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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7화 (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7화

<결투가 종료되었습니다.>

<‘1’ win>

<도전자의 패배로 순위 변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조용했다.

핵에 표시된 결투의 결과를 나타낸 문장. 하지만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시안과 란이 비치는 수정구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분명…… 시안 아그리드와 란 아슬라가 맞죠?”

“확실합니다. 그리고 시안의 승리로 끝났군요.”

“이렇게 빨리? 결투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들 역시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이들이다. 시안에 대한 소문은 그간 질리도록 들어왔다.

소메르에 단 둘뿐인 후작가의 가주, 삼강의 하이마스터 중 하나인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아들.

그러나 그 뛰어난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수련은 팽개치고 아비의 속만 썩이는.

용의 아래서 태어난 지렁이 나부랭이.

그런 녀석이 아슬라 가의 장녀를 이겼다고?

그것도 이렇게 손쉽게?

“테, 테일 교관님.”

데릭 교수가 테일 교관을 불렀다.

“시, 시안과 란은 둘 다 테일 교관님네 학생이죠?”

“맞습니다.”

“어, 어떻게 보시나요?”

데릭 교수의 말에 교관들 전부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래, 우리끼리 왈가왈부하는 건 영양가가 없다.

담임으로서 직접 그 둘을 만난 테일 교관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테일 교관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생각하냐라…….

잠시 고민하던 테일 교수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이런. 전 아직 업무가 남아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테일 교관님!”

“테일 교관!”

교관들의 외침을 뿌리치며 테일 교관이 재빨리 방을 나왔다.

드르륵. 문을 닫으며 그가 복도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나도 예상외라 모르겠는데 뭘 어떡해.’

그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수정구 너머로 단편적으로 본 결투 광경 정도로는.

하지만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았다.

시안 아그리드.

들리는 소문이 녀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 * *

오후는 완전히 자율 훈련의 시간이었지만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가도 되는 것은 아니다.

점호를 겸한 종례가 있었다.

부지 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1반 학생들이 하나둘 반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란! 혼자……가 아니네?”

교실에는 란과 시안이 먼저 와 있었다.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뭔가 데면데면한 분위기.

뭔가 있었나?

구석에 있는 시안의 눈치를 살살 보며 학생들이 란의 근처에 몰려들었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시안을 피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패악질이 심한 시안이라도 2위인 란에게까지 그러지는 못할 테니까.

그런 생각에 그녀에게 다가온 그들은.

“어?”

“란, 너…….”

“그거 뭐야!”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오전만 해도 분명 2위였던 그녀의 반지가 292위까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일이 있었어.”

란이 팔짱을 낀 채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순위가 대폭 떨어진 것이 부끄러워 이것저것 변명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깟 반지 하나 가지고 호들갑은, 그런 태도였다.

“아니, 그치만!”

“292라고?”

“누구야? 다른 반 애한테 뺏긴 거야? 아니, 그래도 200위대라니…….”

그녀의 가문을 아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 했고 그녀의 실력을 아는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했다.

다 둘째 치더라도 그녀는 호월족이다.

호월족의 사람이 거의 꼴등에 가까운 등수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뭐?”

“란 아슬라가 292위?”

“구라치는 거 아냐?”

하나둘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오며 소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구석에서 학생 하나가 새파래진 얼굴로 자신에 손에 끼워진 2위의 반지를 감추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녀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학생들을 조용하게 한 것은 종례 시간에 딱 맞춰 들어온 테일 교관이었다.

“그만 조용해라. 뭐 때문이냐, 2위 반지 때문에?”

“교관님!”

“어떻게 조용해요! 2위를 뺏겼는데!”

“아침에도 말한 것 같지만 반지의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명예직 같은 거지. 그러니까 그렇게 소란피울 것 없다.”

“하지만…….”

테일 교관에 말에 학생들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웅성거림이 완전히 잦아든 것은 아니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테일 교관이 폭탄을 던졌다.

“란이 끼고 있는 게 292위라는 건, 본래 292위였던 학생이 2위의 반지를 끼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군.”

“…….”

“…….”

그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2위를 가지고 있는 코델리아는 이젠 아예 새하얘져서는 손을 무릎 사이로 감추고 있었고.

학생들은 침을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어쩌면 이건 기회가 아닐까?

자신도 2위를 한 번이라도 달아볼 기회.

교관은 반지의 랭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계속 얘기하고 있다지만, 과연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명목상 보상은 없다고 해도 후일 귀족 사회에 나갔을 때나 기사단 따위에 들어갈 때 훌륭한 이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에버웨일 랭킹 2위 출신!’

‘이건 먹힌다!’

학생들의 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테일 교관이 그 분위기 변화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신입생들도 빠르게 이런 분위기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란 덕분에 하루 만에 달성한 것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이번 기수는 볼만하겠군.’

첫날부터 과감히 행동하는 란 아슬라. 그녀 덕분에 불이 붙은 학생들끼리의 경쟁.

그리고.

‘시안.’

그런 그녀를 이기고 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고고히 앉아 있는 아그리드의 후계자.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시안을 보며 테일 교관이 생각했다.

저놈은 대체 어떤 놈일까.

‘이번 기수 신입생 중에서는 가장 요주의 인물인 건 확실하고.’

그 베르페드 아그리드의 아들이란 것은 물론이고 소문과 실제 모습의 괴리감 역시 계속 눈에 밟히었다.

“자 그럼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끝이다. 따로 전달할 말은 없고.”

뭐 어찌 됐든 금일 수업 시간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 말을 하자 한창 열의를 다지던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수업 끝.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에게 그보다 달콤한 말이 어디 있을까.

‘수련동에 다시 가볼까. 그러고 보니 재밌는 수련장이 있는 것 같던데.’

시안 역시 방과 후의 일정을 짜고 있었다.

일전엔 샌드 골렘을 이용한 전투 훈련장만 해보고 왔지만, 그 외에도 흥미로운 수련장이 많아 보였다.

아마 대부분이 강철마탑에 의뢰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겠지.

그중에 하나 독특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고대 유적에서 나온 아티팩트를 이용한 수련장이라고 하던.

고대의 아티팩트라는 거창한 것까지 써가면서 무슨 단련을 하는 것인지 꽤나 궁금하지 않은가.

“식당에서 7시까지 저녁을 먹고.”

그런 와중에 테일 교관이 얘기했다.

끝난 것은 정규 수업뿐이라고.

아직 남은 것이 있었다고.

“그 후엔 야간자율훈련 시간이다.”

야간자율훈련 시간이었다.

“……예?”

“무슨 시간이요?”

“야간 훈련……?”

그 말에 학생들이 어벙해졌다.

아니, 밤에도 훈련을 한다고?

시안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보며 테일 교관이 피식 웃었다.

“설마 밤에는 놀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마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데 말이다.”

완벽한 정론에 학생들은 반론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 * *

밤이 되면 도시의 불이 꺼진다.

늦게까지 하는 술집 외에는 모든 사람이 생업을 중단하고 집에 들어가 쉬거나 잠을 청한다.

하지만 에버웨일은 달랐다.

마물은 밤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밤이 되면 더욱 날뛰는 녀석도 있다.

반면 사람은 밤이 되면 많은 것이 제한된다.

그 때문에 야간 훈련이 존재했다.

“몇몇 교관이 너희들의 훈련을 봐주기 위해 남아 있다. 야간 전투는 물론 색적이나 도주 등 과목은 나눠준 종이를 보면 알 거야.”

테일 교관이 나눠준 교관 목록을 보고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관님.”

“뭔가.”

“반드시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건가요?”

“하하, 그렇지는 않아. 어디까지나 자율 훈련이니까. 훈련이 별로인 학생은 따로 수련장을 이용해도 좋다. 몸을 만들어도 좋고 운동장을 달리는 것도 좋겠지.”

“……기숙사에 돌아가는 건 안 되나요?”

“그럴 리가. 돌아가서 쉬어도 된다. 네가 쉴 시간에 네 옆자리의 학생은 땀을 흘리고 있겠지만 말이다.”

“…….”

학생이 조용히 손을 내렸다.

아무리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눈치챌 것이다.

이것이 자율이란 이름의 강제인 것을…….

시안이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도 쉴 생각은 없었고. 훈련도 강제 참가가 아니라면 일정을 바꿀 필요는 없겠군.’

야간 훈련이라는 말에 처음엔 눈을 깜빡거리던 그였으나 설명을 들으니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자유시간이란 수련시간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럼 종례는 여기까지. 식사 맛있게 하고. 내일 보자 얘들아.”

그 말을 끝으로 테일 교관이 반을 나갔다.

교실에는 대번에 소란스러움이 돌아왔다.

주로 란의 주위에서.

“란. 내가 진짜 이상한 생각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 반지 누가 갖고 있냐?”

“란, 말해주지 마. 그냥 궁금하긴 무슨. 이번에 한 번 2등 반지 차보자는 생각 아냐?”

“뭔 소리야~ 진짜 호기심이라니까.”

“애초에 누군지 알면? 네가 이길 수나 있겠어?”

“그냥 한번 도전이나 해보자는 거지 뭐…….”

“…….”

시끌시끌한 학생들 사이에서 란이 벌떡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학생들이 한 발짝 물러났다.

그녀가 힐긋 시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교실 밖으로 향했다.

“란, 어디 가!”

“밥 먹으러.”

그런 그녀에게 몇 명의 학생이 따라붙었다.

란이 사라지자 남은 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2위 반지의 행방을 물어볼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모여 있을 이유도 없어진 것이다.

어수선한 교실을 두고 시안이 홀로 밖으로 나섰다.

탁.

그때 그와 부딪힌 학생이 있었다.

“아! 미, 미안!”

자신과 비슷한 묵빛의 검은 머리.

검은 머리는 대륙에서도 꽤나 드문 색인데…….

그녀가 새파란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시안이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상대가 살짝 떨더니 도망치듯 달려 나갔다.

‘저 여자…….’

방금 부딪혔을 때 살짝 보인 게 있었다.

‘쟤가 우리 반에 있다던 300등이로군.’

그녀의 손에서 빛나고 있던 300이란 숫자가 새겨진 반지.

300명의 신입생 중 꼴등을 의미하는 숫자가.

교관의 말에 딸꾹질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한편, 달려가는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심을 보이는 이도 없다.

‘꼴찌라면 그래도 좀 관심을 사게 마련일 텐데……. 그리고 방금의 기척도 그렇고. 기척을 죽이는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일순간 스쳤을 뿐이지만 똑똑히 느꼈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유령과 같은 그녀의 기척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만한 기척이었지만 그의 감각을 피해갈 순 없었다.

‘재밌는 능력을 가지고 있군.’

꽤나 독특한 녀석이다. 성격은 모르겠고 능력이.

그냥 그 정도의 감상만을 남기며 시안이 본관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저녁은 뭐려나.’

식사를 마치고 고대 유적의 아티팩트가 있다는 수련장으로.

그게 오늘의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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