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 (93/97)

93

“나이를 먹다 보면 가치관이 수십 번은 뒤바뀌곤 합니다. 특히 큰 분기에 다다를 때마다 그런 일이 잦습니다.” 

주름진 눈매 속에 깊은 연륜이 휘몰아쳤다. 디테른 자작은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만 움직여 대답했다.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가신들 모두가 마차를 타고 다녔지요. 그런데 지금은 각하께서도 저도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는데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지요.”

“…디테른 경.”

“핏줄을 따져가며 누군가를 비난하기에는 저 스스로도 그리 대단한 핏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걸 일일이 따졌다면 각하의 작위 계승부터 반대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이작은 속으로 감탄하며 자작을 쳐다보았다.

나이가 들면 예전의 가치관이 그대로 굳어져 새로운 것을 거부하기 마련인데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디테른은 늘 고집부리는 일 없이 타인의 의견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가 오브릭 자작이나 뉴엣 백작처럼 큰 힘이 없는데도 늘 가신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작이 머쓱한 웃음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떠나서, 저는 유프겐슐트의 가신입니다. 레이디 유프겐슐트의 부군을 비난하는 행위는 유프겐슐트 가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할 겁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떠나십시오.”

아이작은 알겠다는 대답 대신 악수를 청하는 손을 세게 붙들었다.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작은 손은 노인의 것이라 믿지 못할 만큼 뜨거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맞잡은 손에 강하게 힘이 서리는 걸 느낀 아이작이 순수한 웃음을 띠고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목을 숙였다.

* * *

늘 잔잔하던 파도가 크게 들썩인다 싶더니, 거센 폭우가 저택을 덮쳤다.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 같았다. 빗소리의 박자를 속으로 가늠하던 달리아가 창 너머 수평선 부근을 바라보고 탄성을 흘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이곳과 달리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수평선은 한없이 잔잔했다. 홀린 듯 풍경을 바라보던 달리아는 빗줄기가 더 세진 걸 느끼고 창틀에서 손을 뗐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오늘은 아무도 못 오겠네.”

마고 부인의 여관에서 저택까지는 대략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한 발자국만 나가도 몸이 홀딱 젖어버릴 것 같은데, 이런 날씨에 저택을 올 수는 없을 것이다. 부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에디나도 당연히 올 수 없을 테고.

오늘은 혼자.

“음…”

매일같이 드나들던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생각하니, 조금 그립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창틀에 팔꿈치를 기댄 채 밖을 바라보던 달리아는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로렐이 잘 있나 방에 갔다가 따뜻한 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느린 걸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먼지를 털다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고서 주방으로 내려왔다.

그릇을 정리하고 뜨거운 물에 커트러리를 소독해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씻었다.

냅킨에 수를 놓을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안 어울릴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보조 탁자에 기대 멍하니 주방을 둘러보던 달리아는 저녁을 미리 만들어놓자 결심하고서 식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샐러리와 토마토를 달달 볶다가 옥수수와 콩을 넣고서 보글보글 끓였다. 허브를 좀 넣고, 부족한 감칠맛은 어제 남겨둔 닭 다리 구이를 넣어 보충했다.

“너무 이것저것 많이 넣었나.”

혹시 부인과 에디나가 올지도 모르니까,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재료를 많이 넣었더니 지나치게 양이 많아졌다. 한 솥 가득한 수프를 내려다보던 달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냄비를 탁자로 옮겼다.

여열이 남은 화로에 주전자를 올린다. 찻잎을 덜어 거름망에 넣고서 뜨거운 물을 쏟았다. 우려낸 차를 따르고 뒷정리까지 전부 끝마친 후, 주방 탁자에 기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비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하염없이 모래사장을 적시고 있었다. 여름도 거의 다 지났는데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건지.

“언제 그칠까…”

어쩐지 빗줄기 사이로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척이라고는 자신이 내는 숨소리뿐.

…정말로, 혼자가 된 느낌.

괜스레 쓸쓸함이 밀려드는 것 같아 애꿎은 찻잔만 연신 만지작거렸다.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에 미미한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때였다.

저 멀리, 희미하게 문소리가 들렸다.

“누구 올 사람이 있었나?”

저택을 드나드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정원사와 간병인, 위병 둘이 전부였다. 간병인은 일주일에 세 번만 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저택 옆에 위치한 숙소에 머무르기 때문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저택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며 홀 쪽으로 걸었다. 주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스쳐 홀에 가까워질수록 뚜벅거리는 낮은 발소리도 점점 크기를 키웠다.

먼저 발걸음을 멈춘 건 달리아였다.

환히 트여 있는 홀 안쪽. 흠씬 젖은 코트를 벗으며 머리를 털고 있는 남자는, 그였다.

빗방울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젖은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늘 단정하게 목을 죄고 있던 타이는 어디로 가고 느슨하게 단추를 풀어 내린 셔츠는 가슴까지 젖어 솟아오른 흉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촉촉이 젖은 눈가를 성의 없는 손길로 훔쳐낸 그가 흘깃 시선을 들어 달리아를 쳐다보았다. 감흥 없던 얼굴에 실낱같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긴 다리를 뻗어 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서슴없이 달리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 왔어, 달리아.”

급작스레 내린 폭우보다 더 급작스럽게, 그가 내려왔다.

차가울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온기에 취해 가만히 안겨 있던 달리아가 잠시 후 더듬거리며 말을 쥐어짰다.

“어떻, 주인님이 어떻게.”

“주인님?”

“…아이작이 여길, 왜…”

멍하니 아이작의 품에 안겨 있던 달리아가 이마에 축축한 물기가 흐르는 걸 깨닫고서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기를 뚝뚝 흘리는 머리카락 아래, 지그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연한 얼굴이 비 내음과 맞물려 어딘가 뇌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현혹되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될 일이다. 달리아는 그를 밀어내고서 허겁지겁 수건을 들고 달려와 머리를 감쌌다. 비에 젖어 엉망이 된 코트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저대로 말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내버려 두기로 하고, 그의 손을 붙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아이작은 실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하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응접실에 그를 앉혀 둔 달리아가 초조한 얼굴로 주방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커다란 잔에 차를 가득 따라 들고 나왔다.

제대로 된 티 세트도 아니고 커다란 머그잔에 찻잎을 아낀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는 밍숭맹숭한 차를 따라 갖고 나오다니.

“아무리 남부가 따뜻하다고 해도 이렇게 비를 맞으면 금방 감기 걸려요. 어서 드세요.”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안을 잘근거리다가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훈훈한 기운이 금세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달리아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주방과 아이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언제 내려오신 거예요?”

“오전에 일 끝내고 바로 내려왔어.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릴 줄은 몰랐네.”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우산 갖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요…”

걱정스러운 어조에 아이작이 슬며시 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비서를 대동하고 돌아다니니 우산 따위를 갖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저택에 거의 다다랐을 때 문득, 이렇게 젖어서 들어가면 달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차에서 내려 걸어온 것이다.

마고 부인을 통해서 달리아가 기력을 많이 되찾았다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에게 여전히 날을 세울지 아닐지는 미지수였다. 때문에 일부러 후줄근한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조금이나마 안쓰러워 보이기 위해서, 걱정스러워 보이기 위해서.

“담요 가지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행히 결과는 아주 좋았다.

아이작은 추운 듯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몸짓에 달리아가 미간을 좁힌 채 어딘가로 뛰쳐나갔다.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달리아가 도톰한 담요를 갖고 와 아이작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안 먹었어. 달리아는?”

“…아직 저녁치고는 시간이 이르잖아요. 안 먹었어요.”

주방 쪽을 쳐다보던 달리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머뭇 입술을 뗐다.

“닭고기 수프를 만들었는데 괜찮다면 드시겠어요? 수프랑 빵이 전부라서 내놓기에는 좀 초라하지만…”

“달리아가 한 거야?”

달리아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눈매를 살짝 접어 그녀를 응시하다가 달리아를 따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먹을래. 배고파.”

“음, 금방 데워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부끄러워하는 모습과 달리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이 몹시 가벼웠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작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시자 축축한 비 내음 너머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오래된 옷감 냄새, 어딘가 기분 좋은 시절을 연상케 하는 포근한 냄새가 허공에 은은히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별채에서도 사라진 그녀의 냄새였다. 너무 그리워서 몇 번이고 내려오고 싶게 만들었던 그 체취.

달리아를 우브랑으로 내려보낸 지 고작 삼 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삼 개월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입이 아플 정도였다.

아이작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아가 향한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는 걸 보니 꽤나 급하게 식사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화로 앞에서 냄비를 휘젓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넓은 팬에 빵을 늘어놓고서 작은 손으로 열심히 뒤집고 또 뒤집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바짝 다가가 등 뒤에 섰다. 달리아는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데워진 빵을 접시에 옮기기 바빴다. 아이작은 삐뚜름하게 고개를 세우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달리아.”

“아, 아이작. 이제 거의 다 됐…”

몸을 돌리는 달리아를 그대로 끌어안고서, 아이작이 급습하듯 입을 맞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