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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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뒷머리를 기댄 채 늘어져 있던 달리아는 그의 부름에도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그 자세를 유지했다. 

“씻겨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아이작은 물기로 젖은 손을 가볍게 털어내고서 달리아의 셔츠에 손을 올렸다.

정갈하게 매듭지어져 있던 리본을 풀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자 부드러운 살결과 함께 봉긋 솟아오른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한데.

옷을 벗기려 들면 붉어진 얼굴로 저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이작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살피며 셔츠와 스커트, 슬립을 모두 벗겨냈다.

마지막으로 속옷을 벗기려는 순간 달리아가 다리를 들어 올리며 그의 손짓을 도왔다. 적극적인 태도에 아이작이 그대로 굳어 눈만 깜빡였다. 그러나 동요는 잠시뿐, 곧 능숙한 손길로 벗은 옷가지를 정리하고서 달리아를 안아 올렸다.

무감한 표정과 다르게 머릿속은 당혹과 욕망이 뒤섞여 아주 엉망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이상한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너무 뜨거우면 말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흥분을 감추며 달리아를 욕조에 앉혔다. 구불구불한 다갈색 머리카락이 연꽃처럼 수면에 퍼지며 천천히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예전과 다르게 바짝 마른 몸이 애잔한 느낌을 불러일으켰지만 음심이 치솟는 건 전보다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아이작이 힘겹게 눈길을 떼고 스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달리아가 무릎을 당겨 다리를 끌어안았다. 움직일 때마다 물결이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천천히 고개가 들리고, 초록 눈동자가 맑은 빛으로 아이작을 투영했다.

“주인님도 들어오세요.”

스펀지를 집은 손이 멈칫했다.

방금…

…방금, 무슨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아이작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반쯤 열려 있던 달리아의 입술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또다시 이어졌다.

“물… 따뜻해요. 주인님도 들어오세요.”

환청이 아니었다.

정말로 달리아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정말로… 말을 했다.

로렐에게 말을 걸거나 간혹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외에는 내내 입을 닫고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이런 상황에서…

왜?

“…달리아.”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손에 쥐고 있던 스펀지에서 비눗물이 뚝뚝 떨어졌다. 홀린 듯 달리아를 바라보고 있으니, 달리아가 아이작의 손목을 살며시 붙들었다.

“같이 씻어요. 욕조… 넓어요.”

발갛게 상기된 뺨과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꼭, 평소의 달리아 같았다.

아이작은 이게 꿈인가 싶어 어쩌지도 못한 채 멀거니 서 있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손목을 붙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제 괜찮아요.”

달리아가 희미한 목소리로 진심을 내보였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저, 이제 괜찮아요.”

재차 날아온 문장에 아이작이 어깨를 슬쩍 늘어뜨렸다. 입매를 굳힌 채 말을 고르던 아이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욕조에 턱을 기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힘든데 괜히 애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계속 응석 부려도 돼.”

“…저 어른이에요. 응석 부릴 나이 아니잖아요. 정말 괜찮아져서 그런 거예요.”

“갑자기… 이렇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겁이 나잖아.”

아이작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고서 수면 아래로 눈을 내리깔았다. 투명하게 어룽거리는 어여쁜 몸이 낭랑한 목소리와 더불어 그의 이성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인님.”

뿌연 수증기 너머로 보이는 작은 얼굴이 생기를 담고 아이작을 바라본다. 달리아는 참방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이작의 코앞까지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로렐, 언젠가는 꼭 일어나겠지요?”

묻는 표정이 애절하다기보다는 어딘가 반신반의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작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일어날 거야. 그 애, 달리아를 무척 좋아하니까. 언니 보고 싶어서라도 반드시 일어날 거야.”

“로렐이 일어나기 전에 제가 먼저 아파서 드러눕거나 하면 어떻게 하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가 간호할게. 둘 다.”

“일어날 때까지?”

“일어날 때까지.”

달리아의 입가에 물안개같이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웃는 얼굴을 눈에 담은 순간, 아이작이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 미소를 눈에 담은 순간 자신이 그동안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성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말은 전부 거짓이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여자인데. 웃는 얼굴만으로도 이렇게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인데.

저런 환한 표정을 놔두고 왜 망자 같은 얼굴로 돌아다니게 두었던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한 번이라도 더 웃을 수 있게 모든 걸 내걸었어야지. 왜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그리 저 자신까지 속여 오면서…

“주인님. 표정이 이상해요.”

느릿하게 눈꺼풀을 달싹이던 달리아가 울 것 같은 아이작의 표정을 보고 서글픈 미소를 떠올렸다. 물에 젖은 손으로 그의 뺨을 덧그리다가, 손을 미끄러트려 아이작의 셔츠를 풀기 시작했다.

단추를 푸는 와중에도 쇄골에 드리운 음영에 손가락을 댔다가, 근육이 도드라진 가슴 위쪽을 어루만지면서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명치를 지나 짙게 윤곽을 드러낸 복근을 쓸면서 슬그머니 뺨을 붉히기도 했다.

생기 넘치는 표정과 눈빛, 나붓한 손짓들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품을 열어 억세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흡,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소리마저 애틋해 기어코 눈물이 맺혔다.

“주인님. 지금 우시는 거예요?”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치켜든 달리아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눈가를 어루만졌다. 처음 다시 재회했던 그 날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다.

아이작은 손가락에 기대듯 뺨을 치대며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꺼풀을 달싹이자 달리아의 손과 맞닿은 곳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그의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신기하네… 슬플 때만 우는 줄 알았는데 기쁠 때도 눈물이 나는구나.”

달리아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전에는 미처 닿지 못했던 손길이 끝내 떨어지는 눈물 줄기에 닿았다. 눈물인지 그냥 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턱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축축이 적셨다.

깊게 숨을 내쉰 아이작이 이내 눈물을 떨구고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뺨을 배회하는 작은 손을 붙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입술에 새길 듯 곳곳에 입을 맞추고 나서야 간신히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씻겨 줄게.”

다시 스펀지로 손을 뻗은 순간 달리아가 재차 아이작의 팔을 붙잡았다.

“주인님. 주인님도 들어오세요.”

“…왜 자꾸 유혹해. 힘들어, 나.”

참는 것도 한계인데 자꾸 들어오라고 홀리듯 말하니 인내하기가 힘들었다. 힘 빠진 웃음을 내뱉으며 대꾸하자 달리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떨군 채 눈만 들어 올렸다.

“어차피 씻겨 주실 거면 제 뒤에서 씻겨 주세요. 저 혼자만 벗고 있으니까 부끄러워서 그래요.”

붉게 상기된 얼굴이 수증기 덕분에 어딘가 농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이작은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그녀의 말을 어떤 식으로 수용해야 하나 고민했다.

달리아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어깨에 걸려 있던 그의 셔츠를 낑낑대며 벗겨냈다. 바지 버클까지 손을 댔다가 그건 좀 부끄러운 듯 손을 떼고서 허공에 뜬 손을 쥐락펴락했다.

아이작은 느슨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그대로 욕조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달리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그녀의 뒤에 앉더니 그대로 허리를 당겨 상체를 밀착했다.

촤아악, 커다란 체구의 난입으로 욕조에 담겨 있던 물이 흘러넘쳤다.

“이제 됐어?”

장난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며 아이작이 달리아의 정수리에 턱을 기댔다.

달리아는 등에 닿는 탄탄한 가슴을 느끼고서 어깨를 움츠렸다. 허리춤에 느껴지는 단단한 남성이 그의 흥분을 은연히 알리고 있었다.

위축된 모습을 기민하게 감지한 아이작이 긴장을 풀기 위해 허리를 붙잡고 있던 큼지막한 손을 올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괴괴한 침묵 사이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주인님.”

“응?”

“주인님은 제가 왜 좋으세요?”

문득 날아온 질문에 아이작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길을 멈추고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어떤 의도로 질문을 던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깊은 고민 없이 곧바로 답을 뱉었다.

“글쎄… 그냥.”

“그냥요?”

이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입속으로 단어를 고르던 아이작이 신중하게 한 글자씩 말을 읊어나갔다.

“나도 잘 모르겠어. 원래 다 그렇지 않을까. 딱히 이유 있어서 사람을 좋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

“그런 질문 의미 없는 거 달리아도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봐?”

달리아는 말없이 가만히 무릎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손길에 따라 잔잔히 퍼져나가는 파동을 쳐다보며 아이작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달리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허스키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달리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아이작은 짙은 미소를 머금고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를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니까.”

이런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좋다 싫다, 슬프다 기쁘다, 어떠한 단어로 형용하기 힘든 이런걸. 다만 그 감정이 도출해 낸 문장은 퍽 단조로웠다.

넌 나를 살아있게 해.

이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참 단순하고도 원초적인 감정이구나 싶었다.

“주인님은 그렇게 저를…”

“아이작.”

새싹의 싱그러움을 담고 있는 초록빛 눈동자가 저절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이작은 그녀의 눈동자에 눈을 못 박고서 말했다.

“주인님 말고 아이작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다음에 정신이 들면 꼭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한 거 기억나?”

멍하니 앉아 있는 달리아에게 수없이 많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중,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말이 주인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요청이었다.

달리아가 망설이는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곧,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작.”

“응. 달리아.”

“…아이작.”

이름을 읊을수록 아이작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아이작, 그녀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이름은 저주받은 어미가 지어 준 이름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음절로 귓가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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