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5화 (5/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5화

인간의 마나는 물과 같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웅덩이를 만들고 강을 이루며 이윽고 바다에 다다른다.

수인의 마나는 불과 같아 일순간을 불태우며, 반요정의 마나는 바람과 같이 자유로워 구속받지 아니한다.

그리고 거인의 마나는…….

<하이메이지 카니안, ‘마나의 형질로 보는 종의 역사’ 中>

* * *

“반지의 사용법은 잘 들었겠지.”

“어.”

시안과 란이 반지에 마력을 불어넣고는 악수를 했다.

본디 결투에 앞서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절차.

하지만 란의 손에는 경의가 아닌 다른 의미의 힘이 실려 있었다.

그녀가 당장에라도 시안의 손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피잉.

이내 맞닿은 두 사람의 반지를 통해 영역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반지에 담겨 있는 마법 ‘콜로세움’.

마도공학으로 유명한 강철마탑에서 에버웨일의 요청을 받아 제작한 결투를 위한 마법이다.

일정 영역에 장벽을 쳐주고, 결투 당사자들의 몸에 내구성을 가진 배리어를 쳐주며, 결투의 결과가 마법의 핵에 기록된다.

그 기록을 근거로 하여 반지의 랭킹이 변동하거나 유지되거나 하는 것이다.

“…….”

장벽이 제대로 펼쳐진 것을 보고 란이 자세를 취했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 한쪽 발과 주먹을 앞으로 뻗은 권사의 기본자세.

꼬리가 간을 보듯 천천히 살랑이고, 머리 위의 짐승의 귀는 시안의 심장 소리 하나조차 놓치지 않았다.

‘호월족.’

인간이나 반요정들에 비해 아득히 우월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자카르타의 수인족.

간단히 수인족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종류는 수없이 다양하다.

늑대 수인도 있고 고양이 수인도 있고 토끼 수인도 있고. 날개가 달린 새 수인도 있다.

그중 호랑이 수인인 호월족은, 다양한 수인들 중에서도 특히 강력하기로 유명했다.

호월족의 용병이라 하면 어지간한 평기사 정도는 상대도 못 할 수준이며, 그들을 이기기 위해선 최소 하나 이상의 격(格)의 차이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 호월족의, 평범한 용병도 아닌, 아슬라 가문의 딸.

대륙에 단 10명 있는 하이마스터 중에서도 상위로 평가받는 것이 아슬라의 가주 겐 아슬라다.

삼강 오중 이약에서 삼강(三强)에 속하는 이.

그 산군의 딸이라니, 과연 얼마나 강할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얘가 염노보다 셀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염노도 하이마스터는 못 되어도 마스터급의 마법사다.

산군 본인이면 모를까 아직 학생에 불과한 그녀가 그 정도일 리는 없겠지.

‘샌드 골렘보다는?’

염노 다음으로 그가 싸워본 상대는 전투 훈련장의 모래 골렘.

아무리 그래도 그 골렘보다는 강하지 않을까.

시안이 훈련용 목검을 들어 올렸다.

목검이라지만 철심이 박힌 묵직한 놈이다.

그걸 상대를 향해 겨눴다. 그러곤 한쪽 발을 내디디며 몸을 수직에 가깝게 옆으로 틀었다.

“?”

란이 시안의 자세를 보고 갸우뚱거렸다.

이전엔 보지 못했던 자세다.

뭐 애초에 그땐 시안이 일방적으로 맞았을 뿐이라 검술 비슷한 것도 보지 못하긴 했지만.

‘그동안 놀지만은 않았다는 건가.’

그녀가 웃었다.

그래봤자.

그 일이 있던 것은 고작 2년 전이다. 2년 가지고 얼마나 성장했겠는가.

심지어 그 망나니가 제대로 수련을 받았을 리도 없다. 대충 주입식으로 몇 수 배우고 말았겠지.

반면 자신은 그 2년간, 아니, 그 이전부터도 수없이 단련에 매진해왔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이 1위의 반지를 가져 마땅하다 생각했다.

적어도 저 망나니보다는.

“사내새끼가 쫄았냐? 빨리 오지 그래?”

“…….”

자세만 잡고 가만히 있는 시안을 향해 란이 도발을 날렸다.

그러나 시안은 묵묵부답.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란이 칫, 혀를 차며 살짝 몸을 뛰었다.

몸이라도 풀 듯 제자리에서 통통 뛰던 그녀가.

―콰과과과광!

거친 마나를 폭발시키며 시안을 향해 달려왔다.

오랜 세월 쌓아온 그녀의 마나가 사나운 범과 같이 날뛰었고, 그 짐승을 그녀는 완벽히 제어했다.

몸속에서부터 거친 파동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직후.

“뭣!”

란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접근해 주먹을 날리려던 그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녀의 목덜미에 시안의 검이 쇄도하고 있었다.

“……!”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히 사각을 찌른 완벽한 카운터.

힘도 속도도 호월족인 그녀보다 훨씬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보다 위협적일 수 없는 일격이었다.

일순간 드러난 빈틈을 정확히 찔러 들어오는.

다급히 막아보려 손을 들어 올렸지만 그조차 읽고 있었다는 듯 시안의 검이 그녀의 가드 사이를 정확히 뚫고 짓쳐 들어왔다.

그녀가 까득 이를 악물었다.

“큭!”

그녀의 신형이 저 멀리 날아가 장벽에 부딪혔다.

고작 이걸로 결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어나.”

그녀가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검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안의 눈빛.

적어도 첫수는 완벽히 그녀의 패배였다.

* * *

에버웨일 아카데미의 첫 수업 날.

오전은 신입생들에게 학교 부지를 안내하는 시간이었고, 점심 후부터는 전혀 수업이 없었다.

명문 중의 명문인 에버웨일. 학생들을 가차 없이 굴리기로 유명한 이 학교가 어째서 첫날부터 시간을 비워두었을까.

첫날이라고 일부러 배려를 한 것일까?

전혀 아니었다.

“테, 테일 교관님, 늦으셨네요.”

“서류 일이 조금 남아 있어서 마저 처리하고 왔습니다, 데릭 교수님.”

테일 교관이 도착했을 때 방에는 이미 몇 명의 교관과 교수들이 모여 있는 상태였다.

모여서 딱히 뭘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차를 마시면서 한쪽 벽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벽엔 학교 곳곳의 장소를 비추고 있는 수정구들이 놓여 있었다.

아무 곳에나 있는 것은 아니고, 광장이나 공터 같은 결투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들을 비추는 수정구.

이 장소가 콜로세움 마법의 핵인 방이었다.

“역시 아직은 별 움직임이 없군요.”

“아이고, 점심시간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체이사 교관님.”

“그건 그렇지만 말이죠. 예전의 학생들은 좀 더 패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뭐, 한번 지켜봐 봅시다.”

교관들이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은 신입생들의 결투 현황에 대한 일이었다.

반지를 통한 결투는 그 결과가 모두 이 장소에 기록된다.

더불어 이곳엔 교내 곳곳의 결투를 위한 스팟을 비추는 수정구도 있다.

그것을 보며 신입생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김에 각자 맡은 반에 대해 얘기도 나눠보고.

“테, 테일 교관님, 오전엔 어떠셨습니까? 1반엔 란 아슬라에 게일 터커에, 거기다 그 문제아까지 있잖아요?”

문제아라는 말에 테일 교수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릭 교수는 실실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테일 교수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문제아라면 시안 말입니까?”

“걔 말고 누, 누가 있겠습니까.”

습관처럼 말을 더듬는 데릭 교수의 말에 테일 교관이 아침 조회 때를 떠올렸다.

자신이 날린 경고 한마디. 그 한마디에 공손히 대답하던 그의 모습.

그런데.

“그 녀석…… 저를 관찰하고 있더군요.”

“예?”

“제가 교관으로서 어떤지 가늠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찐하게 쳐다보던데요.”

보통 신입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눈여겨보며 탐색하게 마련이다.

에버웨일에 입학할 정도면 각자 살던 곳에선 신동 소리 정도는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대륙 곳곳에서 긁어모아 한 자리에 놓은 것이다.

서로 탐색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런데, 시안이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건 또래 학생이 아닌 교관인 자신이었다.

또래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 그냥 사고 쳐도 넘어갈 만한 담임인지 살펴본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만…….”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제국에서 돌던 소문을 생각해 보면 그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테일 교관은 묘하게도,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괜히 민감하게 구는 것일 수도 있다만…….

<결투가 성립되었습니다. ‘2’ vs ‘292’>

그때 콜로세움의 핵이 반짝이며 문자를 출력해 내었다.

그걸 보고 교관들이 크게 놀랐다.

“이야! 2위면 걔 아닙니까? 호월족의 란 아슬라!”

“292위는 누굽니까? 처음부터 2위한테 덤비다니 배짱 한 번 마음에 드네요.”

“테일 교관님네 학생 아닙니까?”

“예. 코델리아라고 저희 반 학생인데…….”

들썩이는 교관들에게 얘기하며 테일 교관이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다. 코델리아가 그렇게 대담한 학생이었던가?

물론 코델리아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입학 서류와 첫인상만으로 대강의 성정은 유추해 낼 수 있다.

자신이 보기에 그렇게 배짱 좋은 아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그때.

<결투가 종료되었습니다.>

<‘292’ win>

<도전자의 승리로 순위가 뒤바뀝니다.>

시작하자마자 결투가 종료되었다.

그 결과에 교관들이 모두 침묵했다.

일반적인 상황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은 즉 일반적이지 않다는 얘기.

“292위가 상당히 힘을 숨기고 있던 게 아니라면…….”

“란 아슬라가 일부러 져준 건가요?”

“그렇겠죠.”

산전수전 모두 겪은 교관들은 곧바로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2위인 란 아슬라가 일부러 패배했다.

이유는 뭐 다양하게 있을 수 있었다.

2위의 반지를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앞으로 많은 이들이 결투를 걸어댈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 귀찮은 걸 피하기 위해 낮은 숫자를 갖고 싶었다든가, 뭐 그런 이유.

“그렇다면 코델리아란 학생도 딱히 배짱이 있어서 결투를 걸었던 건 아니게 되는군.”

“그건 아직 모르죠. 코델리아가 걸었는데 란이 대충 가져가란 식으로 나왔을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그 아슬라 가의 장녀가 이 정도였다는 건 실망이네요. 산군의 풍채를 생각해 보면 좀 더 열의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교관들이 한마디씩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서 테일 교관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데릭 교수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테, 테일 교관님도 실망하셨나요?”

“실망이요?”

“애써 데려간 차석이 햐, 향상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여서요.”

테일 교수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향상심이 없다느니 문제아라느니, 교수로서 학생을 향해 할 발언이 맞는지.

거기다.

“그럴 리가요.”

향상심이 없다는 그 말은 틀린 말이다.

오전에 테일 교관 처음 1반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살기를 느꼈다.

아직 어리기에 순수한, 그 마음을 채 숨기지 못하는 그런 기운.

그 살기의 진원지는 란이었고, 그것이 향했던 곳은.

“시안.”

“네?”

“결국 그놈이군.”

폭풍의 핵.

테일 교관이 그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결투가 성립되었습니다. ‘1’ vs ‘292’>

잠시 후 핵이 란과 시안의 결투를 알리었고, 그 둘의 모습이 수정구 중 하나에 비치기 시작했다.

2위가 일부러 292위로 순위를 떨어뜨린 후 1위에게 도전한다는.

수업 첫날의 유례없는 해프닝에 교관들이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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