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4화
모든 신청을 거절당한 에르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정확히는 모두 거절당한 것은 아니었다.
2/3 정도는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당한 것이었고, 1/3 정도는 말을 걸어도 아예 눈치조차 채주지 않았다.
자신의 은폐의 기질을 띤 마나 때문에.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그녀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시안 아그리드.
“……!”
똑같이 짝을 찾지 못한 것 같은 시안을 보고는, 에르제가 홱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그녀가 다급히 주위를 살폈다.
“어, 어어…….”
아직 짝을 짓지 않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에이, 없을 리가 없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찾아보면 한 사람쯤은…….’
그녀가 빠르게 고개를 돌려가며 부지런히 사람들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와 그를 제외한 58명은 이미 모두 짝을 이룬 후였다.
“에르제, 맞지?”
그런 그녀에게 시안이 다가와 물었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네, 네! 마, 맞는데요……!”
“경어는 하지 않아도 돼. 에버웨일의 규칙이니까.”
“아, 으응…… 미안.”
에르제가 핼쑥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내 이름을 알고 있어?
세상에 그 시안 아그리드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이보다 공포스러울 수가 없었다.
“너랑 나밖에 안 남은 모양인데. 잘 부탁하지.”
“어, 응…….”
작게 대답하며, 에르제가 속으로만 가슴을 쾅쾅 내리쳤다.
항상 존재감을 흐리게 만들어 자신을 곤란케 했던 은폐의 마나. 근데 왜 하필 이럴 때는 발휘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가 마지막 조인가?”
그때 아직 숲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아 있던 조교가 다가와 물었다.
에르제가 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기서 뭐라고 외쳐봤자 뭐가 달라지겠는가. 어린애 떼쓰기라고밖에 생각 안 할 텐데.
그러는 사이 조교가 시안과 에르제의 이름을 착실히 서류에 적어 나갔다.
“잘해봐. 미리 말하지만 파트너가 낙오되면 같이 탈락이니까 서로 잘 보살펴 줘.”
“제가 보살필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녀도 에버웨일의 학생입니다.”
“오, 정신머리가 잘 박혀 있구만.”
그녀가 홀로 쭈뼛거리고 있는 동안 조교와 시안은 친근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었다.
설마…… 이미 매수됐어……? 원래부터 같은 편……?
에르제의 얼굴이 더욱 새파래지며 이상한 상상의 나래만 구름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에르제 후배.”
“예, 옛!”
그때 조교가 가만히 떨고 있던 에르제를 불렀다.
조교의 눈에 그녀의 핼쑥한 얼굴이 들어왔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초입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고, 교수님과 우리 조교들의 사역마가 잘 감시하고 있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네, 네에…….”
“행여나 사고가 일어날 일은 없으니까 안심해.”
조교의 말에 에르제의 안색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이것도 결국 아카데미의 수업인데 뭐 별일 있겠는가?
그보다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고블린 쪽이었다. 그녀는 몬스터를 실제로 보는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둘 다 열심히 하도록.”
“예.”
“네!”
조교가 떠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업이 시작됐다.
“추, 출발해 주세요!”
데릭 교수의 말과 함께 학생들이 하나둘 숲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지.”
“네, 네!”
“…….”
무심코 경어를 쓰자 시안에게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돌아왔다.
그녀는 벌써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민인 자신이 귀족한테 반말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것도 상대가 그냥저냥인 귀족도 아니다.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제국의 후작가였다.
“미, 미안.”
그래도 어떻게 애써 반말을 쓰자 그제야 시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가 저벅저벅 숲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에르제가 다급히 따랐다.
아까 조교의 얘기를 들었을 땐 든든하긴 했지만 막상 숲속에 둘만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다시 긴장이 되었다.
시안에 대해 끊이질 않는 소문 중엔 여자에 관한 문제가 많았는데…….
둘 사이에 흐를 수밖에 없는 어색한 기운.
에르제가 품속에 간직하고 있는 단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고블린에 시안에.’
양쪽 다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고블린은 최하위 마물이라며 다른 이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생전 몬스터라곤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겐 그것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물며 그런 고블린 사냥을 시안 아그리드와 함께하라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어이.”
“어?”
시안이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강제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시안에 대한 여러 소문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진짜로!?
에르제의 동공이 확장되며 입이 벌어졌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입으로 튀어 나가기 직전.
―파사사사사!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곳에서 나무줄기가 튀어 올랐다.
그 끝에는 덩굴로 만들어진 올가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에르제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시안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저곳에 매달렸을 것이다.
“고, 고마워.”
“조심해. 고블린이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곳에는 함정이 많으니까.”
“으응.”
함정을 재활용하지 못하도록 검을 휘둘러 덩굴을 자르는 시안.
그런 그를 보며 에르제는, 두려움 이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그래도 최대한 주의하면서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던 중이었는데도 함정이 있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그걸 한눈에 간파하다니.
소문에 대한 것과는 별개로 실력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이게 명문가의 힘이라는 것일까?
“가지.”
“응.”
나도 열심히 하자.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진정된 마음을 다잡으며, 그녀가 시안의 뒤를 따랐다.
* * *
첫 함정을 피한 후에도 시안은 모든 함정을 간파해 내었다.
그 결과 시안과 에르제는 누구보다 빠르게 숲속을 누빌 수 있었다.
“고블린의 함정은 위장은 교묘하지만 원리는 단순해. 지능 수준이 높진 않거든.”
“그래?”
“결국 놈들이 만드는 함정의 형태는 한정되어 있어. 형태가 한정되어 있다는 건 설치할 만한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지.”
“그것만 숙지하면 발견하기도 쉽다 이거구나.”
“대충은. 하지만 그것만 믿고 있으면 안 돼. 가장 좋은 건 자연적이지 않은 위화감 자체를 발견하는 거.”
“그건 어려워…….”
시안이 옛날 일을 떠올리며 에르제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몇 년 전, 실전 교육을 한다며 염노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 쏘다녔었지.
지금의 경험은 모두 그때 얻은 것이었다.
“……이쪽이야.”
시안이 조용히 숲에 남은 흔적을 살피더니 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 일이 길 곳곳에서 일어났다.
“방향은 어떻게 잡는 거야?”
“고블린은 부락에서 먼 곳에 일부러 많은 흔적을 남겨. 부락에 가까워질수록 흔적은 사라지고.”
“나름 위장하려고 하는 거구나.”
“반대로 함정은 부락에 가까워질수록 훨씬 많아지지. 함정이 많아지는 방향과 흔적이 사라지는 방향을 맞춰보면 부락의 위치를 알 수 있어.”
“와…….”
실제 경험을 동반한 그의 지식에 에르제가 감탄했다.
숲의 초입부터 이런 강의가 계속되다 보니 어느새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되어버린 그녀였다.
이미 그녀는 시안에 대한 두려움이 꽤 가라앉았다.
함정을 간파하고 적절히 방향을 잡아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
숲에 들어온 내내 보여준 그 모습에 지금은 두려움은커녕 경외심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
비슷한 상황에서 란이 시안을 사기꾼이라고 경계심이 올라간 것에 비해.
에르제는 그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낮아졌다.
애초에 그녀는 소문만 들어봤지 과거의 시안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까.
“보인다.”
그때 시안의 눈이 번뜩였다.
에르제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엔 어설프게 지어진 원시 형태의 부락 하나가 보였다.
고블린 부락이었다.
“벌써?”
“꽤 가까이 있었나 봐.”
두 사람이 커다란 나무 뒤에 쪼그려 앉아 부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규모는 어떻고 지형은 어떻게 생겼고 구조는 어떠한지.
그리고 동시에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너 은신 계열 능력 가지고 있지?”
“어? 어떻게 알았어?”
“보면 알지.”
시안의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각성한 마나가 은폐의 기질을 띠고 있던 것 때문에 그녀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보니까 은폐인 줄 알겠다는 이는 처음이었다.
적어도 또래 아이들 중에서는.
“내가 시선을 끌 테니까 네가 뒤로 돌아서 족장의 목을 따 와. 뼛조각이든 돌조각이든 이것저것 주렁주렁 달고 있는 놈이 있을 거야.”
계속되는 시안의 브리핑에 에르제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혼자 미끼가 되겠다고? 괜찮겠어?”
“네가 족장만 빨리 잡아주면 돼. 우두머리가 죽으면 남은 고블린은 그냥 오합지졸이니까.”
그녀가 침을 삼켰다.
확실히 작전은 간단하면서도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족장을 제대로 처치할 수 있을 때의 얘기.
‘내가 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안 된다. 자신이 실패하면 시안에게 피해가 갈 것은 자명한 일.
전장에서 무능한 동료는 그것만으로 죄악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곳은 아직 전장이라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교수와 조교들이 안전을 보장한 장소. 설령 사냥에 실패해도 쉬이 몸을 뺄 수 있는 곳.
이런 곳에서야말로 도전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해 봐도 될까?”
“얼마든지.”
시안의 말이 그녀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녀가 의지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근처 수풀에 몸을 숨겼다.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저벅.
그녀가 잘 숨은 것을 확인한 후 시안이 나무 뒤에서 나왔다.
스릉.
검을 뽑아 들며 검집을 적당히 던졌다. 바닥에 부딪힌 검집이 타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부락 입구의 고블린이 그를 발견했다.
“키이이익!”
고블린이 발광을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소란이라 부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 정도론 부족해.’
이것만으론 안 된다.
부락 깊숙이 숨어 있을 족장까지 화들짝 놀랄 정도로 시선을 끌려면 그냥 나타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시안이 부락의 입구를 살폈다.
주변에 모래밭도 있고 저 구조라면 크게 번질 일은 없겠군.
그걸 확인한 그가 짐에서 만약을 위해 챙겨둔 횃불을 꺼냈다.
정확히는 기름 먹인 천을 둘러둔 막대와 강철마탑에서 만든 점화용 F급 마도구.
그리고.
키잉―!
횃불에 불을 땡겨 부락 입구로 던졌다.
무척 건조했었는지, 부락의 입구에 있던 나무 구조물들이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열기가 치솟아 오르며 고블린들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산에서 불이라니 제정신이야!?’
수풀에 숨은 에르제가 그걸 보며 경악했다.
하지만 덕분에.
시선 끌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뿌우우우우우!
고블린 부락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