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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0화 (10/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화

시안이 흑정령과 처음 만난 것은 4일전, 첫 번째 휴식처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웅!?”

“뭐지 이건?”

손에 무언가가 닿는 감촉.

닿자마자 녀석은 화들짝 놀라더니 몸을 빼려고 했지만 그보다 시안의 손이 빨랐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

시안이 녀석을 붙잡고 얼굴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물론 그런다고 녀석의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흑정령 라비린스(Labyrinth)]

그 문자가 시안의 망막에 표시되었다.

처음엔 당황했다. 갑자기 시야에 무슨 문자가 나타나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이런 느낌의 마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얼마 안 가 문자가 보이는 것에는 침착할 수 있었다.

‘흑정령?’

어둠의 정령과 비슷한 건가?

뜻만 놓고 보면 그럴듯하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가 정령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것도 있었고 애당초 정령은 워낙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어둠의 정령, 그림자 정령, 밤의 정령, 겨울밤의 정령 등등 비슷한 놈들만 모아놔도 한 트럭이다.

흑정령이란 이름을 보면, 뭐 대충 저 녀석들의 동료 중 하나란 뜻이겠지.

“우, 웅! 웅웅!”

녀석이 파들파들 떨며 시안의 손에서 벗어나려 낑낑거렸다.

하지만 한 번 잡은 고기를 놓아줄 그가 아니었다.

도망치려는 흑정령을 강제로 붙잡고 시안이 감촉을 확인했다.

혹시 눈이라도 찌를까 봐 손바닥으로만.

‘형태는 원형인 거 같고…… 이건 귀인가? 털이 있는 느낌은 아닌데 폭신폭신하네. 뭔가 연기가 뭉쳐진 것 같은 느낌?’

동글동글한 몸체에 귀인지 뿔인지 모를 무언가가 솟아 있는 모습.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대강의 생김새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흑정령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혹시 이 녀석을 처치하는 게 시련의 클리어 조건인가?’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불길한 기운을 느낀 것일까?

흑정령이 움찔움찔거리며 시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흑정령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니. 아닌 거 같아.”

잠시 고민해 본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쓰러뜨려야 하는 마물이었다면 올라오는 도중에 등장하지 휴식처라는 곳에서 등장하진 않았을 테지.

무엇보다 녀석에게는 적대감도 없었고 위험한 마기(魔氣)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이곳에 살고 있던 놈이란 뜻이겠지.

자신의 심상세계에 살던 놈이라는 말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정확히는 내 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련이라고 하니까. 이 녀석도 그런 느낌으로 만들어진 녀석이겠지.’

그리 생각하며 시안이 녀석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관심을 끄고 벽을 두드렸다.

그가 마법사라거나 했다면 정령이라는 것 자체에 흥분할 수도 있었겠지만, 검을 쓰는 무인인 그는 정령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얼마간 쉬었으니 이제 다시 올라야지.

그가 벽을 짚고 체중을 실었다.

그때.

“우, 우웅!”

바짓가랑이가 당겨졌다.

시안이 의아한 눈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웅! 웅웅!”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방금까지와는 태도가 전혀 달라졌다.

무서워하며 최대한 떨어지려고 했던 녀석이 지금은 바짓가랑이에 얼굴을 비비면서 뭐라 뭐라 외치고 있었다.

잠시 아래쪽을 바라보던 시안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이 머리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서 반짝이고 있는 별빛.

그가 다시 흑정령 쪽을 바라보았다.

“데려가 달라고?”

“웅!”

녀석이 그게 맞다는 듯이 세로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 감촉이 옷자락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 그럼.”

딱히 깊은 고민 없이 시안이 수락했다.

어차피 올라갈 거 이 녀석 하나 데려가는 정도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자신은 손과 발 모두를 벽을 타는 데 써야 하니 녀석이 알아서 매달려야 하겠지만.

“웅!”

흑정령이 시안의 등줄기를 타고 쪼르르 올라왔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시안이 다시 벽에 붙었다.

다만 출발하기에 앞서 흑정령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 방해하면 바로 떨어뜨릴 거니까 알아서 해.”

“우, 우웅!”

그 말에 한창 기뻐하던 녀석이 흠칫거렸다.

아까의 공포가 다시 떠올랐다는 듯이.

* * *

그게 벌써 4일 전의 일이다.

녀석과 만나고 나흘.

아무런 사고도 없었고 오히려 등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흑정령의 능력 덕분이었다.

“허억…… 허억……”

시안이 벽에 가만히 붙은 채로 호흡을 골랐다.

열두 번째 휴식처로 향하는 길.

이번엔 간격이 조금 넓은 것인지 도중에 체력이 방전되었다.

“라비. 회복 좀.”

“웅.”

그의 말에 라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녀석을 중심으로 연기와 같은 무언가가 나와 시안의 몸을 감쌌다.

얼마 안 있어 그의 호흡이 서서히 진정되었다.

“후우…….”

한 번의 심호흡으로 컨디션을 어느 정도 되찾은 시안이 다시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빠르게 열한 번째 휴식처까지 주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라비에겐 회복 능력이 있던 것이다.

덕분에 절벽 중간에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면서 벽을 오르는 것이 훨씬 빨라졌다.

아마 녀석이 없었다면 중간에 체력이 다해 그대로 내려와야 했을 것이다.

“고맙다.”

“웅!”

라비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녀석이 가슴을 내밀고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질 않으니 상상력만 열일을 하고 있다.

참고로 라비란 건 녀석의 이름인 라비린스(Labyrinth)에서 따온 것이다.

“…….”

“…….”

시안이 묵묵히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둘 사이엔 별로 말이 없었다.

떠드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라비는 그가 말을 걸 때 말고는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

이전에 얘기한 방해하면 떨어뜨리겠단 말 때문인가?

“라비.”

“웅?”

“안 떨어뜨릴 거니까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도 돼.”

시안이 그리 얘기했다.

열한 번째 휴식처까지 오면서 라비의 도움을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런데도 계속 겁박을 하고 있는 건 잘못된 일이겠지.

“우웅.”

“별로 없어?”

“웅.”

그러나 라비는 고개를 저었다.

우려와는 달리 겁먹어서 다물고 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동료 의식이라도 싹튼 것일까?

그렇다면야 뭐.

더 거리낄 것도 없다. 시안이 마음 편히 절벽을 올랐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흘러.

열두 번째와 열세 번째를 거쳐, 그가 열네 번째 휴식처에 도착했다.

그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처음과는 다르게 부쩍 가까워진 별빛이 있었다.

“이제 조금 남았다.”

“웅…….”

라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건 긴장이었다.

다만 시안이 느끼기에 부정적인 느낌의 긴장은 아니었다.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에 훨씬 가까운.

그때쯤, 슬슬 몸이 기상하는 게 느껴졌다.

오늘 밤은 여기까진가.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

“웅!?”

“걱정하지 마. 내일 다시 올 거니까.”

폴짝 뛰는 라비를 보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낼 때마다 이렇게 놀라는 녀석이었다.

이대로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것일까.

“오늘은 여기까지야.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요 며칠 오르면서 계속 관찰했는데.”

“웅?”

“아마 내일이면 도착할 거 같다.”

“!”

라비가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어벙해졌다.

내일이면 저 빛에 닿는다.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안은 알 수 없었다.

‘라비는 라비고 나는 나다.’

그보단 자신의 일이다.

자신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벽을 올랐다. 시련을 클리어하려고 애썼다.

모든 것은 스스로를 단련(鍛鍊)하기 위해서.

‘시야를 봉인하고 암벽을 타는 경험은 신선하긴 했어.’

각종 단련법을 해왔던 그였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신선하다는 것은 곧 자극받는다는 것.

그리고 자극받는다는 것은 곧 성장한다는 것이다.

‘청각이랑 촉각이 좀 더 예민해졌다. 마력 배분의 연습도 되었고. 예전보다 마력을 더 가늘게 뽑아낼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어둠에 친숙해졌다.’

이 세상에 어둠 속에서 수직 절벽을 타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설령 불시에 시야를 뺏기는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시안은 얼마든지 대응할 자신이 생겼다.

그게 이번 단련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겠지.

“그럼 가볼게.”

“우웅…….”

내일 오겠다고 했는데도 아직 불안함이 남는 것인지 라비가 축 늘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안이 쓰게 웃었다.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 역시 라비를 데리고 돌아갈 수 있나 몇 번이나 시도해 봤지만 모두 안 됐었으니까.

“내일 보자.”

결국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몇 마디 말뿐.

내일을 기약하며 그가 던전에서 나왔다.

* * *

아득한 과거.

정신을 차리니 정령은 어둠 속에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지도 모른다.

이곳이 어딘지도,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이곳에 있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정령에게 보이는 것은 저 높은 곳에 있는 한 줄기의 빛뿐.

“웅.”

어느샌가 정령은 하늘의 빛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냥 부딪히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막 찢어지고 갈라졌다.

그것이 너무 아팠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정도로.

화아―

정령이 치유 능력을 각성한 것은 그렇게 몇 번을 더 다치고 난 후였다.

주변에 있는 어둠이 정령의 찢어진 몸에 스며들어 상처를 봉합하고 치료했다.

“웅!”

그 뒤론 거침없이 폴짝폴짝 뛰었다.

돌에 부딪치고, 찢어진 몸을 회복하고, 회복한 몸으로 다시 부딪치고.

그저 하염없이.

그러다 보니 부딪힌 자리가 닳거나 쪼개지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한 홈에 불과했지만 그건 정령이 이룬 성과였다.

그것에서 희망을 본 정령이 한층 더 벽에 몸을 받았다.

―퍼석!

하나의 홈을 만들고 그곳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조금 더 위쪽의 돌에 부딪혔다.

두 개째의 홈을 만드니 이제는 위쪽에 몸을 박을 때마다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떨어지는 충격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령의 회복능력은 그런 상처도 모두 말끔히 치료해 주었다.

비록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정령은 멈추지 않았다.

저 빛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더욱 큰 고통이었으니까.

―퍼석!

그렇게 하나씩 몸을 실을 공간을 만들며 정령이 빛을 향했다.

연약한 몸으로 단단한 돌을 부수는 것이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정령은 개의치 않았다.

저 위의 빛과 이곳의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정령에게 시간의 개념은 희박했다.

그렇게 오르던 어느 날.

꽤 널찍한 공간을 발견했다.

“웅!”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건 정령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처음 느끼는 감정은 동시에 처음 느끼는 절망도 불러내었다.

벽이 더 단단해진 것인지 아무리 부딪쳐도 닳지도 깨지지도 않게 된 것이다.

정령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주변을 살피며 더 약한 곳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나 없었다.

―더는 오르지 말라.

이 새까만 어둠이, 단단한 돌벽이, 그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눈물이 나왔다.

처음 다쳤을 때 이후로 두 번째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정령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 너머로 보이는 빛은, 야속하리만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조차 멈춰버린 것 같은 이 암흑의 공간 속에서 정령은 그저 하염없이 빛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

그가 나타났다.

“뭐지 이건?”

운명을 바꿔줄 존재가.

* * *

다음 날.

이른 저녁에 수련동에 찾아온 그가 평소와 같이 꿈의 시련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정상에 도착한 것은, 몇 시간가량이 지난 후였다.

“…….”

시안이 말을 잃었다.

드디어 도달한 정상.

그곳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빛의 바다였다.

화려하면서도 고결한. 밝게 빛나면서도 결코 눈을 아프게 하지 않는 따뜻한 빛.

예술이나 그런 쪽의 감성이 별로 없는 시안이 보기에도 그건 무척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끝은 이렇게 돼 있었군.”

“…….”

“라비?”

시안이 어깨 위에 있는 라비를 보았다.

라비의 겉모습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그랗고 폭신한, 귀인지 뿔인지 모를 무언가가 쌍으로 달려 있는.

그런데.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안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건 라비가 흘리는 세 번째 눈물이었다.

처음은 고통, 둘째는 절망.

그리고 셋째는 감동.

“우우…….”

라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풀려나와 시안의 팔을 감쌌다.

그의 오른팔, 손목 부근에서 따끔한 것이 느껴졌다. 어느덧 손목에 검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정령사의 각인.

[빛을 사랑한 그림자, 흑정령 라비린스(Labyrinth)]

그것은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련에서 얻은 소득 같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

하지만 시안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우우…… 우우…….”

그냥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작은 정령을 어깨에 얹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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