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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숨을 내뱉고서,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물에 잠겨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달리아의 모습은 보고 또 봐도 현실감이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이전과 한 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섬약한 유리 세공품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아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말아 물고서 반쯤 내리뜬 눈으로 그의 가슴 언저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이작.”
긴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영 맥락이 없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모로 세운 채 되물었다.
“뭐를.”
“그냥 다. 나한테 해 준 것들 전부 다.”
소곤거림과 함께 무릎 언저리를 배회하던 하얀 손이 아이작의 가슴으로 올라와 천천히 살결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움직일수록 그를 내려다보는 아이작의 눈초리가 서늘해졌다. 열기를 더해가는 정욕과 그녀의 의도를 읽어내려는 이성이 부딪혀 뇌리에 혼곤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계속 내 편의를 봐 주고, 날 맞이하러 와 주고. 로렐도 살려 주고. 여태까지 내 옆에 있어 준 것도… 전부. 너무 고마운데.”
단단한 가슴 근육을 더듬던 손가락이 도드라진 목울대를 스쳐 턱에 닿았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로 수면에 자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그리운 것을 보듯 아이작을 쳐다보던 달리아가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줄 수 있는 게 없어. 좋아한다는 말 밖에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속상했어요.”
뭉클한 가슴이 단단한 그의 상체에 틈 없이 달라붙었다. 늘 일정한 거리를 두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달리아는 헐벗은 상태로 서슴없이 아이작을 안고서 조곤조곤한 속삭임을 이어갔다.
“나도 아이작한테 주고 싶어요.”
“…무슨.”
“나라도… 괜찮으면…”
끊어질 듯 말듯 이어지던 속삭임이 아이작의 거친 몸짓으로 끝을 맺었다. 아이작은 달리아의 팔을 붙잡아 상체를 떼어내고서 형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지 마.”
잇새로 신음처럼 말이 쏟아졌다.
“네게 해 준 일들 모두 나한테 필요하니까 하는 일들이야. 널 억지로 취하고 싶어서 수작 부리던 게 아니라고. 달리아, 예전에도 그랬지만, 내 호의를 그렇게 퇴색되게 만들지 마. 자꾸 그러면 속상해.”
시종일관 다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답지 않게 아이작이 진심으로 화를 내며 그녀를 쏘아붙였다. 달리아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나는… 고맙고 좋아서… 그래서 그냥, 아이작이 나를 안아 줬으면 해서.”
당황스러운 표정이 물러나고 이내 서운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잠식해갔다.
“여태까지 계속 받기만 했는데, 안아 달라고 하면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서 그냥 둘러댄 건데 이렇게 화내실 줄은 몰랐어요.”
“…….”
“그… 알겠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아이작이 그녀의 팔을 붙든 손을 치켜 올려 달리아의 고개를 들췄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고 있던 달리아가 반사적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은은하게 붉은 기가 도는 눈시울 속, 녹음이 서린 초록 눈동자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아이작의 얼굴이 비쳤다.
“그거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가까워지는 숨결을 느끼기도 전에, 보드라운 입술이 아이작이 깨물고 있던 그의 아랫입술을 다정하게 빨아들였다.
“…읏…”
급작스러운 접촉에 아이작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러나 달리아는 도망갈 수 없도록 그의 머리를 꼭 붙들고서 거침없이 입맞춤을 이어갔다.
입술 선을 핥듯이 배회하다가 대범하게 틈을 가르고 들어와 잔뜩 굳어 있는 혀를 상냥하게 감쌌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 빨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어와 혼란한 심상 한가운데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애정의 농도가 짙은 입맞춤이었지만 행동 자체는 풋내가 날 만큼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미숙함이 아이작의 흥분을 더욱 가속시켰다.
어쩌지도 못한 채 그녀의 움직임을 감내하고 있던 아이작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완전히 감았다 다시 떴다. 검은 눈동자 안, 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둑한 동공 속에 그조차 제어할 수 없는 거센 욕망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으읍!”
목덜미를 붙드는 손길에 달리아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미처 빠져나갈 새도 없이 아이작이 고개를 틀어 입술을 부딪히더니, 여태까지의 행위는 장난이었다는 듯 삼켜버릴 것처럼 밀도 높은 입맞춤을 퍼붓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점막을 더듬고 혀 위를 쓸다가 거칠게 혀를 얽고 타액을 앗아가는, 다정하다고 해야 할지 거칠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입맞춤이 연거푸 이어졌다.
그 와중에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결을 세듯 부드럽게 척추를 타고 올라와 달리아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으… 흡, 으응…!”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에 진저리를 치자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젖은 입술이 아쉬운 듯 달리아의 입술 선을 더듬다가 볼과 턱을 거쳐 가느다란 목에 한참을 머물렀다.
“달리아.”
아이작은 여린 살을 입술로 깨문 채 쉰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나 정말… 이 이상 가면 멈출 자신 없는데. 그래도 괜찮아?”
잘게 떨리는 말미에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달리아는 목선을 타고 내려오는 입술을 느끼며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그대로 아이작이 자신의 허벅지 위에 달리아를 앉혔다.
수면이 크게 출렁이며 촤아악, 욕조를 채우고 있던 물이 밖으로 밀려났다. 흔들리는 파동에 맞춰 젖은 머리카락이 물속에서 이리저리 너울거렸다.
목을 미끄러져 내려온 입술이 하얀 가슴에 점점이 분홍빛 혈흔을 남기며 아래로 향했다. 망설이듯 가슴 언저리를 맴돌던 입술이 이윽고 부풀어 오른 가슴의 끝을 조심스레 집어삼켰다.
“흑…!”
발작적으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다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한층 더 농밀해진 애무가 몸을 급습했다.
“숨기지 말고. 목소리, 좀 더… 들려 줘.”
끄는 듯한 속삭임과 함께 아이작이 막고 있던 손을 옆으로 치우며 예민한 부분을 거침없이 핥고 깨물었다. 허리를 지분거리던 손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움직이더니 서슴없이 바지 버클을 풀었다.
아이작은 움츠러드는 상체를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며 허벅지에 앉아 있던 그녀의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흐으…윽, 아…!”
은밀한 틈새로 그가 천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버거운 부피감에 차마 다 삼키지 못하고 허리를 치켜세우자 아이작이 탄식을 내뱉는 입술을 상냥하게 빨면서 달리아의 허리를 억지로 내렸다.
도리질 치며 힘들어하는 달리아의 얼굴과 달리 아이작의 얼굴 위로는 나른한 만족감이 퍼져나갔다. 몸속으로 완전히 그를 담은 순간, 붉게 상기된 달리아의 얼굴이 더는 붉어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예쁘네, 달리아.”
물기에 젖어 있는 붉은 눈시울,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작은 입술, 미간을 찡그린 채 서글픈 눈으로 맞닿은 곳을 내려다보는 초록 눈동자까지.
바로 방금 전까지 죽어가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여자라 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한 얼굴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한 순간 아이작의 흥분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그녀가 로렐이 눈을 뜰 날을 기다리듯 아이작 또한 그녀가 다시 생기를 찾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고 다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을 받아들일 거라고, 서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어왔는데.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드디어.
“아이…작. 움직이지…”
허물어지듯이 그의 가슴에 몸을 기댄 달리아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물이 윤활 역할을 대신 해 주긴 했지만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겨운데 움직이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움직이지 말아요, 뜻을 깨달은 아이작이 아랫입술을 깨문 채 바닥을 기는 듯한 낮은 속삭임으로 대답을 돌렸다.
“금방 부드러워질 테니까, 참아.”
무슨 소리인지 의아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아이작이 억세게 달리아를 끌어안고서 몸을 단단히 굳혔다.
맞닿은 가슴으로 열기가 몰리고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목덜미를 스치는 그의 숨결이 지나치게 뜨거운 것 같아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아이작이 그녀를 끌어안은 팔뚝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동시에, 달리아 또한 이상을 느끼고 숨을 멈췄다.
몸 안으로 미지근하게 퍼져나가는 느낌이 이질적이면서도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자아냈다. 어쩔 줄 몰라 허리를 움찔거리는 달리아와 다르게 막상 욕망을 쏟아낸 아이작은 미동조차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끝난 후, 달리아는 몸속에서 좀 전보다 더 크게 부풀어 오르는 무언가를 깨닫고서 탄식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금방 부드러워진다고 했잖아. 이제…”
움직여도 돼?
열기에 뒤덮인 속삭임이 나지막이 귓가를 스쳤다. 답을 기다린 건 아닌 듯 아이작은 바둥대는 여체를 끌어안고서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가쁜 숨과 교성이 번갈아 가며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지나친 자극으로 잘게 경련하는 몸 위에는 아이작이 남긴 순흔이 지독하리만치 가득했다.
아이작은 자꾸 까라지는 달리아의 몸을 추어올리며 그녀가 느끼는 극점을 연신 자극했다.
허리 짓이 가속될수록 울음소리도 커져 갔다. 몇 번째인지 모를 파정과 함께 감각이 통째로 뜯겨나갈 듯한 환희가 달리아의 뇌리를 가득 메웠다.
격동 어린 몸짓으로 인해 연신 참방거리는 물속이 체액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물이 식은 지는 한참 됐지만 몸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후희를 곱씹던 아이작이 그대로 달리아를 안아 들고서 욕조를 빠져나왔다.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나머지는 침대에서.”
여열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아이작이 침대 위에 달리아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