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2화
입학식이 있기 며칠 전, 드넓은 벌판.
그곳에서 난 관도를 따라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튀지 않는 투박한 마차. 하지만 그 누구도 마차를 무시하지 못했다.
마차에 걸려 있는 두 개의 깃발.
인간제국 소메르를 뜻하는 황금의 탑의 깃발과 아그리드 후작가를 뜻하는 창공을 가르는 검의 깃발을 보고도 그걸 무시할 간 큰 이는 없었으니.
“도련님.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마부석에서 손수 말을 몰던 염노가 얘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마차 내부에 있는 시안에게 확실히 전달되었다.
이 정도 간단한 마법이야 염노에겐 숨 쉬듯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애초에 마법이라기보단 간단한 마력의 운용 수준이었고.
‘조금 있으면 에버웨일.’
창밖의 벌판을 바라보며 시안이 등을 기댔다.
대륙 정중앙에 위치한 중립도시 에버웨일. 그리고 그곳에 있는 동명의 아카데미, 에버웨일 아카데미.
조금이라도 대륙의 지리를 배운 이에게 대륙 전도(全圖)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누구나 가장 먼저 네 군데의 땅으로 구분할 것이다.
동쪽, 인간의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 소메르.
남쪽, 다양한 수인족들이 연합하여 통치하는 용병왕국 자카르타.
북쪽, 요정들의 피가 섞인 반요정들이 터를 잡아 세운 요정궁 빙하백령.
그리고 서쪽.
마수 외엔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거인들의 무덤.
에버웨일 아카데미는 이 네 영역이 맞닿는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평화의 상징.’
중립도시 에버웨일과 그곳에 위치한 에버웨일 아카데미는 대륙에 있어 평화의 상징이다.
과거 종족을 가리지 않고 싸워대던 인간들과 아인종은, 하나를 계기로 뭉치게 되었다.
거인들의 준동.
공동의 적을 가진 후에야 겨우 합심할 수 있던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모든 거인의 목을 베었다.
그러곤 승리의 증표로 하나의 학교를 건립했다.
후손들이 다시는 이전과 같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기를.
그리고 거인들의 시체에서 태어나는 마물(魔物)들에게서 그들의 가족과 터전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처음으로 가문에서 벗어나 발을 내딛는 장소.’
이곳에서 모든 것을 흡수할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욱 힘을 기르고, 그 힘을 기반으로 아그리드 후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그게 현재 시안의 목표였다.
‘이곳에서부터 시작이다.’
마차의 창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융성한 도시의 정경.
그것을 바라보며 시안이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살아남겠다.
12년 전, 사고를 당한 그 날 이후로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다짐이었다.
* * *
아그리드 후작가의 문양을 달았다지만 마차는 검문을 피하지 못했다.
이곳은 소메르의 황실의 문양을 달고 있는 마차도 검문을 받아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것 따윈 없으니 무사통과.
마차는 딴 길로 새지 않고 그대로 에버웨일 아카데미로 향했다.
“여기서 내리지.”
아카데미 부지에 들어오고 얼마 후, 시안이 얘기했다.
제국 대귀족의 자제로서 모자람이 없는 말투.
그저 그림자일 뿐인 그였지만 그 몸에 익힌 교양은 예법에 까다로운 염노도 흡족해할 수준의 것이었다.
“기숙사까지는 조금 남았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잠깐 걷고 싶어서.”
“알겠습니다.”
그리 얘기하자 염노가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고 마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내리자 저 언덕 위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4채의 건물.
모두 에버웨일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기숙사였다.
“기숙사가 꽤 크군.”
“천이 넘는 학생들을 수용해야 하니 그럴 수밖에요.”
어느새 마부석에서 내린 염노가 시안에게 다가왔다.
시안이 언덕 위의 기숙사 건물들에서 시선을 내려, 이번엔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쪽엔 본관과 강의동, 교수동 등등 수많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지어져 있었다.
“가주님이 도련님께 바라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아가씨께서 충분한 교육을 받을 때까지 후계자로서 남아달라는 것이죠. 마음 편히 학창 생활을 즐기십시오.”
“…….”
염노가 얘기했다.
시안은 그 말에 동의했다. 가주가 바라는 것은 결국 미끼로서의 역할뿐.
자신이 에버웨일에서 무엇을 배우든 무엇을 이루든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졸업.’
시안 본인의 입장은 달랐다.
에버웨일의 모든 시험과 평가를 뚫고 졸업에 성공한다.
그 순간 자신은 하나의 기반을 손에 넣게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 익히는 수많은 지식과 경험도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제1보(步)였다.
“그런데 정말로 짐은 이걸로 되겠습니까.”
염노가 마차에서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 하나를 꺼내왔다.
시안의 짐이었다.
“괜찮다. 개인 물건도 없고.”
그 말에 염노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교육과 훈련만 받아온 시안이었다.
가주의 어떠한 요구에도 응해야 한다며 노는 시간도 없이 공부만 했고, 개인적으로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다.
당연하다. 그림자는 어둠 속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
아이의 존재를 아는 이는 가주와 염노, 그리고 지금은 죽고 없는 본래의 시안 단 셋뿐이었다.
“도련님. 불초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새삼스레.”
답지 않게 분위기를 잡는 염노를 보며 시안이 피식 웃었다.
“아카데미 생활이 시작되면 많이 힘들 겁니다. 저에게 1:1로 교육을 받던 시절과는 또 다르겠죠.”
“그렇겠지.”
“힘들 때는 옆을 보십시오. 이제는 도련님도 혼자일 필요가 없습니다. 동료의 존재가 힘겨운 생활 속에서 많은 위안이 될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염노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가주의 뜻으로 미끼 역할을 떠맡은 그에게, 앞으로의 인생이란 말은 너무 가혹한 것 같았기에.
“사람을 사귀란 말인가. 하긴 이 기회에 인맥을 쌓아두는 게 가문에도 도움이 되겠네.”
“그런 말이…… 아니, 아닙니다.”
염노가 쓰게 웃었다.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지금의 아이에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리라.
가문의 꼭두각시.
가주에게 충심으로 복종하도록 만든 그림자.
아이를 그렇게 키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염노랑 떨어지는 건 처음이군.”
“제가 없다고 밤에 울면 안 됩니다, 허허허.”
“그동안 고마웠어.”
시안의 말에 염노의 웃음소리가 잠시 멎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십시오.”
이내 그리 말을 남기곤, 염노가 떠나갔다.
그가 탄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시안이 생각했다.
‘염노. 걱정할 필요 없어.’
노인의 생각과 달리 아이는 알고 있었다. 노인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하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염노는 자신이 가주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믿는 편이 나았다.
그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생각해서 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염노는 나와 가주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할 테니까.’
시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느 쪽이든 염노는 힘들어하겠지.
그럴 바엔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나았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연기.
어렵지 않았다. 그건 노인에게 배운 많은 것들 중에 하나였으니.
“갈까.”
그가 캐리어를 끌며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기숙사 건물은 총 4채가 있었다.
그중 시안이 들어간 것은 소메르 제국의 출신들이 주로 입사하는 사파이어관이었다.
물을 뜻하는 보석의 이름이 새겨진.
“크로센 영지에서 왔어. 반갑다.”
“난 페일룬에서 왔어!”
복도를 지나다니다 보니 몇몇 학생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면 앞으로 친하게 지낼 친구들을 만드는 모습에 불과했지만 그 눈 깊은 곳에는 다른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문,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을 위한 인맥을 쌓기 위한 필사의 의기.
학생답지 못하다 탓할 것은 아니다.
사실상 에버웨일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이유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인맥을 쌓기 위함이었으니.
“저…… 신입생?”
개중엔 시안에게 다가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다가오는 사람을 일부러 내치는 취미는 없다. 시안이 뒤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그래, 맞는데.”
“어…… 그…… 혹시……?”
그런데 말을 건 학생이 시안의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크게 움찔거렸다.
남의 얼굴을 보고 놀라다니 너무하다.
시안이 살짝 찌푸린 눈으로 얘기했다.
“아그리드 출신의 시안이다. 만나서 반갑다.”
“……!”
그게 결정타가 된 모양이다. 녀석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 그, 그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미안!”
녀석은 그대로 도망가고 말았다.
그 뒷모습을 시안이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자기소개도 없다니, 시안 아그리드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생각일까.
‘……방이나 가자.’
뭐 예상했던 일이다.
시안의 망나니 소문은 제국 전역에 퍼져 있을 정도고 아마 자카르타나 빙하백령의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단순히 성격만 지랄 맞은 것이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시안은 대귀족의 자제다.
제국에 단둘뿐이 없는 후작가의 사람.
성격이 개 같은 건 문제없다고 해도, 개 같은 녀석이 신분까지 높다면 그건 1급 위험 물질이나 다름없었다.
“히익!”
“미, 미안!”
그 후로도 복도를 걸으며 비슷한 일이 몇 번 정도 더 있었다.
사파이어관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소메르 제국의 사람이었기에 그만큼 시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여하튼, 그런 일을 겪으며 시안은 간신히 배정된 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후우.”
한숨을 쉬며 시안이 목에 있는 단추 하나를 끌렀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학교 기숙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크고 고급스러운 방.
한쪽에 있는 드레스룸에는 에버웨일의 제복이 몇 벌이나 걸려 있었다.
미리 조사해 갔던 그의 사이즈에 맞춰 준비해 놓은 것이리라.
“일단 갈아입을까.”
창밖을 한번 쓱 살펴보고는 시안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앞으로 계속 입고 다닐 제복이니 미리 시착해 보는 느낌으로.
최고급 옷감답게 안감이 굉장히 부드러웠고 통기성도 좋았다. 신축성도 나쁘지 않았고, 사이즈는 당연히 맞춤이었고.
‘이걸 입어보게 될 줄은.’
본래는 죽은 도련님이 입었어야 할 제복. 그걸 자신이 대신 입고 있다.
그 사실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기쁜 것도, 부담되는 것도, 긴장되는 것도 아닌.
그것은 다짐이었다.
쪼르르륵.
한쪽에 마련되어 있던 찻주전자로 ―물을 끓이기 위한 발열 마법이 걸려 있다― 차를 한 잔 따라 마시며, 시안이 잠시 고민했다.
아직 해가 지기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일단은 확인해 봐야겠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이 아카데미가 위치한 도시의 모습이라든가, 아카데미의 세부 구조라든가.
혹은 다른 기숙사의 분위기를 살펴보고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이곳이, 자신의 전장이 될 장소니까.
‘역시 그게 먼저다.’
이윽고 결정을 내린 시안이 몸을 일으켜 방을 나왔다.
그리고 향한 곳은 도시도, 다른 학생들이 있는 기숙사도 아니었다.
아카데미 부지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수련동.
온갖 마도구와 마법진을 사용해 만들어진 다종다양한 수련장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잠시 둘러본 시안이 2m가량의 목각 인형이 자리해 있는 수련장에 들어갔다.
물론 그냥 목각 인형이 아니다. 마법적 처리로 만들어진 골렘의 일종.
‘일단은 이것부터.’
시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도시의 구조도 학생들도 아니었다.
바로 지금의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 통용되는가 하는 것.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