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8화
식당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다.
300위의 반지를 가지고 있는 그녀, 에르제가 C세트의 메뉴를 받아 구석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타고난 마력의 기질 탓에 남들이 먼저 다가오지 않는 그녀다.
본인의 성격까지 소극적이었기에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래도 아직 첫날이니까!’
버섯 수프를 떠먹으며 그녀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 첫날이다. 머지않아 이 외톨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녀가 모두 먹은 식기를 치우고 식당을 나왔다.
그런데 식당 주변에서 한바탕 소란이 이는 것이 보였다.
“뭐지?”
한창 호기심이 많을 나이의 그녀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소란의 진원지로 향했다.
―으랴아아아아! 내가 랭킹 2위다!
―야 너! 다음엔 나랑 떠!
―새치기하지 마! 내가 도전할 차례야!
그녀가 수풀에 숨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터 주위에 몇 명이나 되는 생도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아직 팔팔한 이들이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떠들고 있었다.
그 손에는.
‘2위? 우리 반 애가 가지고 있던 숫자 아냐?’
란이 잃어버린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실 잃어버렸다기보다는 스스로 버린 것이었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좋겠다…….’
2위. 다시 말해 차석.
얼마나 감미로운가.
자신의 손에 있는 300이란 숫자랑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2가 150개는 있어야 겨우 300이 되는데.
‘나도 한번 도전해 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왔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쯤 도전해 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러던 중.
“……다음은 나랑 해.”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태양 빛을 반사하는 화사한 백색의 머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누가 설계라도 한 듯 가지런했고 새하얀 피부는 햇빛 한 점 쐬지 않은 듯했다.
너무 드세지 않게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그 안에 담긴 자줏빛 보석이 2위의 반지를 가진 아이를 응시했다.
제복 위에 걸친 살짝 비쳐 보이는 흰색의 천과 손에 든 부채가 그녀를 더욱 가녀려 보이게 만들었다.
“너, 너는?”
갑자기 나타난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은 미인의 모습에 2위의 아이가 말을 더듬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4반의 유설. 121위.”
유설.
그 짧고 간결한 이름과 창백할 정도의 새하얀 피부. 그리고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는 미형(美形)의 외모.
대륙 북쪽에 위치한 요정궁 빙하백령.
그곳 출신의 반요정이란 뜻이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순혈의 요정은 귀가 한 뼘 길이나 된다고 하지만 반요정인 그녀는 그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가 평범하다 하여 특유의 분위기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녀를 보며 잠시 침을 꿀꺽 삼킨 남자아이가, 121위라는 말에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걸로 되겠어? 내가 지금 운 좋게 2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전에도 57위였는데?”
“……필기에 약해서.”
“아 그래?”
남자아이가 새삼 꺼드럭거리며 얘기했다.
그 딴에는 멋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지만 별로 효과는 없어 보였다.
남자아이를 보는 유설의 눈은 시종일관 냉하기만 했다.
“좋아. 하자.”
남자아이가 쿨하게 수락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도전자의 새치기에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항의를 했지만 별수 없었다.
누구의 도전을 받을지는 챔피언의 권리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두 사람이 악수를 하자 ‘콜로세움’ 마법이 펼쳐졌다.
남자아이가 피식 웃으며 쿵, 땅을 밟았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그의 발아래의 땅에서 무언가가 울룩불룩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무의 뿌리였다.
“피부를 덮어주는 배리어가 있다지만 충격을 모두 흡수해 주진 않으니 조심하라고.”
상대가 생전 처음 보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용서 없이 때려눕힐 생각이었다. 그게 더 남자다움을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의 생각은 옳았다.
유설은 이 결투에서 결코 상대방이 봐준다거나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
땅에서 몇 개나 되는 굵은 뿌리가 솟아올라 그녀를 덮쳤다.
바닥도 허공도, 사방 모두에서 덮치는 전방위 공격.
수많은 학생들을 바닥에 눕힌 그의 능력. 자연마탑에서 직접 전수받은 마법이었다.
그걸 향해.
유설이 부채를 들어 허공을 그었다.
쩌정―!
그러자 모든 것이 멎었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덮치려던 역동의 뿌리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허공에 멈춘 나무뿌리들을 그녀가 부채로 톡 건드려 보고는, 여유롭게 그 사이를 걸어갔다.
“……항복?”
유설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다.
순식간에 하얗게 눈이 내린 콜로세움 안에서 남자아이가 멍하니 있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아직……!”
그가 다시금 발을 들었다.
뿌리가 모조리 얼어붙었어? 그럼 새로운 뿌리를 불러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에 다시금 땅을 구르려던 그는.
“어?”
움직이지 않는 발에 한 번 더 당황했다.
그의 발 역시 다른 뿌리와 같이 땅에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발을 감싸고 있는 배리어 채로 땅에 붙었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발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가 고개를 들자, 그를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동자가 보였다.
남자아이의 가슴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하, 항복.”
그렇게 결투는 끝이 났다.
두말할 여지 없이 압도적인 결과로.
<결투가 종료되었습니다.>
<‘121’ win>
<도전자의 승리로 순위가 뒤바뀝니다.>
유설의 손에선 2위의 반지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그 누구도 그녀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세상이 얼어붙는 듯한 위용을 눈앞에서 목격했는데 무슨 용기로 도전장을 내밀겠는가.
“후우.”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구야.”
그녀가 작은 고드름을 만들어내더니, 그대로 수풀로 던졌다.
파스락 소리가 나며 수풀이 헤집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탓인가?”
유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2위의 반지를 얻었으니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유설이 헤쳐 놓은 수풀, 그 바로 아래서.
‘다, 다다다 괴물들이야! 내 주제에 2위는 무슨! 절대 도전 안 해! 흑!’
에르제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 * *
그 시각.
시안은 고대 유적의 아티팩트가 있다던 수련장 바로 앞에 와 있었다.
그러나 바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의 주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꿈틀거리는 학생들 때문이었다.
“젠장…… 젠장…….”
잠시 행방이 묘연했던 2위의 반지만으로도 식당 공터의 그 사달이 벌어졌다.
대놓고 1위를 가진 시안에게 아무것도 없을 턱이 없었다.
그에게도 식당 앞에서부터 이 수련장에 오기까지 수많은 도전자가 붙었고, 그 모두로 길을 만들면서 이곳에 도착했다.
“괴물 같은 놈…….”
“양아치놈이 젠장…….”
“결국 다 혈통빨이야! 이래서 명문가란 것들은. 퉷!”
참패한 학생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을 쏟아내었다.
유설이 압도적인 결과로 2위를 얻어내었을 땐 그저 경외심뿐이었던 그 학생들과는 달리 시안에게 진 이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너무도 인간 같지 않은 위용을 보여준 유설과 다르게 시안은 목검으로 일일이 두들겨 팼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에게 있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망나니.
후작가의 수치.
아무리 아그리드 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딴 양아치 정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졌다.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 끝났으면 난 가보지. 너희들은 기절은 안 했으니 의무실까진 알아서 가.”
녀석들은 혈통빨이니 비전 검술을 익혀서 그렇다느니 뻗대고 있지만 말도 안 되는 분풀이였다.
그는 아그리드 후작의 아들이 아니며, 비전 검술은 쳐다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이 녀석들에겐 상천검도 쓰지 않았다.
란 정도로 강한 학생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덕분에 힘 조절을 잘못해 기절한 학생도 없었다. 끙끙거리는 놈들만 있을 뿐.
“나도 더 좋은 검술만 익혔어도!”
“분명 어렸을 때부터 영약을 퍼먹으면서 자랐겠지.”
“핏줄만 믿고 노력 같은 건 하지도 않는 녀석한테…….”
학생들이 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딱히 대꾸해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진짜로 영약을 퍼먹으며 자랐고 최상급의 비전을 익혔고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걸 원망만 하고 본인이 노력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딱 거기까지란 뜻이다.
불만이 가득한 학생들을 무시하곤 시안이 수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수련장이라기엔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밀폐된 공간. 벽을 따라 적당히 침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방 중간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주먹만 한 보석이 보였다.
묘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시안이 방 가운데로 가 보석을 살펴보았다.
‘이게 그 고대의 유물이란 녀석인가?’
시안이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작게 빛을 발하는 보석.
그 옆에 아카데미 측에서 적어놓은 팻말이 보였다.
<몽마의 심장 : 꿈의 시련>
시안이 그 아래 적힌 설명을 읽어나갔다.
꿈의 시련.
수련자의 심상세계를 꿈속에 구현하여 시련을 부여한다는 유물.
사실은 일종의 정신공격을 위한 것이지만, 공격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것이 아니어서 수련용으로 사용한다고.
‘무슨 시련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건가.’
개개의 심상세계는 모두 다르기에 그걸 기반으로 구현되는 시련의 내용도 모두 다르다고 한다.
설명을 모두 읽은 시안이 주변에 비치되어 있는 침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침대는 진짜 자라고 만들어 놓은 거였군.’
그가 쓰게 웃으며 마력을 일으킨 손으로 보석을 쓰다듬었다.
그의 마력을 받은 보석이 옅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빛이 시안을 감싸기 시작했다.
서서히 올라오는 수마(睡魔)를 느끼며 그가 구석에 있는 침대에 가 누웠다.
직후.
“여긴……?”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르다.
아무 광경도 펼쳐지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
충분히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내 심상세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련이라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그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다.
“빛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
바닥도 벽도 천장도 모조리 새까만 이 공간에서, 저 위에 단 한 군데.
별처럼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저기까지 올라가라는 얘긴가 보군.’
얼추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 외에는 이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이고.
그가 근처에 있는 벽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작은 별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에서 시안의 손끝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그 감각을 눈 대신으로 그가 벽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