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화
심상세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그것의 정의는 잘되어 있지 않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며 경지에 오른 마법사나 무인들도 각자 자신만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한 가지로 정의를 내리자면.
사람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그 사람의 근원을 이루는 풍경.
혹은 현상이나 특별한 존재.
사실 심상세계라고 하는 것은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들 외에는 뜬구름 잡는 얘기일 뿐이다.
다만 그 경지에 이른 이들에겐 아니다.
마법사란 자신만의 법칙으로 세상의 섭리를 비트는 자.
경지에 오른 마법사는 스스로의 심상세계를 통해 현실을 뒤바꾼다.
무인이란 끝없는 단련을 통해 이상(理想)의 자신을 만들어가는 자.
경지에 이른 무인은 심상세계를 통해 그 스스로가 반신(半神)의 격을 일궈낸다.
그렇기에 시안도 호기심은 있었다.
하이마스터라니, 자신에게는 아직 먼 얘기다. 하지만 목표로 삼고 있는 경지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시안 역시 스스로의 심상세계란 것에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만.
‘생각보다 뭐가 있는 건 아니군…….’
절벽에 매달린 그가 손가락 끝에 마력을 집중해 저 위로 뻗었다.
잠시 더듬거리다 보니 작은 홈이 느껴진다. 그곳을 목표로 그가 손가락에 덧씌운 마력을 송곳처럼 가공했다.
그리고 약간 힘을 주자.
파사삭.
돌 먼지가 손가락을 타고 떨어진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들어갈 구멍이 생겼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하염없이 절벽을 오르는 시련이라…….’
바깥에서 보았던 팻말의 설명에 따르면 이게 자신의 심상세계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련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신의 심상세계라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일까? 그게 내 근원이라는 녀석이라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까.
‘일단 집중하자.’
상념을 머리 한쪽으로 밀어내곤 그가 팔에 힘을 실었다.
작은 홈에 손가락이 걸쳐 있을 뿐이지만 이 정도만 돼도 체중을 지탱하는 것엔 문제가 없다.
단단한 팔뚝에 힘줄이 불긋 솟았다. 등줄기가 꿈틀거리며 그의 몸이 쑤욱 상승했다.
발에도 똑같이 송곳처럼 가공한 마력을 씌워 벽을 팠다.
엄지발가락 하나만 간신히 걸칠 수 있을 만큼만.
“흡.”
보이지 않는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적당한 길을 찾아보고, 손과 발에 마력을 담아 돌벽을 파헤치며 지지대를 만든다.
얼마간 오르다 보니 얼추 요령이 잡혔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마력의 배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한 마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손이 다 들어갈 구멍을 팔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천장이 얼마나 높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지금 그렇게 했다간 중간에 마력이 방전될 우려가 있었으니까.
일단은 가능한 한 소모량을 줄이며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
최소한의 마력 배분에도 익숙해지니 그의 몸이 쑥쑥 올라가기 시작했다.
평소 훈련하던 때처럼 거의 달리는 듯한 속도로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움직임엔 막힘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그런 작은 공간에만 의지하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강풍이라도 부는 환경이면 모르겠지만 바람 한 점 없는 이곳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1시간…… 2시간…….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호흡이 가빠온다.
평소라면 2시간쯤 절벽을 탄 정도로 이렇게 지치거나 하진 않는데.
마력의 섬세한 운용을 병행하고 있는 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촉감만으로 오르고 있단 사실이 상당히 체력을 갉아먹은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올라봤다가 아무것도 없으면 다시 내려가야겠어.’
판단은 빨랐다.
지금까지 올라온 것이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빛은 아직 전혀 가까워지지 않았는데 이미 바닥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여기서 떨어졌다간 아무리 자신이라도 부상을 면할 수 없으리라.
그가 커다란 턱에 손을 걸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그가 손으로 더듬거리며 턱을 만져보았다.
지금까지의 손가락 한 마디조차 들어가지 않았던 홈과는 전혀 달랐다.
아예 벽 정도가 아닌 앉아도 될 정도의 널찍한 자리가 있었다.
‘쉬는 곳인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정말 체력도 마력도 간당간당하던 때였다.
그래서 일단 포기하고 내려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쉬는 공간이 있다니 더할 나위 없었다.
“후우…….”
그가 자리에 주저앉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중간……은 절대 아니군. 아직 별로 가까워지지 않았어.’
숨을 고르며 그가 위를 바라보았다.
단련한 그의 체력이 거의 다 소진될 정도로 올라왔다. 그런데도 저 위의 별빛까지는 아직 까마득했다.
얼마나 더 올라야 저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오늘 안에 끝내기는 요원해 보이는데.
꿈의 시련은 말 그대로 꿈속에서의 시련일 뿐이라 잠에서 깨면 쫓겨날 수밖에 없다.
뭐 그래도 설명에 따르면 다음 날 다시 이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다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쉬고 있을 때.
―우웅……!
“응?”
그의 손에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 * *
4일이 지났다.
그동안 신입생들 사이에 많은 결투가 있었다.
이 넓은 부지 어딜 가나 콜로세움 마법을 펼치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본래라면 이렇게 단기간에 신입생들이 결투에 빠져들진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란 때문이었다.
2위의 반지가 약한 이에게 넘어갔던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걸 계기로 많은 학생들이 결투에 재미를 붙여 버렸다.
그러나 정작 장본인인 란은.
“란, 2위에 다시 도전할 생각은 없어?”
“별로.”
그날 이후로 어떤 결투도 하지 않았다.
수련장에서 맹훈련을 하는 모습은 많이 목격되었지만 그녀가 결투를 하는 장면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반지 역시 아직 292위인 채였다.
그런 란을 두고 학생들이 떠들었다.
“4반의 유설이 가지고 있다던데.”
“아, 그 요정궁의?”
“저번에 잠깐 스쳐 지나갔었는데 진짜 개이쁘더라.”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이지만 유설의 이름을 모르는 1학년은 없었다.
2위의 반지를 가져간 4반의 에이스.
어쩌면 신입생 최강일지도 모르는 학생.
눈과 얼음의 마도사.
다만 그녀가 최강이 아닌 최강일지도 모른다고 한 것은 아직 최상위권 학생들이 서로 붙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란 역시 유설과 아직 싸워보지 않았고.
그래서 1반 학생들이 모종의 기대를 담아 란을 바라보곤 했었지만.
“난 1위 말고 관심 없어.”
란은 단칼에 그 눈빛을 내쳐버렸다.
그녀의 말에 학생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시안이었다.
시안이 이쪽을 힐긋거리곤 얘기했다.
“양보할 생각 없는데.”
“누가 양보해 달래? 내가 알아서 뺏을 테니까 신경 꺼.”
“……흥.”
란과 티격태격하는 시안.
그를 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그냥 집안만 믿고 까부는 건달, 절대 가까이하기 싫은 그런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거기에 놀라움이 조금 들어가 있었다.
왜냐면 4일 동안 무수히 많은 결투를 해왔음에도, 그의 손엔 아직 1위란 숫자가 굳건히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란도 졌다고 하던데…….”
“란이 졌으면 진짜 실력도 1등인 거 아냐?”
“아니, 하지만 유설이랑은 아직 안 붙어봤을걸.”
애초 시안은 거품이 껴 있다는 평가였다. 입학 성적이 좋았을 뿐 실전에선 나약한 놈일 거라고.
하지만 란이 자기 입으로 시안에게 깨졌다는 것을 밝혔다.
그 이후로 적어도 1반 내에서는 시안을 얕보는 이들은 없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유설한텐 안 되지. 걔 싸우는 거 봤냐? 상위권 애들이 죄다 도전했다가 손도 못 쓰고 나가떨어졌어.”
“야. 란을 이겼을 정돈데 걔한테 질 거 같아?”
“모르지 그건.”
누가 가장 강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뜨거워질 수밖에 없는 화제에 신입생들은 어디서든 그 얘기뿐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섞여서 스스로의 순위를 높이고 싶어 하는 학생들도 속속들이 나타났다.
테일 교관을 비롯해 교관들이 원하던 분위기가 이미 형성된 것이다.
그 소란 속에서 시안만이 한 발짝 벗어나 있었다.
애초에 1위인 그는 더 올라갈 순위가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요즘 그에겐 결투 말고 다른 관심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다음 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다 오르고 싶은데.’
꿈의 시련.
그것에 대한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4일 동안 꾸준히 올랐지만 아직 별빛까지는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다.
‘다음 주부턴 본격적으로 실전을 포함한 수업이 시작된다고 했었지.’
지금까지는 거의가 이론 수업이었다.
입학하고 첫 주는 그냥 적응을 위한 기간이라고.
그러나 다음 주부턴 다르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교내는 물론 교외로 나가는 수업도 많아진다던가.
그렇게 되면 외박도 많아질 테고 꿈의 시련에만 매달릴 수는 없게 되겠지.
어떻게든 그전에 클리어하고 싶었다.
“너 또 거기 가냐?”
교실을 나가려는데 란이 불쑥 그를 붙잡았다.
조금 나아졌다곤 하지만 아직도 시안은 반의 종기 같은 취급이다.
그런 그를 갑자기 불러 세우니 그녀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흠칫거렸다.
“어.”
“쳇. 열심히도 하는구만.”
“…….”
“왜 그렇게 쳐다봐?”
시안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편지는?”
“뭐?”
“내가 준 편지. 아버님께 전해줄 생각은 들었어?”
겐 아슬라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데.
“그럴 리가.”
그러나 란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시안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아직 자신의 인상은 많이 변하진 않은 모양이다.
요 4일간 꽤 많은 시선을 느꼈기에 이제 슬슬 마음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난 언제든지 괜찮으니까.”
“빨리 가기나 해, 쯧.”
란이 혀를 차더니 시안을 쫓아냈다.
먼저 말을 걸었으면서 꺼리는 화제가 나오자 바로 쫓아버린다니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시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떠나갔다.
그 자리엔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찌푸리고 있는 란과 몇몇 학생들만이 남았다.
“하아.”
“역시 란은 대단하네.”
“저 시안한테 그런 식으로 말도 걸고.”
시안이 떠나가자 란이 표정을 풀었다.
저 녀석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녀석 아니다, 그런 말이 무심코 튀어나오려 했지만 꿀꺽 삼켰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녀석은 녀석인데.
‘폭행범에 사기꾼까지 추가.’
그래 이건 녀석이 사기꾼처럼 그럴듯하게 연기를 잘해서 그런 것이다. 저런 교묘한 놈이었다니.
그런 생각에 란이 홀로 시안에 대한 경계를 올렸다.
절대 속지 말자.
“근데 란. 그건 무슨 얘기야?”
“뭐가?”
“아버님한테 편지를 전해준다든가 하던 그거.”
“응? 아~ 그거? 별일 아냐.”
란이 손사래 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시안과의 결투에서 졌다는 건 숨기지 않고 얘기했지만, 편지는 사정이 다르다.
편지에 대해 설명하려면 시안이 동생을 폭행했던 과거의 사건까지 얘기해야 한다. 동생의 명예와도 관련된 얘기.
그녀는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친구들 사이에서 멋대로 추측이 오가기 시작했다.
“혹시…… 가문 사이에서 무슨 얘기라도 오가고 있다든가?”
“나라가 다른데 그런 게 가능해?”
“당연히 가능하지! 저번에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특히 요즘엔 더 늘어난 추세라고 하던걸?”
친구들의 말에 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게 뭔데?”
친구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정혼 얘기지 뭐겠니?”
“뭘 당연한 걸 물어.”
“그러고 보니 란이 유독 시안한테만 툴툴거리는 것 같지 않아? 스스럼없는 느낌이랄까…….”
“아까 1위 말고 관심 없다는 게 혹시 그런 의미의 관심이라든가?”
한 명이 얘기를 시작하니 때는 이때라는 듯이 하나둘 말이 더해지며,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이 나이 때의 아이들에겐 달아오르지 않을 수 없는 화제다. 설령 상대가 시안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그런 거 아냐!”
그제야 알아들은 란이 한껏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거 알아? 외국의 가문끼리 결합되는 경우 있잖아, 그중 절반 정도는 에버웨일에서 눈이 맞은 거래.”
“정말? 하긴 여기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
“우리도 남 일이 아니라니까.”
“그 말은 즉, 역시 란도 시안이랑…….”
그러나 친구들은 이미, 당사자인 그녀를 빼고 잔뜩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 * *
<몽마의 심장 : 꿈의 시련>
시안이 꿈의 시련에 다시 들어왔다.
4일 동안 총 11개의 중간 휴식처를 올랐다. 하루에 거의 3개의 휴식처를 밟았단 얘기다.
하나의 휴식처를 오르는 데 거의 모든 체력과 마력을 써야 했던 걸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엔 이유가 있었다.
“웅웅―!”
던전에 들어온 시안을 반겨주는 녀석.
“그래, 또 왔다. 오늘도 저 위까지 올라가야지.”
“웅!”
[흑정령 라비린스(Labyrinth)]
손바닥만 한 검은 물체가 시안의 등을 타고 어깨 위까지 올랐다.
첫 번째 휴식처에서 만난 조력자.
흑정령을 대동하곤 그가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