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85/97)

85

카를라는 소름이 돋아난 팔을 쓸어내리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관리했다. 

엘리제 지락탈이 마음에 안 들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달리아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 돼지 공자와 평생 우울한 삶을 살아가야 할 엘리제의 미래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작은 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무튼, 추밀원 건은 내 선에서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전달할 건 그것뿐이야?”

“…달리아는 좀 어때?”

내내 초연하던 아이작의 얼굴 위로 일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펜을 응시하던 검은 눈동자가 책장 너머로, 책상으로, 바닥으로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여전해. 내내 동생 옆에만 붙어있어. 손발 닦아 주거나 책 읽어 주거나…”

“괜찮은가 보네.”

“글쎄…”

아이작은 자조 섞인 미소를 떠올린 채 혼잣말처럼 작게 속삭였다.

“괜찮다고 할 수는 없지. 가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면서 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빨리 안정제를 놓지 않으면 자해하려고 들거든.”

벌써 반년째 눈을 뜨지 못한 로렐은 죽음과 삶의 애매한 경계에 머물러 달리아를 괴롭히고 있었다.

달리아는 모든 게 자기 때문이라며, 마지막 발작이 왔을 때 자신이 깜박 잠들지만 않았어도 살릴 수 있을 거라며 끊임없이 자책하다가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렸다.

총기를 잃은 초록 눈동자가 유일하게 비추는 건 아이작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에 빠진 그녀의 동생, 로렐뿐이었다.

펜 뚜껑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작이 날카로운 펜촉 끝을 검지로 문질렀다. 검은 잉크가 고인 자리에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그래도.

망가져 버렸어도 그녀는 여전히 달리아였다. 아니, 이제는 넋이 빠져나가 더 이상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동생에게만 붙들려 있으니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 지극히 평화로웠다.

웃는 얼굴을 보지 못해 안타깝기는 하지만 옆에 붙들어 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펜촉을 바라보는 무거운 표정 위, 굳게 다물려 있던 입매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아. 달리아도, 나도.”

* * *

창문을 열자마자 찬기를 머금은 바람이 후욱, 강하게 뺨을 스쳐 지나갔다.

이리저리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정리하며 달리아가 창 너머의 풍경을 지그시 관조했다.

공작 저에서 일할 때에는 늘 숲이 우는 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고, 우브랑에 있을 때에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그러나 병원은 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는 초록빛은커녕 도시의 삭막한 그림자만 널려 있어 볼 때마다 황량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달리아는 고개를 틀어 건물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하는 건 정원과 가까이 붙어있는 작은 호수였다. 풍경이 썩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벌써 봄이네.”

창가에 턱을 괸 채 말문을 열었다.

“기억나니? 작년 이맘때쯤 여관 화단 앞에 꽃씨를 뿌렸잖아. 물만 잘 주면 사계절 피어 있다고 했는데. 그 꽃 아직도 남아 있겠지?”

호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회상에 젖어 부연 빛을 발했다. 원래부터 흐릿한 동공이 과거를 더듬을수록 더더욱 흐리게 풀어졌다.

“우브랑은 늘 여름이라서 몰랐는데 수도는 참 겨울이 길다. 그런데 헬만은 훨씬 더 길어. 북쪽에 있어서 그런지 더 춥고. 그런데 눈은 헬만보다 수도가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아.”

혼잣말을 읊던 달리아가 창가에서 몸을 돌려 침대로 다가왔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로렐은 썩 평화로워 보였다. 앙상하게 메마른 턱 아래로 방금 전 억지로 먹인 죽이 지저분한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달리아는 젖은 수건으로 로렐의 얼굴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살이 점점 더 말라서 어떻게 해. 키 클 거라고 그렇게 잘난체했으면서 이대로는 평생 언니보다 작겠다. 그러게 언니가 말했잖아. 키는 그렇게 빨리 크는 게 아니라고…”

말미를 흐리며 말문을 닫았다. 얼굴에 만연해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꺼지고 참담한 빛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내가 그때 정신만 차리고 있었어도.

나보다 더 커서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안 되는데.

또다시 자책에 휩싸일 것만 같았다. 눈물을 삼키며, 조금 더 바지런히 수건을 움직였다. 깨끗한 물에 수건을 꼬옥 짜서 다시 한번 얼굴을 닦고 흐느적거리는 몸을 일으켜 옷도 갈아입혔다.

할 일을 마치자 또다시 텅 빈 시간이 되었다. 달리아는 의자에 기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 또 이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어느새 깊은 어둠에 침잠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잡히는 대로 스스로를 찌르고 때리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아야 하는데.

주인님이 걱정하실 텐데…

아무리 상기해 봐도 상념을 막을 길이 없었다. 어차피 그런 상황이 되면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감시자들이 쳐들어와서 자신을 구속할 텐데, 아무래도 좋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고의 끈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다가 이내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또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리아.”

기차역에서 곧장 병원으로 달려온 듯, 아이작이 거친 호흡을 정돈하며 방에 들어섰다.

아직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지 못한 달리아는 멍하니 그를 눈에 담으며 사고의 끈을 붙잡으려 애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응? 나 보여?”

“…….”

“이리 와.”

나직한 부름에도 달리아의 넋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이작은 한숨을 삼키며 자신이 먼저 다가가 달리아를 안아 올렸다.

달리아가 흠칫, 어깨를 떨더니 반사적으로 아이작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이작은 달리아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서 그리운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일주일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달리아 생각만 나서 엄청 힘들었어. 달리아는 나 보고 싶지 않았어?”

“…….”

“그래. 나도 그랬어. 혼자 있으면 시간이 워낙 더디게 가잖아. 그렇지?”

아무 답이 없음에도, 아이작은 희미한 웃음을 짓고서 달리아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냥 나도 다 내려놓고 여기 있을까.”

다갈색 머리카락이 코끝을 간질이는 느낌이 무척 포근하면서도 안온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머리카락 사이, 살풋 튀어나온 귀 언저리를 입술로 더듬으며 아이작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힘들 때 혼자 있으면 안 좋아. 자꾸 나쁜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니까… 나, 다 그만두고 달리아 옆에만 꼭 붙어 있을까?”

가만히 안겨 있던 달리아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약하지만 확실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거절당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작은 쓴웃음을 머금고서 달리아를 안은 채 병실을 빠져나왔다.

“로, 로렐이…”

문을 나서자마자 시체처럼 안겨 있던 달리아가 퍼뜩 허리를 세우며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병실 쪽으로 뻗었다.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된, 동생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애달픈 본능이었다.

“간병인이 간호해 줄 거야. 로렐도 가끔은 언니랑 떨어져서 혼자 쉴 때도 있어야지. 부끄러움이 많은 애라면서. 그렇지?”

“…….”

“주말이니까 달리아는 나랑 같이 별저로 가는 거야. 가서 잘 먹고, 잘 쉬어야 또 일주일 동안 힘내서 간병하지. 알지?”

아이작은 등을 토닥이며 아이를 어르는 듯한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주말마다 똑같은 말로 그녀를 설득해왔다. 때로는 가기 싫다며 고집부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순순히 따라왔다.

다행히 오늘도, 달리아는 얌전히 안긴 채 고개를 숙였다.

병원을 벗어나 비서가 기다리고 있던 차에 몸을 실었다. 별저에 도착할 때까지도 달리아는 인형처럼 그에게 안긴 채 침묵을 일관했다.

유프겐슐트 공작가의 수도 별저는 병원을 둘러싼 호수 바로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원 너머로 비치는 수면이 황혼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빛을 뿌려댔다. 병실에서 보이는 것과는 퍽 다른 풍경에, 달리아는 스커트 자락을 움켜쥔 채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여기서 보는 호수가 마음에 드나 봐. 매일 여기 오면 한참 동안 보고 있네.”

“…….”

“…그러게. 예쁘네. 병실에서 봤을 때랑 풍경이 많이 다르구나.”

그를 등지고 선 달리아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달리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백치같이 구는 태도와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수많은 말과 상념이 용오름치고 있었다. 그저 정신이 한계에 치달아 형언할 수 없는 것뿐.

주변 사람들은 달리아가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했지만, 아이작이 보기에 그녀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달리아는 과거에 자신이 한계에 다다라 현실을 끊어냈을 때의 행동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늘이 설마 그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해서, 아이작은 달리아를 볼 때마다 꽤 아이러니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한참 동안 호수를 바라보던 달리아가 아이작의 손을 붙잡으며 몸을 돌렸다. 자그마한 어깨 너머로 비친 일몰이 그녀의 하얀 뺨을 붉게 물들였다.

노을을 보면서 뭘 떠올리고 있었을까.

물어보고 싶지만 어차피 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기에, 아이작은 물음을 삼키며 아쉬운 미소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주말의 일과는 늘 단순했다.

오후 늦게 수도에 도착해 달리아를 끌고 별저에 오면, 일단 좋아하는 걸 잔뜩 먹인다. 평소에 먹는 둥 마는 둥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달리아였기에 주말 동안이라도 끼니를 잘 챙겨야 했다.

그다음은 목욕이었다.

달리아가 가장 싫어하지만 아이작이 꼭 해야 한다고 유일하게 강요하는 일이기도 했다. 씻는 게 싫어서 거부하는 게 아닌, 아이작이 씻겨 준다며 그녀를 괴롭히기 때문이었다.

“달리아. 이리 와.”

아이작이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손등을 넣은 채 달리아를 불렀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아이작은 찬물을 틀어 온도를 조금 낮춘 다음 소파 앞에 앉아 있는 달리아에게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