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화
“에버웨일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
인류는 굶주림과 싸워왔고, 추위와 싸워왔고, 거인과 싸워왔다.
그리고 오늘날.
인류는 마물(魔物)과 싸우고 있었다.
“여러분은 앞으로 가혹한 훈련과 교육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극복한 자만이 그 손에 영예를 틀어쥘 것이며…….”
늙고 왜소한 체형의 노인이 단상에서 음성 증폭기로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해 있는 한 사내.
“그럼 마지막으로 최우수 입학생의 선서문이 있겠습니다.”
총장의 손짓에 따라 사내가 단상 앞으로 나왔다.
선서문을 받은 그가 눈을 감았다.
‘이곳부터 시작이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신입생 대표 시안 아그리드입니다.”
음성 증폭기로 증폭된 목소리가 강당 내에서 메아리쳤다.
그 소리를 듣는 수백 명의 학생들. 절반 이상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나 절반은 그러지 않았다.
귀나 꼬리가 달려 있는 학생도 있었고, 얼음처럼 창백한 피부의 학생도 있었다.
그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그리드면 걔 맞지?”
“어. 사고만 치고 다녀서 아그리드 후작이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던.”
“근데 옛날부터 검술대회 같은 곳에선 나갔다 하면 우승했다던데?”
“쳇. 인성이랑 실력은 상관없다는 건가.”
“혹시 모르지. 돈 써서 조작이라도 했을지도.”
학생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익숙하다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받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니지. 지금은 이제 내가 시안이다.’
고로 저 얘기는 모두 자신을 향한 얘기다.
그걸 마음속에 새기며 시안이 선서문을 마저 낭독했다.
망나니라는 평가에 어울리지 않는 낭랑한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단정한 외모와 목소리에 조금 놀라는 학생도 몇몇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아직도 대부분은 그를 차가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저런 녀석이 신입생 대표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면서.
“선서합니다.”
그 모든 시선에도 시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어 와 그런 그를 비추었다.
그에겐 그 햇빛이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축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 * *
―5살
벌써 12년이나 지난 어릴 때의 일이었지만 또렷하게 기억난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날이다.
“꼬마. 내 아들을 참 많이 닮았구나.”
그건 우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인간제국 소메르 최고의 무가(武家).
수많은 명문가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과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
아그리드 후작가.
“이대로라면 너는 신전에 맡겨지게 되겠지.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고아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모른다. 5살짜리 어린애가 알면 뭘 알겠는가.
당시에는 가주의 얼굴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았기에.
입을 달싹거렸다.
필사적으로 말을 뱉어보려 노력했다.
살려줘.
잘 얘기할 수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좋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거구의 사내가 자신을 번쩍 들어 둘러멨던 것 같은 기억밖에는.
그 후에 마차에 실렸나? 그랬던 것 같다.
“염노. 쓸 만한 녀석을 주웠네.”
“쓸 만하다니요?”
“잘 키우면 우리 시안의 그림자로 써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건…… 확실히 도련님을 쏙 빼닮았군요. 하지만 아직 아이입니다.”
“불쌍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자라면 생김새 정도는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네에게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잘 키워보게. 아들의 여벌 목숨이다. 지원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알겠습니다.”
마부석에 고삐를 잡고 앉아 있던 노인.
아이와 노인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7살
“뭐야, 이 녀석은! 기분 나빠!”
아그리드 가의 도련님을 처음 만난 것은 7살이 되던 해였다.
그전까지는 노인에게 넌 그분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고 여러 번 들어왔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자신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도련님, 시안을 직접 보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이 아이 대신에 죽기 위해서 배우고 있구나.
“퉤!”
시안은 앉아 있는 아이의 무릎에 침을 뱉고는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10살
5년 동안 아이는 노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문학을 배웠고 역사를 배웠고 수학을 배웠다.
검과 무술의 기초를 단련 받았으며 명문가 자제로서의 몸가짐을 습득했다.
아이는 천재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아이의 재능에 노인은 감탄했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은 항상 뿌듯함이나 대견함이 아닌 동정심으로 변하곤 했다.
“가주님의 눈에 띄지 않고 신전의 고아원에 들어갔더라면 너의 인생은 더욱 활짝 피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말이냐?”
“시설에 갔다면 할아버지를 못 만났을 거잖아요.”
“허허허…….”
노인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12살
노인은 아이의 얼굴과 몸을 세심하게 조정해 나갔다.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도련님의 모습과 엇나가지 않도록.
노인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법사였고, 그에게 그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12살이 되던 해에 일이 터졌다.
“아악!”
방약무인으로 자라나던 후작가의 도련님 시안.
언제나처럼 저택의 일꾼들을 마구 괴롭히던 그가 한창 요리 중이던 요리사를 건드리다 뜨거운 기름을 뒤집어쓴 것이다.
다행히 환부는 어깻죽지 부근으로 크진 않았다.
하지만 어린 도련님의 몸에 흉터가 남았다.
“죽여! 그 새끼 죽여 버리라고!”
병상에서 일어난 도련님은 매우 날뛰었다.
그 후로 요리사는 저택에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일꾼들 중 그 누구도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이와 노인의 귀에도 들려왔다.
“할아버지. 해주세요.”
“……꼭 이럴 필요는 없단다. 그 정도 흉터는 필요할 때 분장으로 메꿀 수 있어.”
“가주님은 그걸로 납득하실까요?”
“…….”
“저는 완벽하게 그 아이가 되어야 해요. 그걸 할 수 없게 된다면 가주님은 바로 저를 내치실 거예요.”
노인은 더 이상 아이를 말릴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의 고집을 전혀 꺾지 못하게 된 그였다.
그날, 아이의 어깨에 시안과 똑같은 화상 자국이 생겼다.
아이는 삼일을 펄펄 끓다 일어났다.
“앞으로 저는 편하게 염노라고 부르십시오, 도련님.”
이날부터 노인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이가 앓고 있던 삼일 동안 노인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노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15살
그 후로도 둘의 일상은 이어졌다.
여전히 아이는 노인에게 온갖 지식과 교양을 익히는 중이었다.
어느 정도 검의 기초가 잡힌 후에는 가문의 비고에 있는 검술들을 닥치는 대로 익혀갔다.
가주와 직계만이 익히는 비전 검술에는 손을 댈 수 없었지만 그 비전에서 나오는 모든 파생 검술을 차례차례 습득했다.
그런 생활을 보내며, 아이는 종종 바깥에 나가기도 했다.
주로 시안이 귀찮은 행사에 참석할 때, 혹은 무언가 대회 같은 것에 참여할 때였다.
그때마다 아이는 완벽히 시안을 연기하며 그를 대신했다.
“크으! 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알지? 너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몰라.”
“저는 가주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아 그래그래, 아버지 명령 말이지. 근데 결국 너는 아버지 부하가 아니라 내 부하 아냐? 내 명령도 좀 들어봐.”
“명령이요?”
“지센 백작가라고 알고 있냐? 거기 셋째 영애가 말이지 진짜 장난이 아니더라고. 이번 무도회 때 나 대신에 좀 꼬셔 와봐. 내가 말하는 곳으로 데려오면 돼.”
요즘 들어 이런 명령이 부쩍 늘었다.
15살이라지만 시안은 이미 성인 못지않은 덩치의 소유자였다. 그렇기에 장난으로 끝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런 종류의 명령은 모두 거절했다.
“가주님께서는 도련님의 여성 관계에 절대 관여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일은 가주님께 보고하겠습니다.”
“뭐? 보고? 이 새끼가!”
그럴 때면 항상 맹렬한 구타가 이어졌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아그리드의 직계로서 후계자 교육을 받아온 시안이었지만, 그의 주먹 따위로 아이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5살 때부터 이어진 10년의 단련.
시안과 아이의 차이는 이미 격(格)을 논해야 할 수준이었다.
“헉…… 헉……. 너 아버지한테 이르기만 해!? 어?”
시안이 으름장을 놓고는 쿵쿵거리며 떠나갔다.
물론 그날 바로 보고했다.
노인에게 듣기로 시안은 한참 꾸지람을 듣고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가주가 인식을 했으니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사라졌다.
―17살
그리고 17살. 아이의 운명을 갈라놓을 사건이 터졌다.
나이가 찬 시안은 에버웨일 아카데미에 응시했다.
인간제국 소메르, 수인왕국 자카르타, 요정궁 빙하백령, 그 외에 대륙 곳곳에서 인간과 아인들이 몰려드는 대륙 굴지의 아카데미.
하지만 시안은 아이를 이용해 손쉽게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합격 축하를 기념해 평소의 질 나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시안.
그가 탄 마차가 마물의 습격을 피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즉사였다.
“오랜만이구나, 꼬마.”
사고가 나고 며칠 후 가주가 찾아왔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시안에 대한 얘기는 들었겠지?”
“예. 안타까운 사고로…….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얼마 전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기엔 지나치게 차가웠다.
그가 입에 담배를 물었다.
옆에서 염노가 손가락에 피어 올린 불꽃으로 불을 붙여주었다.
“내게 후계라곤 아들 하나뿐이다.”
“따님분도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물론 최종적으론 그 애에게 물려주게 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직 일러.”
어째서 이르단 것일까.
후계 선정에 이르고 늦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아이는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시안에겐 내가 있었지만 그 아이에겐 아무도 없다.’
아그리드 가의 영애에겐 자신 같은 그림자가 없다.
만약 불의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다.
물론 가문의 뛰어난 검사들이 호위를 서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위험은 최대한 줄이고 싶지 않겠는가.
가령.
“난 아직 ‘아들’을 잃을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적당히 시선을 끌어줄 미끼를 내세운다든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5살 때 들었던 가주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때의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본능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고개 숙이는 아이를 보며 가주가 만족스러워했다.
그 뒤에서 노인만이 홀로 안타까움을 감출 뿐.
그러나 노인의 생각처럼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이 얘기를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기회다.’
고개 숙인 아이가 가주와 노인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눈을 번뜩였다.
시안이 죽지 않았다면 자신은 평생 그의 그림자로 살아갔겠지.
하지만 그가 죽었다.
한 생명의 죽음이었지만 평소의 시안을 아는 아이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 진짜 이름을 되찾을 기회.
그리고 아이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찾아온 기회를 놓친 적이 없었다.
“신입생 대표, 시안 아그리드입니다.”
그렇게 강렬한 의지를 품은 아이가 자리에 섰다.
에버웨일의 입학식. 최우수 입학생으로서 선서문을 손에 들고서.
그림자로서만 살아왔던 그가 처음으로 볕의 세계로 발을 내딛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