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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품위 있고 다정한 행동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건 사랑받아 본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배려였다. 그렇기에 적어도, 어머니에게서는 애정을 듬뿍 받고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자신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건.”
달리아의 얼굴에서 서글픈 감정을 읽어 낸 아이작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제는 그렇지 않으려고. 내 노을은 이제 여기에서 보는 노을로 할래. 달리아랑 같이 본 노을로.”
“지금 이 노을이요?”
“응. 예전에 심리학책에서 봤는데, 같은 상황에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있으면 무조건 좋은 기억 먼저 떠올려야 삶이 행복하다고 했어.”
턱짓으로 수평선을 가리키며 아이작이 조금 웃었다.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좋은 기억은 전부 달리아랑 한 것들뿐이네. 처음 해 본 것도 대부분 달리아였고. 그거 알아, 달리아?”
“뭘요?”
“나는 시가지 구경도 달리아랑 처음 해 봤다?”
가만히 그의 말을 상기하던 달리아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난다. 겨울이었죠? 아이작이 나한테 엄청 비싼 선물 해줬는데. 토끼 목도리랑 장갑이랑.”
“…그거 그렇게 비싼 거 아니었어. 달리아가 절대 비싼 거 사면 안 된다고 해서 그다음부터는 소박한 걸로만 선물했잖아.”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던 아이작이 아무튼, 하고 화제를 바꿨다.
“시가지 구경도 그렇고 강가에서 물놀이 하는 것도. 수영하는 것도 전부 달리아랑 처음 해 봤어.”
“그랬어요?”
“응. 내가 기억하는 처음은, 늘 달리아랑 함께였어.”
다치면 걱정하며 약을 발라 주고. 어딘가 아프면 숨기지 말고 꼭 말해야 하고.
생일에는 함께 촛불을 불고 케이크를 먹고, 새해에는 축복 기도를 하고, 추수제에는 함께 춤과 노래를 즐기고.
속상한 일이 생기면 함께 슬퍼해 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으며 기뻐하는.
살아가면서 당연히 습득하는 것들을 대부분 달리아에게서 배웠다. 감정을 일깨우고 깨어난 감정을 받아들이는 법 또한 모두 그녀가 알려 주었다.
“처음으로 사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
차별당하고 모멸당하는 삶은 그에게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자신은 달리 생각하면 필요로 하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달리아는 그의 쓸모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작을 아이작으로만 여겼다. 누구도 관심 없던 그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걸고 다정함을 나눠 주었다.
‘도련님은 새를 좋아하시는구나. 이름을 다 알고 계시는 걸 보니까 너무 신기해요.’
‘도련님, 이거 보세요. 첫눈이에요! 쌓이면 눈싸움하러 나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