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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뒤로 넘긴 머리카락들이 너울대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이작은 느릿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카를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네게 공작위를 넘기고 싶지만 그것까지는 무리겠지. 하지만 영주 대리까지는 가능해. 디테른 자작도 널 예뻐하고 가신들도 네게 호의적이잖아. 어차피 지금도 네가 반 이상 일을 대신해 주고 있으니까 반대할 사람은 딱히 없을 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할래, 안 할래?”
직위를 위임하는 중요한 일을 무슨 시장 좌판에서 생선 고르듯 묻고 있었다. 카를라는 무슨 꿍꿍이냐고 소리치려다가 아이작의 속내를 파악하고서 말을 삼켰다.
“우브랑인지 어딘지 영 알 수 없는 시골에 그 애를 갖다 둔다 싶더니… 너 여태까지 마음 정리하고 있던 게 아니라 신변 정리하고 있던 거였어?”
“눈치채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형은 진작부터 알고 있던데.”
허, 어처구니없는 탄식을 내뱉으며 카를라가 눈을 부라렸다.
“아니, 그럼 후버가 사업체 분리하는 걸 도와주고 있던 게… 아니, 어쩜. 매일 그렇게 내 방을 드나들면서도 네 얘기는 하나도 알려 주지 않았단 말이야.”
“우린 원래 그래. 밖에서는 서로에 관한 말 거의 하지 않거든. 형제인 걸 아는 사람도 카를라 너 혼자뿐이고.”
배신감에 입술을 잘근거리는 카를라는 후버가 원래 그런 남자라는 걸 새삼 깨닫고 입술을 깨물던 이에 힘을 풀었다.
그 천박하고 못된 남자는 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할 뿐 자신의 얘기를 풀어놓는 법이 없었다. 뭐, 그 점이 매력이긴 했지만 때로는 응, 아, 그래, 세 단어만 할 줄 아는 앵무새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짜증스러울 때도 종종 있었다. 게다가 오늘처럼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이면 더더욱.
“형이 너한테 사적인 얘기를 안 하는 이유는 일부러 그러는 거야.”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아이작이 핵심을 꿰뚫고 들어왔다. 무슨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알아 봤자 걱정만 할 테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괜히 쓸데없는 걱정하는 게 싫은 거겠지.”
“후버가 날…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응.”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카를라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귓바퀴를 어루만지며 이상한 탄식을 흘려댔다.
늘 순결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던 고상한 얼굴 위로 부끄러우면서도 새침한, 마치 사춘기 소녀와 같은 표정이 몽실몽실 떠올랐다.
늘 그녀가 좋다고 따라다닌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밀어내고 잊어버리려고 애써도 가진 것 하나 없는 그 후줄근한 남자가 좋아서, 너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후버에게 좋아한다거나 애정 어린 표현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카를라로서는 그가 싫은데 자신을 거부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맞춰 주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날 좋아해?”
“그래.”
“후버가? 정말 날 좋아한다고?”
“어딜 봐도 그렇잖아.”
“하지만 그 사람, 나한테 한 번도…”
“좋아하지 않는 여자와 잠자리할 만큼 형이 비위좋은 사람은 아니야.”
카를라가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런 적 없어, 오해하지 마’. 읊조리는 말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세운 채 흥미로운 눈초리로 카를라를 쳐다보았다.
“형이 널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결혼하자는 말 꺼낼 수가 없었어?”
“…….”
“일할 때는 그렇게 유능한 사람들이 이런 눈치는 엄청 둔하네…”
지그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이작이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슬그머니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곧, 진심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카를라가 뭐가 웃기냐며 성을 냈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도 아랑곳없이 나직한 웃음소리를 이어가던 아이작이 부드러운 눈으로 카를라를 응시했다.
“카를라.”
“왜, 또.”
“예전에 만들었다던 약혼식 드레스. 아직 갖고 있어?”
“…아마 창고에 있겠지.”
“그 드레스 여전히 마음에 들어?”
맥락을 유추할 수가 없는 문답이 계속 이어져 카를라의 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졌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작이 입꼬리에 매달고 있던 미소를 한결 진하게 덧그렸다.
“그럼 준비는 됐네. 네 어머니는 내가 설득할 테니까 너는 프러포즈 준비해.”
“무슨 소리야?”
“남부로 내려가면 앞으론 몇 년간은 올라올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내려가기 전에 너랑 형 결혼하는 거 보고 내려가려고.”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던 카를라가 허리춤에 늘어트려 놓았던 손을 들어 입가를 어루만졌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의붓누이를 향해서, 아이작이 대신 입을 열어 그녀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
“공작위를 걸고 지지할게. 결혼해, 카를라.”
* * *
위임장을 받아든 디테른 자작이 외눈 안경을 꺼내 신중하게 서류를 살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혹여 빼먹거나 달라진 사항이 있을까 싶어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히 훑었다. 지긋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형형한 눈으로 서류를 쏘아보던 자작은 다시 포켓에 안경을 집어넣고서 위임장을 추슬렀다.
“일단 제 선에서 수리하겠습니다. 자문단과 가신들에게는 언제 공표하실 생각이십니까.”
의자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작이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흘리듯 대답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공표할 생각입니다. 최근 2년간 영지 경영과 관련한 일은 저보다 카를라가 더 많이 손대고 있었으니 큰 반발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반발은 없겠지만 소란을 완전히 잠재우는 건 힘들 겁니다. 원래부터 레이디 유프겐슐트가 각하를 돕는 걸 못마땅해하는 가신들이 꽤 있었으니 말입니다.”
“카를라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아이작의 물음에 디테른 자작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레이디 유프겐슐트는 꽤 강단 있는 여성이지요. 그리고 정 감당할 수 없다면 극복할 수 있도록 그릇을 키우는 게 스승이 할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아이작이 슬쩍 눈을 키우자 자작이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여성이라고는 해도 레이디 또한 유프겐슐트의 핏줄입니다. 이 노구가 여력을 바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지요. 부디 염려 마십시오.”
가볍게 말하는 태도와 달리 문장에 담긴 진심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디테른 자작은 근 반백 년 가까이 유프겐슐트의 위명을 빛내며 살아 온 가신이었다. 젊은 가신들의 주축인 뉴엣 백작이나 가신들을 대표하는 오브릭 자작처럼 힘이 강하지는 않지만 공작가에 대한 충의만은 그 누구보다 깊은 사람이었다.
아이작은 정중한 묵례로 충신에 대한 경의를 대신했다. 여태까지 그저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라 여겼던 디테른 자작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가신이 되리라고는 그도 생각지 못했다.
“제가 없는 동안 헬만을 잘 부탁드립니다.”
“애써 보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언제쯤 자리를 비우실 생각이십니까.”
“카를라의 결혼식이 끝나는 대로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디테른 자작이 한 쪽 눈썹을 흘깃 추어올리며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작위를 계승하셨으니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건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부디 각하의 공백이 길지 않기를 빕니다.”
“걱정 마십시오. 학업이 끝나는 대로 다시 복귀할 겁니다.”
영주 대리를 내세우면서, 아이작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아카데미를 다니겠다는 핑계를 댔다.
너무 일찍부터 공작위를 계승했기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4년간 유예를 달라 가신들에게 통보한 것이다.
가신들로서는 작위를 승계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가 자리를 비운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부를 위해 자리를 비운다는 뜻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건 헬만을 위해서’라는 말을 방패로 세우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디테른 자작은 그가 공부만을 목적으로 떠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남부로 확장 중인 철도 사업을 별도 사업체로 분리한 공작은 작정하고 사업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는지 영지 일은 카를라에게 전부 일임하고 자신은 외부로 돌기 바빴다. 순식간에 뻗어 나가는 철로와 하나둘 개통되는 역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작은 공작의 수완이 여느 사업가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익히 실감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보좌관으로 추대된 이유가 있었다. 공작은 천재였다.
이미 공부 따위는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경영 감각을 지닌 이였다. 때문에 자작은 그가 헬만을 떠나는 이유가 자아를 찾는다거나 휴식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디테른 경.”
아이작이 웃음을 거두고 무감한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진중한 분위기에 자작 또한 허리를 곧추세우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카를라가 결혼할 상대는 귀족도 뭣도 아닌 평민입니다. 제 곁에서 꽤 많은 일들을 거쳐 온 인재지만, 출신 때문에 업신여겨질까 봐 두렵습니다.”
“저택의 잡역부 출신이라고 듣긴 했습니다만…”
“후버는 제 형입니다.”
탁자를 지분거리던 디테른 자작이 손길을 딱 멈추고 눈을 키웠다. 놀란 기색에도 동요 없이 아이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와 함께 창부였던 어미 슬하에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자란 사람입니다. 압니다. 레이디 유프겐슐트의 상대로서 한없이 미천하다는 것쯤은 저도 익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어낸 아이작이 가늘게 뜬 눈으로 탁자 언저리를 노려보며 말문을 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무엇보다 카를라가 그를 원합니다. 수많은 청혼장을 찢어버리고 그녀가 택한 사람이 제 형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쪼록.”
“그가 멸시받지 않게 지켜 달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디테른 자작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눈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