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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방문자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마고 부인이 친구라는 말에 화색을 띠었다.
“어머나, 어머나. 아가씨가 달리아의 친구라고?”
“네, 부인! 에디나 작스라고 해요.”
에디나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마고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저택에 오는 동안 쬐었던 열기로 인해 까무잡잡하면서도 불그스름한 빛을 띠었다. 그럼에도 건강한 빛이 완연한 얼굴은 그간 에디나의 삶이 썩 우울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주는 듯했다.
“어쩐지, 여기 지리를 모르는 게 딱 외지인 같았는데. 달리아의 친구인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마차에 태워 올 걸 그랬어.”
“괜찮아요. 남부는 처음 와 봐서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었어요. 바다 보면서 걸으니까 엄청 낭만이 느껴지던데요. 조금 덥긴 했는데, 집이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다행이죠.”
“땀을 이렇게 흘리는데 다행은 무슨! 금방 레모네이드 좀 만들어서 갖고 올 테니까 잠깐 있어 봐요.”
마고 부인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나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지고, 응접실에는 달리아와 에디나 두 사람의 숨소리만 잔잔히 울렸다.
무거운 적막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말들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진한 눈빛으로 회포를 나눴다.
“얼굴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침묵을 가르고 먼저 입을 연 건 달리아였다.
달리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에디나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에디나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달리아가 입술을 적시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그럼에도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아, 그저 눈만 들어 그립고 그리웠던 친구의 얼굴을 천천히 되새겼다.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카락이 그을린 얼굴과 더불어 에디나의 발랄함을 돋보이게 했다. 뺨 위로 촘촘히 내려앉은 주근깨는 원숙한 그녀를 때로 소녀처럼 보이게 했다.
저택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췄던, 그래서 더욱 서운하면서도 그리웠던 에디나가 정말로 눈앞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잘 지냈어?”
달리아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삼키며 에디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가만히 그녀의 시선을 응수하던 에디나가 입꼬리를 실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지냈다고 할 수는 없었지. 그래도 뭐. 괜찮아 보이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간 거야?”
“응. 고향 집에서 지냈어. 동생들 뒤치다꺼리하느라 바빴지. 첫째가 기숙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슬슬 일자리를 알아볼까 했는데 마침 도련… 아니지, 주인님이 보낸 사자가 집으로 찾아왔더라고.”
“사자? 주인님이 사자를 보내셨어? 왜?”
에디나가 가방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 팔랑팔랑 흔들었다. 주인님 조금 웃긴 사람인 것 같다며 웃었다.
“남부에서 꽃가게를 차릴 생각인데, 그 옆에 작은 카페테리아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꽃가게는 달리아가 할 텐데 카페테리아는 너와 친한 사람이 하면 딱 좋을 것 같다고… 그때 내가 생각났다고.”
말이 이어질수록 달리아의 얼굴에 심각한 기색이 퍼져나갔다. 웃고 있는 에디나와 대비되는 무척 근심 어린 표정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일자로 다문 입매 끝이 파르르 떨렸다. 표정을 본 에디나가 달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 오랜 친구로서 달리아를 속속히 아는 에디나가 보기에, 지금 그녀의 얼굴은 딱 울기 직전에 감정을 삭이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왔어. 이렇게 좋은 곳에 있으면 나도 많이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랑 있으면 좀 더 나아질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왔어.”
“…에디나.”
“괜찮아.”
에디나가 활짝 웃으며 납작해진 배를 쓸었다.
한때 생명이 깃들었던 배에는 이제 죄책감과 슬픔밖에 남지 않았다. 원치 않던 아이라 해도 아기는 분명 뱃속에 존재했다.
아이를 지워내고서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한때 그녀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혀오던 생각이었다.
하녀로 다시 재취업할 기회도 있었다. 그녀가 좋다는 남자도 있었다. 그러나 죄인의 굴레가 그녀를 칭칭 옭아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에디나는 언제 다시 가동될지 모르는 녹슨 열차 안에 웅크려 있었다.
그런 에디나를 끄집어낸 건 손에 들고 있는 편지였다. 이 편지는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했던 에디나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숱한 고민에 잠 못 이루던 에디나는 아이작의 제안을 듣고서 용기를 냈다. 행복해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행복을 찾아 나서보기라도 해야겠다고.
행복해지는 만큼 죄인의 멍에도 커질지언정 그만큼 더 커진 행복이 죄책감을 상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고향을 떠나왔다.
“괜찮아, 이제는.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달리아에게 건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달리아는 그녀의 괜찮다는 말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말인지 곧장 깨달을 수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품을 활짝 열었다. 머뭇거리는 에디나가 답답해 그대로 덥썩, 친구를 끌어안았다.
달리아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애써 삭이며 에디나의 말을 똑같이 읊었다.
“응. 괜찮을 거야. 에디나도 나도. 이제는 괜찮을 거야.”
* * *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는 청량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치웠다. 그늘진 곳과 달리 서류 위에 내리쬐는 햇살은 여름이라는 걸 입증하듯 한없이 강렬했다.
“아이작. 이 서류, 전에 말했던 노선 분리 건이랑 관련 있는 거야?”
카를라가 파닥거리며 부채질하던 서류를 아이작 앞에 내려놓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이작과 달리 카를라는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훔쳤다. 팔랑거리는 손수건 끝의 레이스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으니, 카를라가 눈매를 찡그리며 손수건을 접었다.
“민망하게 뭘 그렇게 쳐다보니.”
“그냥. 그래도 아버지는 같은데 체질이 참 다르다 싶어서.”
“이게 체질 문제일까… 넌 추위도 더위도 잘 안 타잖아. 그냥 무딘 거 아니고?”
그럴지도, 아이작이 감흥 없는 대답과 함께 서류를 펼쳤다.
열린 창문 너머로 나뭇잎이 우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들이쳤다. 창가로 다가선 카를라가 몸을 식히기 위해 셔츠를 팔락거렸다.
아이작과 함께 영지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카를라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셔츠와 승마바지를 입고 돌아다녔다. 이르미나는 이게 무슨 추태냐며 그녀를 다그쳤지만 카를라는 어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고 간편한 차림을 고수했다.
“하긴 후버도 땀 별로 안 흘리던데. 너희 형제는 둘 다 감각에 무딘 편인가 봐.”
흘리듯 말하자 아이작이 흥미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
“그래. 더위뿐만이 아니라 운동할 때에도 땀이 거의 안 나더라고. 같이 움직이면 나만 혼자 잔뜩 젖어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추위도 잘 안 타는 것 같아. 겨울에 목덜미에 손 집어넣으면 깜짝 놀랄 때는 종종 있지만 그 외에는…”
“운동?”
아이작이 한쪽 눈썹을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묘한 눈빛을 마주한 카를라가 뒤늦게 당황하며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말문을 뗐다.
“아니 왜, 요즘 내가 승마 가르치고 있잖아! 말 탈 때도 그렇고 그, 크리켓 할 때도 땀 거의 안 흘려서…!”
“……아. 그래.”
“그 운동 말한 거야, 정말로!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음흉하게 쳐다봐?”
버럭 화를 내자 아이작이 나지막하게 실소를 터트렸다. 카를라는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연신 뺨을 쓸어내렸다.
웃음기 서린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던 아이작이 서류를 앞으로 밀어냈다.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서류 위에 차곡차곡 쌓더니, 양피지로 만든 공문서 위에 유려한 필체로 서명을 마쳤다.
“카를라.”
“응?”
“이전 분기 사업보고서 확인해봤는데 손해가 거의 없더라. 영지와 관련된 건 대부분 공익사업이라 손실율이 커야 정상인데. 너 정말 영지 운영에 재능있는 것 같아.”
“……그래?”
“응. 원래부터 사업 감각이 있는 건 알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결과가 좋아서. 너라면 안심이야.”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카를라가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아이작이 이런 식으로 칭찬하는 경우에는 늘 그 후에 귀찮은 일을 떠맡길 때가 대부분이었다.
“무슨 일로 칭찬을 다 해? 왜? 뭐 시키려고?”
“여기 서명해.”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서류 더미 제일 위에 올려놓고서 아이작이 양피지를 톡톡 두드렸다.
모서리가 은으로 마감된 양피지는 중요한 공문을 선포할 때만 쓰는 특별한 용지였다. 꺼림칙한 눈으로 아이작과 양피지를 번갈아 바라보던 카를라가 마지못해 양피지로 손을 뻗었다.
글을 읽어내릴수록 커다란 눈이 더더욱 커져 갔다. 마지막 단락에 이르자 카를라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 뜨였다. 카를라는 양피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어조로 툭, 말을 뱉었다.
“미쳤니?”
“그런 말 할 것 같았어.”
“너 작위 때려치울 거야?”
아이작이 건넨 양피지는 헬만의 경영과 운영에 관한 모든 제반 사항을 영주 대리에게 위임한다는 위임장이었다. 선대 당주인 게헤른 유프겐슐트가 의식을 잃은 이후, 아이작이 받은 영주 대리 위임장과 동일한 것이었다.
카를라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을 서류였다. 대리인 명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게 무슨… 영주 대리로 나를 지목하겠다고? 지금 공작 각하께서 내 눈앞에 계시는데 영주 대리가 왜 필요한데?”
“그 공작 각하께서 지식 수련을 위해 아카데미에 갈 예정이거든.”
“아카데미라니? 너 같은 사람이 굳이 왜 대학을…”
말미를 흐린 카를라가 재빨리 아이작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는, 그의 말이 어떤 꿍꿍이를 대변할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깨닫고 가느스름한 눈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너 정말… 진심으로 이러는 거야? 헬만을 떠날 생각이야?”
아이작은 망설이는 기색 따위 전혀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