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4화
반지에 빛나고 있는 <1>이란 숫자.
무슨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시안의 반지가 1학년 중 1위의 것이라는 얘기였다.
“교관님. 반지에 숫자가 이미 적혀 있는데요.”
한 학생이 손을 들며 질문했다.
“신입생들에게 주어지는 잠정 랭킹이다.”
“잠정이요? 혹시 이거…….”
테일 교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너희 입학 성적이야.”
시안의 반지가 1번인 이유였다.
“다만 잘 알다시피 입학시험은 필기와 간단한 체력 검정이 전부였지.”
그 말대로였다.
비록 필기는 제국 학회의 논문을 공부해야 할 정도로 심도 깊었고, 체력 검정은 그 종목만 수십 가지에 달하는 무식한 녀석이었지만.
어쨌든 필기와 단순한 체력 검정이긴 했다.
“그래서 잠정이라고 말한 거야. 입학 순위가 실제 전투 능력은 다르니까. 입학 초창기, 이 봄 계절이 가장 랭킹 변동이 많이 이루어지는 시기지.”
입학 성적이 좋다고 반드시 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입학시험은 필기와 체력 검정이 전부니까.
그러니 관심 있는 녀석은 한 번 열심히 해봐라.
테일 교관의 말에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버웨일에 입학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엘리트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제 막 17이 된 어린아이들.
이런 식의 커리큘럼도 시스템도 그들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것에 다소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도 잠시뿐이겠지.’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반지는 모두의 학교생활에 깊이 정착할 터.
테일 교관은 그 시간을 아주 조금 앞당겨 보기로 했다.
그가 몇몇 학생들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참고로 알려주지. 입학 성적 1위 시안 아그리드, 2위 란 아슬라, 9위 게일 터커. 잠정이라곤 하지만 10위권 내의 3명이 우리 반이다. 이런 반의 담임을 맡게 되다니, 난 참으로 축복받은 교관이구나.”
그 말에 웅성거림이 대번에 커졌다.
학생들이 두리번거리며 지금 불린 이름들을 찾아보았다.
그들은 금방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반지의 숫자는 얼핏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안에게 오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축복이라.’
란과 게일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대번에 모이기 시작했다.
자카르타나 빙하백령 출신의 아인들을 주로 란에게, 소메르 출신의 인간들은 주로 게일에게.
이미 벌써부터 이 반의 인간관계의 절반은 형성이 끝났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런 와중에 홀로 남은 시안은 자신만의 생각에 잠겼다.
방금 교관이 얘기했던 ‘자신은 축복받은 교관이다’라는 얘기.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무한경쟁을 교육이념으로 하며 학생들에게 이렇게 눈에 띄는 반지를 나눠줄 정도다.
이런 식의 교육을 하는 아카데미가 반과 담임의 배정을 주먹구구식으로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신입생의 반은 10개나 있다. 그중에 10위권 3명이 한 반에 몰려 있다?
우연이라 생각하는 쪽이 이상했다.
‘그 정도로 테일 교관이 대단한 사람이란 뜻인가?’
테일 교관의 우수함이 에버웨일 내에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는 뜻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론 오히려 1반의 학생들이 운이 좋다고 얘기해야 하리라.
그만한 평가를 받는 인물을 담임으로 두게 된 셈이니까.
그런 시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일 교관은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보며 시원스럽게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참고로 성적 꼴찌인 300등도 우리 반이야. 하하하!”
“히끅!”
농처럼 던지는 소리에 한쪽 구석에서 움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저건 상위권을 3명이나 쓸어간 것에 대한 소소한 페널티겠지.
그렇게 시안이 담임과 반에 대해 간략한 평가를 세우고 있을 때.
‘…….’
아이들의 중심에 있는 란이 슬쩍 시안을 곁눈질했다.
그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그날 오전은 따로 수업이 없었다.
교관이 인솔하는 에버웨일의 견학.
굉장히 넓은 데다 특히 수련동에선 설명할 것도 많았기에, 돌아보는 데만 오전이 꼬박 소모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점심시간.
건물의 뒤편에서 한 여학생이 겁먹은 듯이 뒷걸음치고 있었다.
“왜, 왜 그래?”
“야.”
그녀를 떨게 하는 원인.
금방이라도 주먹이 올라갈 듯 거친 분위기를 풍기며, 란이 여학생을 건물 벽으로 몰아붙였다.
“너 몇 위냐?”
“몇 위……?”
“반지 말야, 반지.”
“그게 그…….”
“쯧.”
“앗!”
우물쭈물거리는 여성의 모습에 란이 혀를 차더니 그녀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그녀의 반지에 새겨져 있는 것은 <292>라는 숫자.
상당히 하위권의 학생이었다.
그걸 보고 란이 씨익 미소 지었다.
“적당하네.”
“뭐, 뭐가? 나한테 왜 그래? 나 돈 없어…….”
란이 나름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여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부탁 하나만 하자.”
그러나 그 표정은, 여학생에겐 사악한 미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 *
“흠?”
시안이 움찔거렸다.
“이건…….”
그가 눈앞의 녀석을 바라보았다.
학생식당에서 파는 금일의 메뉴 중, B세트에 있던 포크커틀릿이었다.
‘맛있다.’
시안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염노의 배려 덕에 나름 고급진 음식을 먹어왔던 시안이다.
그런 그가 느끼기에도 이 커틀릿의 수준은 상당했다.
‘식당이 괜찮은 것 같아. 다른 메뉴도 많은 것 같고.’
삶의 질의 가장 기본은 양질의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있어서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후우.”
잘 먹었다.
시안이 일어나 식기를 치웠다.
왠지 지나가는 길마다 근처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학생들이 쭈뼛거리거나 켈록거리거나 그랬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시안이 식당 밖으로 나가 아카데미 부지를 가볍게 걸었다.
오후 수업까지 30분도 넘게 남아 있다.
그 시간 동안 소화도 할 겸 산책이나 하다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곳이 내가 3년간 지낼 장소.’
그가 조금은 감명받은 눈으로 곳곳을 둘러보았다.
가장 넓고 눈에 띄는 수련동은 물론이고, 산천초목이 널찍이 나 있는 광장도 있었다.
운동장도 몇 개나 있었는데 운동복을 입고 무작정 뜀박질을 하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그리고 그 모두를 내리쬐는 따스한 햇빛.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염노와 둘이서 작은 저택에서 지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그도 인간인지라 조금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10분쯤 돌아다녔을까?
“여기 있었냐.”
누군가가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란이었다.
“란 아슬라.”
“이제 기억났나 보지?”
“같은 반이니까.”
같은 반이니까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대답에 란이 불쾌한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기억을 잃은 건지 그런 척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샨이란 이름을 듣고도 모르겠냐?”
샨 아슬라.
그녀에게 있는 세 명의 동생 중 가장 큰 동생의 이름이다.
어머니는 어릴 적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오로지 수련밖에 모르는 사람.
육체의 강함을 추구하는 수인족에게 있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샨에게 있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샨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제대로 된 수련을 하지 못했으니까.
다른 가족들이 수련에 빠져 사는 동안, 샨을 돌본 것은 그녀의 누이인 란이었다.
“샨…….”
“기억나나 봐?”
도련님에게서 얼핏 들은 적이 있던 것도 같았다.
뭐랬더라…… 건방진 새끼 하나가 기어올라서 쥐어 패주고 왔다고 했던가.
분명 자카르타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후의 일이었다.
그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
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 뒤의 이야기였다.
“그렇게 처맞아놓고 까먹다니 태평하기도 하다.”
어느 날 산책을 나갔던 샨이 다쳐서 들어왔다.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던 여행자를 말리려다 역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 동생이 절뚝거리며 들어오자 란은 대번에 열이 머리끝까지 올랐고.
당장 그 여행객들에게 쳐들어가 사과를 요구했다.
그때의 그 여행객, 시안 아그리드의 표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사과? 아~ 해줄 수 있지. 오늘 밤에 내 침실로 오면 사과 많이 해줄게. 어때?
뱀과 같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과 몸을 훑던 녀석의 눈빛.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쏘아붙였다.
―넌 말로는 안 되겠구나?
그 길로, 그녀는 시안을 자근자근 밟아주고 돌아왔다.
뒷일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소메르의 인간이 자카르타에서 먼저 선빵을 쳤으니 갚아주는 것이 당연했다.
“…….”
그 모든 얘기를 듣곤, 시안이 눈을 찡그렸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아마 본래의 도련님은 자신이 맞았다는 얘기는 입 밖에 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주가 알게 되면 감싸주기는커녕 불호령만 떨어졌을 테니까.
그래서 자신도 이 일화를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이다.
‘쯧.’
시안이 속으로 혀를 찼다.
죽은 이를 모욕하고 싶진 않지만 여기저기 사고를 쳐놓은 것을 보니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뭐 애초에 정 같은 건 붙인 적도 없긴 했지만.
“미안하다. 그때 일은 정식으로 사죄하지.”
“하, 사과는 무슨. 그냥 적당히 씨불이는 거 모를 줄 알아?”
“…….”
그건 아냐.
라고 말해도 지금은 듣지 않겠지.
결국 사람이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망나니 도련님의 탈을 쓰고 있는 지금의 자신에게 그 한계를 넘기란 무척 힘든 것이었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시안에게 란이 쏘아붙였다.
“됐고, 너한테 사과 들으려고 온 게 아냐. 난 이것저것 재는 거 싫으니까 확실하게 얘기하는데. 너 같은 쓰레기가 1위라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녀가 앞주머니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등허리까지 늘어놓았던 금색의 머리를 하나로 틀어 묶었다.
“너 나랑 결투해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손에서 잿빛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곤 시안이 조금 놀랐다.
<292>
“너…… 2위 아니었냐?”
분명 란은 2위였다.
아침에 교관의 입으로 들었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뭐지?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애초에 우월한 신체 능력을 지닌 수인족, 그중에서도 특히 강하다는 호월족의 학생이 292위란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시안이 놀라는 듯하자 란이 코웃음을 치며 얘기했다.
“아까 바꿔왔어. 2위의 반지를 가지고 널 이겨봤자 너는 겨우 2위로 떨어지는 것뿐이니까.”
교관은 얘기했다. 도전자가 이기면 서로의 순위가 맞바뀐다고.
란은 그 설명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하위권 학생에게 일부러 패배하여 292위를 넘겨받고 왔다.
“나한테 지고 저 아래로 처박혀라.”
모두가 이 결투를 위해서.
짜증 나는 시안 아그리드를 하위권에 박아버리고 싶어서였다.
맹수와도 같이 갈라진 금빛 눈동자가 시안을 향했다.
시안이 검을 뽑았다.
“……란 아슬라. 미안하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다. 내게 그 일에 대한 기억은 없다만, 아마 네 말은 진실이겠지.”
“그래서 뭐. 속죄의 의미로 얌전히 처맞겠다고?”
“아니.”
그는 걸려온 도전을 거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거랑 결투는 별개라고.”
그리고 질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