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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가를 어루만지던 달리아가 손을 끌어올려 덜 마른 흑발을 푸스스 흐트러트렸다. 장난치듯이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조금 더 활짝 웃어 보였다.
“내 생각만으로 가득 차서, 내 앞가림하기에 바빠서…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계속 상처만 줘서.”
“…….”
“생각해 보면 당신 덕분에 참 즐겁게 살아왔던 건데. 저택에서 아이작을 만난 이후부터, 내 안에 로렐만이 아니라 당신도 같이 있었는데. 감히 내 거라고 믿을 수가 없어서… 밀어내기 바빴어요.”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움직여 그의 뒷머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달리아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댄 채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아이작. 나한테 몇 번이고 물어본 말 있잖아요. 대답해 줬으면 하는 거. 그거 다시 물어봐 줄래요?”
무슨 말인가 싶어 뇌리를 뒤적이던 아이작이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숨을 멈췄다.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결국 진심을 들을 수 없었던 물음. 다그치며 대답을 종용해도 진심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물음이 백지가 된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이 메어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숨을 내쉬는 타이밍에 맞춰 꺼질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
“달리아. 나… 좋아해?”
달리아가 이마에 진한 입맞춤을 남긴 뒤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이마에 닿아 있던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와 그의 눈매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좋아해요.”
맑게 울리는 목소리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아이작은 가슴이 꺼질 것만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마지막 물음을 내뱉었다.
“날 사랑해?”
눈가를 배회하던 입술이 천천히 위로 들리는 게 느껴졌다. 숨결이 코를 스쳐 입가에 닿고, 이내 그녀의 입술이 아이작의 입술을 뒤덮었다.
“사랑해. 너무 사랑해.”
단 숨과 함께 흘러드는 고백이 심장이 아릴 만큼 애틋하고도 감격스러웠다.
입술을 뗐다 붙였다 하던 달리아가 스치듯 가느다란 웃음소리를 흘리며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췄다. 한참 동안 목을 끌어안고서 농밀한 입맞춤을 퍼붓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바다를 가리켰다.
“아이작. 저기 봐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향하자 해가 사라진 수평선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내가 말했죠? 해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바다가 엄청 붉어진다고. 예쁘죠?”
그녀의 말처럼 수평선 부근이 붉은 광원으로 가득 차 화려한 색채로 눈을 현혹했다. 수평선을 중심으로 하늘과 바다가 흑백으로 나뉘어 농담을 달리하는 모습은 여태까지 봐 온 그 어느 풍경보다 아름다워서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래요. 해 질 무렵이 되면, 어렸을 때의 기억이 아니라 여기서 본 풍경을 떠올려요. 나쁜 기억은 다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기로 해요.”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작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기서 본 노을. 석양…”
달리아랑 함께하자고 약속한 날.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준 날.
눈이 부실 만큼 휘황한 노을을 바라보며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주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모든 걸 잊게 된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영원히 기억하리라는 걸.
“달리아. 나 있잖아.”
“네.”
“나 이제 시간 많아. 달리아 옆에서 계속 있을래. 그리고 노을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전부, 즐거운 기억으로만 꽉 채우고 싶어.”
석양을 바라보던 눈에 아득한 빛이 반짝였다. 희망과 기대,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 찬 눈시울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 아직 못해 본 게 너무 많으니까. 전부 달리아랑 같이하고 싶어. 바다에서 수영해보고 싶고 모래 놀이도 해보고 싶어. 꽃시장도 가보고 싶고, 달리아한테 꽃 포장하는 법도 배우고 싶고…”
눈물을 멈추고 입매를 끌어올렸다. 윗니로 입술을 살짝 짓누르며 말을 고르다가 한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사랑한 다음 날. 같이 눈 떴으면 좋겠어.”
“…….”
“그런 날마다 꼭… 달리아가 사라지려고 했으니까. 일어나면 항상 옆에 없었으니까.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달리아의 얼굴이 보고 싶어.”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억지웃음을 지은 채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잔잔히 울리는 파도 소리 너머로 스치듯 희미하게 먼 뱃고동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소리마저 빛을 띠고 있는 듯한 몽환적인 석양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지저귀듯 작게 이어졌다.
“내일 같이 눈 뜨려면 사랑부터 해야겠네요.”
“응?”
“아니에요? 함께 잠들고 난 다음 날, 눈 떠서 얼굴 보고 싶은 거면…”
야한 짓부터 먼저 해야지요.
붉어진 뺨을 긁적이며 허둥지둥 말하는 모양새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속을 벅차게 만들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부끄러운 표정을 언뜻 가리는 것도,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하는 것도.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마저도 사랑스럽다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상체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눈동자를 내려 시선을 피하고 있던 달리아가 마지못해 그와 눈을 마주했다. 생동감이 넘치는 표정에 아이작의 눈시울이 초승달 모양으로 길게 휘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고개를 틀어 입술을 탐하던 아이작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에 새길 듯 귀 언저리를 찬찬히 더듬다가 목덜미를 쓸고 내려와 척추를 하나하나 훑으며 그녀의 등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또 다른 손이 허벅지를 쓸고 올라와 허리를 지분거리다가 두 손이 엉덩이 아래로 쑥 들어왔다.
아이작이 하체를 받쳐 든 상태 그대로 달리아를 안아 들었다. 달리아는 몰아닥치는 입맞춤의 해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몽롱한 정신으로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기 바빴다.
스커트 바깥으로 드러난 다리가 아이작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다가 이윽고 자연스레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입술이 비벼지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자갈 더미를 짓밟는 소리에 묻혔다. 입술을 맞부딪히는 와중에도 아이작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저택 문을 향해 성큼 걸었다.
문을 박차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순간, 달리아가 노곤하게 풀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옷깃을 꽉 붙들었다.
“2층… 로렐 있으니까…”
혼몽한 얼굴로 하는 말치고는 꽤나 이성적이었다.
노골적으로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아이작의 흥분에 더욱 불을 지폈다. 아이작은 재빨리 1층의 설계도를 떠올리고서 동쪽에 위치한 손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질녘의 마법이 사라지자 푸르스름한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저택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부서트릴 것처럼 방문을 걷어차고 방에 들어선 아이작이 입술을 떼어내고서 침대 위에 달리아를 내려놓았다.
스커트와 셔츠가 거의 동시에 훌훌 벗겨졌다. 슬립과 속옷마저 사라져 나신이 된 그녀의 가슴 위로 달빛인지 낮의 잔재인지 알 수 없는 희끄무레한 빛이 내려앉았다.
조심스레 움직이는 아이작의 손길과 다르게 달리아는 다급한 손짓으로 그의 셔츠를 풀어 내렸다. 누가 보면 성욕에 휩싸인 사람이라고 오해할 만큼 급한 손짓은, 아이작의 눈으로 보기에 혼자 벌거벗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빨리 자신도 벗기려는 애처로운 몸짓에 불과했다.
부드럽게 손을 밀치며 스스로 셔츠를 벗어 던졌다. 얄따란 목덜미를 입술로 깨물며 나머지 옷도 모두 벗었다.
살결을 세게 빨아들이자 그녀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도드라진 목빗근을 입술로 더듬으며 쇄골을 거쳐 아래로, 아래로 입술을 옮겨갔다.
“아…”
가슴 언저리에 토해지는 숨결에 달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을 섞을 때마다 아이작은 살결을 빨아들이는 것 외에도 가슴의 선단을 괴롭히는 데에 유난히 집착했다. 감각이 치중된 가슴 끝에 그의 숨이 닿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어 옆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아이작이 더 빨랐다.
“흑, 읏…!”
세게 가슴을 빨아들이는 통에 저절로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기 위해 몸을 구부려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이작이 하체를 바짝 붙여와서, 되레 그의 밀착을 돕는 꼴이 되어버렸다.
눈을 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상완과 함께 가슴께를 배회하고 있는 검은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부드럽게 너울대는 검은 머리카락 너머로, 살을 빨아들이는 외설스러운 소리가 연신 이어졌다.
쉴 새 없이 가슴을 괴롭히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가슴을 들썩이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달리아는 명치에 머물러 있던 그의 턱이 천천히 아래를 향하는 걸 느끼고 힘겹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그의 어깨를 짚은 순간, 닿지 말아야 할 곳에 숨이 닿는 걸 느끼고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잠까… 윽…!”
은밀한 곳을 파고드는 혀의 감촉에 저절로 허리가 들썩였다. 그러자 움직이지 말라는 듯 기다란 손가락이 허벅지를 붙잡아 내렸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지만 다리를 붙든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채 신음을 참으려 해도 터져 나오는 교성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만… 그만, 아이작. 제발 그만해…”
온몸이 까발려지는 듯한 수치심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그만큼,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어깨를 밀어내는 손에 힘이 빠졌다. 가파르게 고조되던 감각이 극에 이른 찰나, 이내 백색 환희가 그녀의 뇌리를 가득 메웠다.
아이작이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욕망이 넘실대는 검은 눈동자 속에 흠칫거리며 우는 달리아의 얼굴이 들어찼다. 절정에 침식된 그녀가 다시 현실로 부상하기 전에, 아이작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느릿하게 몸을 겹치기 시작했다.
“읏, 하아…!”
흐릿하게 풀어져 있던 그녀의 동공이 삽시간에 또렷한 빛을 머금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버거움에 달리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어깨를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