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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6화 (1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화

해가 중천에 뜰 때쯤.

시안과 에르제는 이미 3군데의 고블린 부락을 토벌한 후였다.

그 결과 그들의 가방에는 일흔 개가 넘는 마석이 들어 있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곤 하지만 이만한 양이 쌓이다 보니 꽤나 묵직했다.

“하아…… 하아…….”

세 번째 토벌이 있던 직후 에르제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나름 수월히 성공했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락과는 달리 세 번째는 조금 힘들었다.

족장이 불덩어리를 만들어 날리는 주술사였기 때문이다.

그 덕에 이전번처럼 시안에게 제대로 어그로가 끌리지 않아 에르제도 몰려드는 수많은 고블린을 상대해야 했다.

“너는…… 안 힘들어……?”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시안을 보며 에르제가 물었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괜찮아.”

“체력 엄청 좋다…….”

그녀가 부럽다는 듯이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체력이 에르제보다 좋은 것도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고맙다.’

―우웅.

그는 라비의 힘으로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이 아니어서 그런지 회복력은 미약했고 스스로가 아닌 에르제를 회복시켜 주는 것도 안 되는 듯했지만.

그래도 당장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우리 엄청 잡았다 그치? 이 정도면 무조건 1등이겠지?”

“글쎄. 아직 모르지.”

“우리보다 많이 잡은 팀은 없을걸?”

아무리 실전 경험이 없는 그녀라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빠르게 3군데나 되는 고블린 부락을 터는 것이 말도 안 됨을. 자신들 같은 일개 학생이 말이다.

“미안. 나는 별로 도움도 안 됐는데…….”

“뭐 그렇긴 했지.”

“으…….”

에르제가 조금 풀이 죽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이었으니까.

“정 미안하면 나중에 밥이나 사.”

“그거면 돼?”

“그래.”

“어, 근데 귀족분들이 뭘 자주 먹는지 모르는데…….”

“난 아무거나 먹어.”

음식을 가리는 법 같은 건 배우지 않았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시안을 보며 에르제의 눈가가 조금 느슨해졌다.

이게 그 각종 폭행에 여자 문제에 약까지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망나니 시안이라고 누가 믿을까.

그녀 역시 어제까지는 시안을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직접 함께해 본 결과 오히려 소문 쪽이 말이 안 돼 보였다.

‘명문가의 아들이라 더 헛소문이 많이 도는 걸까? 경쟁 가문의 입김이라든지 그런.’

왠지 이야기책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스토리를 떠올리며 그녀가 상상했다.

어느새 처음 숲에 들어올 때의 경계심은 거의 사라진 그녀였다.

“출발하지.”

“응.”

잠시간의 휴식 후 두 사람이 다시 길을 떠났다.

그레이트 힐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그러던 중, 다음 부락의 흔적을 찾아 추적하던 한중간.

“오?”

“뭐야, 찾았어?”

“어 한 팀 있다.”

한쪽이 절벽으로 막힌 곳에서 그들 둘 앞에 다른 학생들이 나타났다.

총 8명. 묘하게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팀을 짰던 그 애들이군.’

팀을 짜서 함께 사냥을 하려고 하던 것 같던 아이들.

그런데 분위기가 묘했다.

시안과 에르제를 발견하고는 녀석들이 자기들끼리 슬쩍 눈짓을 나눴다.

그러고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

시안의 표정이 굳어왔다.

짐승의 귀와 꼬리가 달린, 자카르타의 학생 8명.

그들 모두 뽑지만 않았을 뿐 지금 당장에라도 무기에 손을 가져갈 기세였다.

쯧.

아무래도 팀을 짜서 사냥한다는 게 고블린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팀인가 봐?”

불온한 공기를 눈치채지 못한 에르제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일단 제쳐두곤 시안이 검을 뽑았다.

스릉.

스산한 소리에 옆에 있던 에르제가 움찔 몸을 떨었고 다가오던 학생들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아하니 대충 눈치 깐 모양인데?”

“쳇. 좀 쉽게 가나 했더니.”

“뭐 어때. 저긴 둘뿐인데.”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중 시안이 툭 얘기했다.

“이런 게 용납될 거라 생각하나?”

“얼씨구? 그 시안이 저런 소릴 한다고? 소메르에선 유명한 망나니라며?”

“자기도 쫄리나 보지, 크크.”

“교수님 말 못 들었냐? 마석만 많이 가져오라잖아. 마석을 꼭 고블린을 처치해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귀찮게 고블린 꽁무니나 따라 다니냐.”

팀을 짜서 사냥하려는 것을 보고 ‘애들치곤 영악한 생각이지만’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만, 아무래도 그것조차 과소평가였던 모양이다.

영악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날강도나 다름없었다.

용병왕국으로도 유명한 자카르타의 거친 풍습의 영향…… 이라고 하면 너무 일반화를 하는 거려나?

“감싸.”

그들의 리더, 리위 에르만이 손짓을 하자 학생들이 척척 시안과 에르제를 감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언덕을 등지고 포위된 상태가 되어버렸다.

“어? 어?”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꼈는지 에르제가 당황했다.

그녀는 무시한 채 리위가 시안을 향해 이죽이며 얘기했다.

“혹시 안 된다고 해도 뭐 어때?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라…….”

시안이 검을 움켜쥐었다.

이미 절대적인 우위를 확신하고 있는지 놈들은 무기를 보고서도 달려들지 않았다.

“확실히 들키지 않으면 별문제 없을 것 같기도.”

시안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향해서.

투둑.

“뭐 하냐 너? 무슨 의식이라도 펼치냐?”

그걸 보며 리위가 비웃었다.

학생들 사이에도 실소가 퍼져 나갔다.

그들의 비웃음 속에서, 진의를 아는 것은 오직 시안 혼자였다.

“와봐.”

방금 그 검격으로 땅속에 숨어 있던 땅쥐를 잡았다. 교수나 조교가 뿌렸을 사역마 중 하나.

이제 거리낄 것은 전혀 없었다.

* * *

검을 들고 서 있는 시안을 리위가 비릿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까짓 게 1위면 어쩌란 말인가. 여기는 자신을 포함해 8명이나 되는 인원이 있는데.

‘흠.’

그러고 보니 저쪽에도 한 명이 더 있었지.

그제야 에르제의 존재를 상기한 그가 시안의 옆에 움츠려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호오…….’

그가 눈을 빛냈다.

존재감이 너무 흐릿해 모르고 있었는데 막상 인식하고 보니 꽤나 귀여운 인상이 아닌가.

물론 자카르타의 귀족으로서 가볍게 여성과 추문을 만들고 다닐 수는 없지만, 그래도 소소한 해프닝 정도야.

그가 나름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얘기했다.

“거기 너. 괜히 말려들고 싶지 않으면 이쪽으로 와라.”

“…….”

그러나 훈훈하다 생각하는 건 본인뿐. 에르제의 눈에는 강도나 양아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가 시안의 팔 뒤로 살짝 몸을 가리도록 숨었다.

그러자 리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그놈 누군지 몰라? 아무리 신입생이라도 시안 아그리드의 소문 정도는 들었으리라 생각하는데.”

“지, 지금 나는 시안이랑 팀이야.”

에르제가 조금 겁먹은 어조로, 그러나 말을 흐리지 않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리위가 금세 얼굴을 구겼다.

“쳇.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년.”

그 표정을 보고 에르제가 확신했다.

저런 남자보다 시안이 100배는 믿음직스럽다.

더 얘기를 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안 리위가 두 사람을 향해 턱짓했다.

“잡아!”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창을 만지작거리는 리위를 두고, 나머지 일곱의 학생이 시안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7대2. 숫자만 보면 적당히 달려들어도 필승이겠지만.

그들은 시안에게 있는 1위의 반지를 경시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리고 함께 고블린 부락을 토벌하며 합을 맞춰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한 학생이 다른 이들에게 눈짓했다.

‘내가 먼저 간다.’

동료들이 수긍하는 것을 확인하곤 그가 주먹을 쥐었다.

그러곤 곧바로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취하더니, 그대로 땅에 주먹을 박았다.

쿠웅―!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크게 흔들리며 흙먼지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일대의 시야가 모두 사라졌다.

‘아무리 아그리드라도 이건 몰랐을 거다!’

시야가 없는 그 흙먼지 속을 그가 서슴없이 뛰어 들어갔다.

그 역시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두 사람의 위치를 정확히 꿰고 있었다.

맨발로 땅을 밟고 있는 그.

그 발을 통해 인근의 상황이 파동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여기!’

이윽고 그가 시안이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때까지 상대로부턴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승리를 확신하며 그가 주먹을 내질렀다.

그런데.

“……어?”

그의 시야를, 모래 먼지가 아닌 회색 기둥이 가득 메웠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가 하얘졌다.

대체 이게 뭐지?

―빠악!

그게 옆으로 세운 검의 면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땅바닥에 퍼질러져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 시안. 나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에르제가 그래도 분연히 일어섰다. 첫 실전에서 다른 학생들과의 첫 전투까지 치르게 되다니.

그녀가 몸의 떨림을 다잡으며 한 걸음 내디뎠으나.

“방해되니까 빠져 있어.”

“네, 넷!”

무서운 눈빛의 시안의 말을 듣곤 곧바로 얌전히 물러났다.

시안이 발바닥 전체로 지그시 땅을 지르밟았다. 그러곤.

[ 상천검(霜天劍) - 섬(閃) ]

파앙!

크게 일어난 돌풍에 모래 먼지가 단번에 흩어졌다.

화살처럼 쏘아진 그의 신형이 가장 앞에 있던 한 녀석을 강타했다.

“커헉!”

이걸로 두 녀석.

시안의 눈이 남은 놈들의 위치와 배치를 일순간에 훑었다.

‘나름 생각은 있군.’

아무렇게나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 효율적인 진형을 갖추고자 하는 의지는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막을 만한, 그런 완벽함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뒤쪽에 있던 리위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마, 막아!”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소리치는 리위.

학생들이 그의 앞을 막으며 시안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채채채챙!

시안의 검이 기이한 경로를 그리며 놈들의 무기를 모조리 튕겨냈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다섯 개의 공격을 막아낸 시안.

학생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지금 이 1합 만으로 시안과 자신들의 실력 차이가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들을 무시한 채 시안이 리위에게 붙었다.

다수의 적과 싸울 때는 무리의 리더를 노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이익!”

리위가 창을 휘둘렀다.

쇄도하는 창을 몸을 틀어 피하며 시안이 한 걸음 더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 둘의 간격은 충분히 좁혀졌다. 창이 불리하고 검이 유리해지는 그 간격.

거리의 이점을 가져온 시안이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빠악!

“커헉!”

첫 학생을 기절시켰을 때와 엇비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학생과 달리 리위는 기절하지 않았다.

기절하지 않게끔 시안이 손속을 두었기에.

“자, 잡아!”

“떼어내!”

반 박자 늦게 학생들이 시안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모두 소용없었다.

팍!

한 녀석이 칼자루에 명치를 가격당해 그래도 무너져 내렸다.

다른 한 놈은 목덜미를 틀어 잡힌 채 절벽까지 내던져졌다.

쿠웅! 등줄기부터 정통으로 부딪힌 녀석이 컥컥거리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는 동료를 보며 리위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젠, 장!”

바닥에 웅크린 리위가 떨어진 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시안의 발이 더 빨랐다.

캉!

그가 창을 저 멀리 차버렸다.

리위의 팔이 크게 움찔거렸다.

툭.

시안이 그런 리위의 복부를 발로 툭 건드렸다.

그냥 건드린 것이 아니다.

특성 던전에서 절벽을 오를 때 했던 것처럼 마력을 송곳처럼 세워서, 리위의 마력을 자극하기 위해 정확히 가격했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 정도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녀석은 수인이다.

선천적인 폭발력을 가진 수인의 마나.

“끄아아아아아!”

리위는 그것을 건드리는 시안의 마나를 채 밀어내지 못했다.

덕분에 몸 곳곳에서 마나가 터져 나가며 눈이 돌아갈 정도의 고통이 올라왔다.

“뭐 해애애애! 빨리 죽여어어!”

“어, 으응!”

“잠깐만 기다려!”

리위의 고통 어린 악바리에 남은 세 명이 다시 시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여섯으로도 실패한 걸 셋으로 성공할 리가 없었다.

한 녀석이 또다시 나가떨어지고 이제는 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시안이 침을 흘리며 꺽꺽거리는 리위를 잠시 내려놓고는 남은 둘을 쳐다보았다.

그가 다가가자 두 학생이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중 한 녀석이 어물쩍거리며 리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보기에 리위는 지금 이쪽에 신경 쓸 여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 잠깐만!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 외침의 의도를 다른 한 녀석도 재빠르게 캐치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시안이 다가오던 발을 멈추곤 두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자신의 말이 먹히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두 녀석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 우리 아버지가 금문에서 일하고 있어서……!”

“너도 잘 알 거 아냐. 이 바닥 은근히 좁은 거. 말 안 들으면 어떤 불이익이 갈지 몰랐다고!”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녀석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근데 너네, 왜 피해자인 척이지?”

그의 말에 두 녀석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

“무슨…… 소리야?”

“내가 약했다면 바닥에 기고 있는 건 나였겠지.”

“아, 아니, 그건…….”

“나중에 내가 항의를 하더라도 망나니의 악바리 정도로 몰아가면 무사할 거란 생각 아니었나?”

“…….”

“…….”

꿀꺽.

두 녀석이 침을 삼켰다.

무엇을 숨기겠는가. 정확히 그들은 시안이 말한 대로 행동할 생각이었다.

후일 항의가 들어와도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눈을 굴리는 녀석들을 보며 시안이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러곤.

빠악―!

두 녀석이 차례로 기절했다.

일격에 깔끔하게.

그렇게 마저 처리한 후 시안이 다시 리위에게 다가왔다.

“끄윽…… 끅…….”

오직 그만이 기절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시안이 허리를 굽혀 녀석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그때.

―쿠웅!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불청객이 등장했다.

그쪽을 돌아본 시안이 눈을 잔뜩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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