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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5화 (15/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화

화르륵!

청염의 수호자 알티마.

그녀의 푸른 불꽃을 두른 검이 마지막 고블린을 스쳐 지나갔다.

“키에…… 엑?”

비명을 지르던 고블린이 이내 눈을 끔뻑거리며 스스로의 몸을 보았다.

분명 검에 베였는데 베어지기는커녕 상처 하나 없었다.

착각이었나?

고블린의 단순한 머리는 그 이상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몸이 멀쩡하다는 것만으로 다시금 기세등등하게 푸른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탁.

소년이 검을 집어넣은 그때, 고블린 역시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는 듯한 영문 모를 표정으로.

“알렌! 그쪽은 어때?”

“문제없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룸메이트, 게일을 향해 알렌이 웃으며 얘기했다.

그의 발밑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고블린들을 보며 게일이 혀를 내둘렀다.

이 단기간에 잡은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 이상으로 소름이 돋는 것은 모든 사체에 상처 하나 없다는 점이었다.

“진짜 성능 확실하네, 네 불꽃.”

“뭐 그렇지.”

알티마의 불꽃은 평범한 불꽃이 아니었다.

온갖 삿되고 악한 것만을 징벌하는 정화의 불꽃. 최상위의 항마(降魔)의 특성을 지닌 불꽃이었다.

그 불꽃이 고블린의 육체는 내버려두고 내부의 마기(魔氣)만을 전부 태워버린 것이다.

“뭔가 그, 되게 묘하네. 피가 안 보여서 깔끔하긴 한데 좀 기괴하다고나 할까…….”

“……게일. 그런 말 하지 마.”

“아! 악담을 하려던 건 아냐. 기분 나빴으면 미안.”

“아니, 나는 전혀 상관없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

우리 둘 말고 사람이 어디 있냐며 게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에 알렌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런 소릴 하면 스스로의 불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고대 정령이 단단히 삐진다는 설명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야, 알렌. 너랑 같이 와서 좋은 거 하나 있다.”

“응? 뭔데?”

게일이 알렌이 쓰러뜨린 고블린의 몸에서 마석을 꺼내며 얘기했다.

“이거 봐봐. 마석 깨끗하다 야.”

마기가 싹 사라진 정화된 상태의 마석.

게일이 사냥한 고블린의 몸에선 아직도 마기가 풍겨 나오는 마석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비해, 알렌이 사냥한 고블린에게선 깔끔한 마석만이 나왔다.

지금 당장 마탑에 납품해도 될 정도로.

“정화비 아끼고 좋네.”

“하하하.”

게일의 너스레에 웃어주며 알렌 역시 마석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고블린은 뼈도 가죽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소재다. 마석 외에는 딱히 값어치 나가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마석 채취에 여념이 없는 두 사람을 근처 나무 위에서 다람쥐가 바라보고 있었다.

오도독.

도토리를 갉아 먹으며, 두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다람쥐가.

* * *

‘산에서 불이라니 제정신이야!?’

수풀에 숨어 있던 에르제가 불길을 일으킨 시안을 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그 대신 어그로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거처가 모조리 타버릴 것이라는 불안에 고블린이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키에에에엑!”

“키륵! 키키륵!”

불길이 고블린 부락을 향해 마구잡이로 뻗어 나갔다.

고블린들 중 일부가 불을 밟고 모래를 끼얹는 등 소화 작업에 투입됐다.

그리고 나머지 모두가.

“키아아아아악!”

불의 근원지인 시안을 치기 위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발이 가장 빠른 녀석이었다.

놈이 나무 막대에 돌을 엮어 만든 돌도끼를 시안을 향해 휘둘렀다.

‘……!’

순간 맞을 것만 같이 보였다.

원시적인 무기라고 하나 결코 경시할 것이 못 된다.

도끼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말라붙은 핏자국을 곁눈질하며 시안이 놈의 도끼를 흘려냈다.

캉!

능숙한 중심이동으로 도끼를 흘려낸다. 고블린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그가 검을 그었다.

촤악!

가슴에 사선으로 깊은 상처가 생기며 고블린 한 마리가 그대로 쓰러졌다.

“카악!”

“키아악!”

동료가 당한 것에 고블린들이 더더욱 눈이 돌아가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놈들도 첫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맞았다.

우르르 달려드는 고블린 무리를 상대로 시안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모조리 베어내었다.

‘우와…….’

수풀 속에서 에르제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았다.

달려드는 수십의 고블린들을 홀로 상대하는 시안.

문득 지난날 봤던 하얀 머리 여학생의 위용이 떠올랐다.

그녀와 그림은 전혀 달랐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홀로 전장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

“아.”

그러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눈에 기이한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에 그녀만이 볼 수 있는 검은 선이 펼쳐졌다.

‘힘내자.’

어린 시절, 마나를 각성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그녀의 능력.

그 선을 밟으니 그녀의 모습과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 속에 몸을 숨긴 채로 그녀가 고블린 부락으로 향했다.

몰려오는 고블린 무리를 피해 검은 선 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헉!’

그러던 중, 무리에서 약간 벗어난 고블린이 그녀와 부딪힐 뻔했다.

간신히 몸을 틀어 스치는 정도로 끝났지만 그녀의 가슴은 더없이 콩닥거렸다.

‘눈치 못 챘나?’

고블린은 시안을 보며 눈이 돌아간 덕분인지 스친 에르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본래라면 여기서 발각되었을 것이다.

이 능력은 적의 눈과 귀를 가려주지만 촉감까지 없애주지는 못한다.

시안이 저렇게 화려하게 날뛰고 있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작전은 실패했겠지.

‘후우.’

잠시 안도한 그녀가 다시금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빠르게 부락 안으로 진입했다.

부락 안에도 아직 남아 있는 고블린은 많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을 찾았다.

“크아아악! 악악!”

다행히 족장은 금방 발견되었다.

부락의 입구에서 뼛조각으로 만든 장식을 주렁주렁 걸친 모습으로 길길이 날뛰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잠시 몸을 숨기고 품속에서 단검을 뽑았다.

바깥으론 꺼내진 않고 그대로 품에 안은 채로, 거리와 타이밍을 쟀다.

‘선이 녀석 근처에서 끊겨 있어.’

때문에 마지막까지 몸을 숨기고 접근할 수는 없다.

다가가 일격을 가하는 그 순간. 그 순간만큼은 자신은 검은 선의 가호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기에 단숨에 접근해 일격에 숨통을 끊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줘, 시안!’

부락 바깥에서 혼자 고블린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안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그녀가 단검을 쥔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그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조급하게 움직였다가 족장을 놓치게 되면 그 고생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킥끽!”

“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고블린들이 부락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있다.

그 말은 즉 족장의 근처에 있는 고블린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뜻.

어느 선까지 줄어들자 그녀가 타이밍을 재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이내 족장 옆에 오로지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탓!

그녀가 뛰었다.

‘아직 모르고 있어!’

선 바깥으로 나온 그녀였지만 족장은 아직 그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키엑!?”

이윽고 족장이 기겁하며 뒤로 돌았을 때.

이미 그녀는 족장을 자신의 거리 안에 넣고 있었다.

그녀가 품속의 단검을 뽑으며 그대로 족장의 목을 그었다.

“키이익!”

‘얕아!’

그러나 조금 얕았다. 그녀의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

반대로 고블린 족장은 목에서 피를 뿜어내는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번이 첫 실전인 그녀와 그동안 수없이 전투를 치렀던 고블린 족장과의 경험의 차이.

족장이 도끼를 휘둘러 에르제를 공격했다.

옆에 있던 부하 고블린 역시 냅다 그녀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찍었다.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눈꺼풀이 일시에 급격히 무거워졌다. 사람으로서의 본능이 두 눈을 감기려 하고 있었다.

이 짧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많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눈을 감는지 감지 않는지.

앞으로 그녀의 삶을 결정 지을 분기점.

‘……안 돼!’

그리고 그녀는 감지 않았다.

억지로 부릅뜬 눈으로 고블린의 움직임을 전부 시야에 담았다.

상체를 틀어 두 도끼를 전부 피하고는, 다시금 검을 그었다.

푸슉!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았다.

‘다음!’

아직 끝이 아니다.

그대로 긴장을 풀지 않고 옆에 있는 고블린까지 마저 처리했다.

두 고블린의 시체가 그녀의 발아래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푸후!”

그것을 보며 그녀가 비로소 멈춰 있던 숨을 토해냈다.

스스로의 성과를 기뻐하며 단숨에 시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됐어, 시안! 나도 바로 도와줄…….”

그렇게 기뻐하며 돌아본 그녀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족장은?”

“어, 어어…… 처치했어…….”

돕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시안은 이미 모든 고블린을 처치한 후였으니까.

검을 수납하는 시안을 보며 에르제가 침을 삼켰다.

족장이 껴 있다곤 하나 자신의 아래에 고작 두 구의 사체가 쓰러져 있을 때.

시안의 아래에는 서른 가까이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 필요 없는 거 아냐?’

그녀는 진지하게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그레이트 힐, 초입을 넘어서 조금 더 깊숙한 곳.

녀석은 그곳에 있었다.

“그르르…….”

외양은 고블린과 닮았다. 하지만 보통의 고블린보다 2~3배는 더 큰 키와 전신을 덮고 있는 탄력 있는 근육은 도저히 평범한 고블린으로 보이지 않았다.

고블린 킹.

아주 간혹 나타나는 돌연변이.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마기를 쌓아 타고난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은 개체.

초입에 있는 동족을 포식하는 것만으론 더 이상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게 된 녀석이, 더욱 더더욱 깊숙한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앞에.

더벅머리를 기른, 허름한 복장의 인간 하나가 나타났다.

“차, 찾았다.”

고블린 킹이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앞을 막을 만한 녀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서 있는 자세도 어설프기 그지없었고 풍기는 기운도 시원찮다.

그런데 뭔 배짱으로 자신의 눈에 띄었단 말인가?

뭐 상관없나.

어찌 됐건 중요한 건 하나다. 지금 자신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

“크하아아아!”

녀석이 함성을 지르며 철창을 들었다. 그리고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콰직!

발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고통에 그가 눈을 찌푸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웬 짐승 한 마리가 발을 물고 있었다. 눈이 붉은 늑대가.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한 입 거리도 안 될 다람쥐가 겁도 없이 자신의 어깨를 물어왔고 거추장스러운 깃털을 뿌리며 새가 날아들어 마구 쪼아댔다.

“흐, 흐흐.”

그리고 그걸 좋다고 바라보고 있는 인간 놈.

고블린 킹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놈이 크게 포효하며 철창을 휘둘렀다.

대번에 들짐승들이 찢겨 날아갔다. 곤죽이 된 피와 육편이 허공에 흩날리며 후두두 몸을 적셨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혈향.

크륵.

그것에 더욱 큰 흥분을 느끼며 고블린 킹이 인간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당장에 저 건방진 인간 또한 찢어발기리라.

그런데.

“멈추세요.”

남자의 한마디에 그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블린 킹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나 녀석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짙은 핏물이 그의 눈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고블린 킹을 보며 남자가 혼자서 키득거렸다.

“흐, 흐흐흐……. 걱정 마세요, 알렌 학생. 죽기 전에는 구해주러 갈 테니까.”

꼴 보기 싫은 놈을 혼쭐도 내주고, 온 몸을 던져 학생을 구했다고 소문도 퍼질 테고.

그러면 융 교관도 자신을 조금은 달리 보리라.

정말이지 최고의 계획이다.

“카아…… 악.”

붉게 물드는 시야 속, 고블린 킹이 마지막으로 목격한 것은.

목에 건 붉은 돌을 흡족하게 만지작거리는 인간 놈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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