 사람이라면 곧 올 테니까.”

“뭐? 어떻게…….”

“그건.”

콰앙!

얼굴이 별게져 내려치는 고블린 킹의 철봉을 시안이 옆으로 몸을 빼 피해냈다.

동시에 그대로 놈의 팔을 그었다.

푸슉! 그리 깊진 않지만 놈의 어깨에 상처가 생기며 핏물이 튀어 올랐다.

“크어어어어!”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평소보다 조금 빠른 어조로 대답한 시안이 곧바로 고블린 킹의 공격에 대응했다.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지 녀석이 더욱 광분해서 철봉을 휘둘렀다.

그러나, 여전히 기술 하나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이었기에 힘이 조금 더 세졌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조금만 버텨.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공격 시도는 계속하도록.”

“응!”

차분한 시안의 지시에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까, 교수의 것인지 조교의 것인지는 몰라도, 감시용 사역마 한 마리를 죽였다.

그걸 조종하던 이가 뭔가 이레귤러를 감지했을 터.

그렇다면 곧 확인을 하러 올 것이다.

그게 시안이 믿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 싸워!?’

그 사역마는 데릭 교수의 것이었고, 교수는 진작 이 자리에 도착했다는 사실.

그는 지금 언덕 위에서 시안과 에르제의 분투를 관람하고 있었다.

언제 끼어들어야 자신이 가장 돋보일까 타이밍을 재면서.

‘왜 이렇게 늦어?’

그 사실을 모르는 시안이, 검을 휘둘러 고블린 킹의 철봉을 쳐내었다.

기이하리만치 강한 녀석의 힘을 마력을 두른 팔과 검으로 하나씩 대응하며.

검을 잡은 손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던 그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대로 아무도 안 온다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직접 놈을 쓰러뜨릴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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