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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2화 (12/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화

‘융 교관.’

요정궁의 왕족들을 호위하는 수호성 출신이었다는 교관.

반요정들 특유의 저 짤막한 이름은 과거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영향이었다.

요정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혼혈의 반요정.

그 때문에 그들은 순혈의 요정들에게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의 이름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반요정들을 포용했던 것이 북쪽 대지의 원주민이던 살만족.

현재의 요정궁에 있는 반요정들은 모두 그들의 후예이다.

때문에 그들은 요정이 아닌 살만족의 이름을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반요정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론 인간, 살만족의 피가 더욱 짙기에.

단지.

‘그 한 모금의 핏줄로도 아직까지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 보이니.’

요정의 피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수백 년 동안 희석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요정들과 인간은 큰 차이가 난다.

마나의 형질은 말할 것도 없고, 식습관부터 해서 주거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상이 다르다.

“에계. 그것밖에 안 돼?”

“어, 어쩔 수 없잖아! 아직 학생이고…….”

“그러게 평소에 열심히 연공을 했어야지.”

“……네 차례 때 내가 지켜본다. 얼마나 나오나.”

뭐 그렇다고 해도 그들 역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다.

대화만 들어보면 보통의 인간 학생들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시끌시끌 담소를 나누며 그들이 하나씩 마나를 측정했다.

당연하게도 학생들이 피우는 빛은 교관의 것에 비하면 모래사장의 모래알과 같았다.

강의실을 모두 덮고도 모자랐던 그녀에 비해 학생들의 것은 자그마한 촛불이나 잘해봐야 모닥불 수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알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정령사도 똑같네.”

“그러게.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가 피운 빛은 무언가가 흐르는 듯한, 일렁이는 듯한 푸른색.

색깔은 독특했으나 크기는 다른 반요정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렌 학생…….”

다만, 그의 빛을 보곤 융 교관이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알렌을 불렀다.

교관인 그에겐 뭔가 다른 점이 보인다는 것일까?

“뭐 특이한 점이라도 있나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시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 않는 반응인데…….

뭐 그래도 위험하거나 부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게 알렌 크루거까지 측정을 마치고 마지막.

시안의 차례가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시안 학생의 차례죠?”

“예.”

시안이 교탁에 다가가 수정구슬에 손을 올렸다.

알렌의 차례일 땐 흥미진진이었던 학생들은 시안의 차례에서 귀신같이 흥미를 잃어버렸다.

인간 정령사라는 이유로 알렌의 측정을 보았으나 별반 특이할 것 없는 결과에 흥미를 잃은 것이다.

“그래도 열심히 연공했다 생각했는데…….”

“이것밖에 안 된다니 좀 반성하게 되네.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 더 찔려.”

스스로의 측정결과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 사이에서, 시안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어제 밤을 꼬박 새우며 기존의 마나를 모두 라비의 밤의 기운으로 치환했다.

염노와 함께 12년을 쌓아왔던 그 마나를.

―성취가 대단하십니다, 도련님. 제 어린 시절보다 훨씬 빠르신데요?

―그래?

―아마 또래들 중에는 이미 도련님을 따라올 이가 없을 겁니다, 허허허.

염노는 그리 얘기했었다.

시안은 그가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실감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저택에 갇혀 염노와 둘만 지내왔던 그는, 또래는커녕 사람들 자체를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으니까.

‘밤의 기운으로 바꾸면서 마나량이 늘어나긴 했는데.’

어제의 일로 마나량이 상당히 증가했다.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그 증가한 마나가 남들에 비해 어느 정돈지는 모른다.

이렇게 객관적인 지표로 마나를 비교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염노가 보증했던 자신의 성취는 남들에 비해 어느 정도 수준일지.

약간의 호기심을 안고 그가 수정구슬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수정구슬은 일절 빛나지 않았다.

“응?”

“뭐지?”

교관을 포함해 모두가 물음표를 띄우던 그때.

온 교실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수업이 끝나고.

“시안 학생.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융 교관의 호출에 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관의 뒤를 따라 교실을 나가는 뒤로 강의실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강의가 시작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술렁임이었다.

―대단…… 인간…….

―수호성…… 교관이…….

―설마…… 그래도 혹시…….

아까 전 마나 측정 때.

시안이 짚은 수정구슬이 피어 올린 것은 남들과 같은 환한 빛이 아니었다.

빛을 빨아들이는 어둠. 그것이 온 강의실을 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펼쳐졌다.

교관의 연녹색 빛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다른 학생들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히 시안도 놀랐었다.

설마 그 정도의 결과가 나올 줄이야.

그때부터 그를 보는 반요정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알렌의 눈빛 역시 처음과 달라졌다.

“대단하다! 검뿐만 아니라 정령까지!”

처음보다 세 배는 더 부담스러워졌다.

그런 학생들을 융 교관이 어떻게 달래어 수업을 진행했고 그것이 끝난 지금.

시안은 그녀의 초청을 받아 융 교관의 개인연구실에 도착했다.

잠시 후.

나무 탁자 위에서 반투명한 녹색의 작은 정령과 동그랗고 알 수 없는 검은 생명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바람의 정령 실레인과 흑정령 라비린스.

낯을 가리는 듯 우물쭈물거리는 라비를 보며 실레인이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잡듯 양손을 모으더니 라비를 향해 살살 흔들었다.

그것에 호기심이 끌린 라비가 실레인에게 조금씩 다가갔다.

이윽고 가까이 오자.

팡!

“웅!”

「꺄하하-!」

실레인이 활짝 손을 펼치자 바람이 작게 터져 나갔다.

라비가 화들짝 놀라더니 시안에게 다급히 뛰어들었다.

시안이 녀석을 달래듯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시안의 주위를 실레인이 꺄르르 웃으며 날아다녔다.

“실레인. 너무 장난치지 말렴.”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온 융 교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그러자 실레인이 쪼르르 그녀에게 날아갔다.

그녀가 찻잔을 시안에게 건네었다.

“감사합니다.”

시안이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술을 축였다.

꽤나 뜨겁다. 마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식어야 더 향이 올라올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잔을 다시 내려놓고 보니,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교관의 시선이 보였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그 아이가 시안 학생의 정령이군요.”

“예. 어둠의…… 아니, 밤의 정령입니다.”

시안이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어둠의 정령이라 하면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어둠 속이면 힘이 활성화된다.

하지만 라비는 그렇지 않았다. 밤에 더욱 기운이 증폭되었었지.

어둠이 아니라 밤이라는 시간대가 중요했다.

“그럼 밤에 측정하면 아까보다도 더 훌륭한 결과가 나오겠네요?”

“예, 아마도…….”

그 말에 융 교관이 더욱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측정 때 시안 역시 놀랐던 이유가 이거다.

마나 측정을 한 그 시간은 밤과는 거리가 먼 오전 시간대였다는 것.

낮이라 제대로 위력이 나오지 않는 그 시간에조차 그 정도라면 밤은 과연 어떻겠는가.

“대단하세요! 인간의 몸으로 정령과 계약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 정도라니. 그 아이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가문의 비고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문이라면?”

“소메르의 아그리드 후작가입니다.”

“아하. 시안 학생은 대단히 높은 신분의 학생이었군요.”

“……아니요, 그다지.”

자신은 그림자일 뿐이다.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단순한 말단.

꼭 그게 아니더라도 요정궁의 수호성이라면 후작가의 작위도 없는 어린 자식보다는 훨씬 위세가 좋은 자리다.

그녀 앞에서 신분으로 거들먹거릴 건 아니라는 소리다.

“후후, 겸손하기까지. 아니, 겸손이 아니라 분별이 좋은 건가요? 뭐 어느 쪽이든 훌륭한 학생인 건 변함없지만요.”

그녀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시안이 차를 마셨다. 딱 적당한 온도로 식은 덕분인지 향이 더욱 풍부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차의 여운을 잠시 즐기곤, 그가 물었다.

“그래서, 저는 왜 부른 거죠?”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차나 한잔 마시고 싶어서.”

눈도장이나 찍어두겠다는 뜻인가.

“혹시 바로 수업이 있나요?”

“오전엔 없습니다. 오후엔 실전 훈련 과목이 있구요.”

“실전 훈련이면 그거 하나로 오늘 하루는 다 가겠네요.”

“아마도요.”

본래 오늘은 오전엔 공강, 오후는 저녁까지 하는 실전 훈련 과목이 있다.

정령술 수업이 오전이라 다행이었다. 오후였으면 겹쳐서 신청하지 못했으리라.

실전 훈련은 모든 신입생이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이니까.

“아,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시안 학생?”

“뭐죠?”

“알렌 학생을 어떻게 보시나요?”

그녀는 평소와 똑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것은 입뿐. 그녀의 눈은 지금까지 중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예? 아, 그 뭐냐, 신입생 중에 둘만 소메르 출신의 정령사잖아요? 우리 같은 반요정들은 살아오며 적지 않게 정령사를 봐오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래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가 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시안이 생각했다.

거짓말이군.

어쩌면 이 티타임의 목적은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알렌에 대해 묻는 것이 본론이었을 지도.

‘같은 소메르 출신이니 내게서 정보를 캐내려는 모양이군.’

다만 아쉽게도 그가 해줄 수 있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정령술의 융 교관이 알렌 크루거를 신경 쓰고 있다, 그 사실을 머리에 새겨 넣으며 시안이 적당히 대답했다.

“좋은 녀석인 것 같습니다. 사교성도 좋아 보이고 상대를 잘 배려하는 느낌이더군요. 외모도 외모인 만큼 사교계에선 인기겠죠.”

“그, 그렇군요. 저…… 그 외에는…….”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사이라 아는 게 없군요. 가문 사이에 교류가 있던 것도 아닌지라.”

“그래요……?”

융 교관이 사뭇 실망한 눈치로 차를 홀짝였다.

그녀의 목적이 무산된 것에 대해, 시안은 딱히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왜 알렌을 신경 쓰는지 그 이유도 모르니까.

그 뒤로는 별것 아닌 잡담이 이어졌다.

주로 라비를 처음 만났을 때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는 그녀에게 시안이 말을 지어내 대답해주는 정도였다.

이윽고 차가 떨어지고, 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이 많네요, 다들. 고향과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

자리를 뜨려는 그에게 융 교관이 마지막으로 얘기했다.

약간 씁쓸한 어조.

그녀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리우면 휴가라도 내서 돌아가면 좋을 텐데.

“저택에 있을 때랑 별로 다른 것도 없습니다.”

시안이 대답했다.

저택에 있는 것이나 이곳 기숙사에 있는 것이나.

시안에겐 똑같은 것이다. 그 어느 쪽도 그의 진짜 고향은 아니었기에.

5살 이후로 그는 진짜 고향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안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교관으로서 마음이 놓이네요.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럼 이만.”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시안이 연구실을 뒤로했다.

* * *

“일주일 동안 심심했지?”

모든 신입생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실전 훈련 과목.

수업 시간에 정확히 맞춰서 들어온 테일 교관이 1반 학생들을 향해 얘기했다.

“너희들 대부분은 이미 가문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고 온 아이들일 거다. 그렇지 않으면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 너희들에게 지난 일주일은 정말 한가했을 거야. 좀이 마구 쑤셨을 테지.”

“…….”

“…….”

학생들 사이에서 침묵이 흘렀다.

한가하다니 전혀.

일주일간 행해진 이론 수업은 쉴 시간도 없이 빡빡했고 중간중간 실시한 간단한 체력 테스트는 말만 간단하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업이 끝나면 쉬는 시간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상위 랭킹을 노리고 결투를 신청했고 누군가는 그의 결투 신청을 받았다.

단련실에 짱박혀 쉼 없이 몸을 만드는 이도 있었고 부족한 이론을 복습하느라 여념이 없는 이도 있었다.

신입생 중에 근 일주일을 편하게 보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물론 테일 교관이 그걸 모르고 한 말이 아니다.

“일주일 동안 몸은 잘 풀어뒀을 거라 생각한다.”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그의 입장에선 몸풀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짜는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얼추 이곳 생활에 적응도 잘한 것 같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에버웨일의 ‘수업’이 시작될 거야. 그중 하나, 실전 훈련 과목의 대망의 첫 수업은.”

그가 긴장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실전 토벌부터 시작한다. 모두 무기는 잘 가지고 있겠지?”

긴장하는 학생들과 실전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는 시안.

그리고 30분 후.

신입생 모두를 태운 수십 대의 마차가 에버웨일 정문에 집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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