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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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길었던 북부의 겨울이 따스한 봄비로 끝을 맺었다. 

가지 끝에 매달린 초록이 촉촉이 젖어 싱그러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벌써 4월, 파종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시기가 도래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주인님.”

집사의 인사를 기점으로 홀에 늘어서 있던 풋맨들이 나란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주인이 없는 사이에 봄맞이 단장을 마친 저택은 묵직한 겨울 카펫과 벨벳 커튼 대신 광택이 도는 실크 커튼과 푸른 태피스트리로 봄의 재래를 실감케 하고 있었다.

화려한 변화에도 주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유프겐슐트 공작은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사용인들을 지나쳐 집무실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뒤따르던 보좌관이 주인을 대신해 집사와 시녀장, 하녀장에게 예를 표했다. 공작이 저택을 비운 주말 이틀 동안 저택에서 일어난 일들은 보좌가 대신 보고받아 처리하는 게 최근의 수순이었다.

복도에 내리쬐는 햇살이 유달리 따스했다.

곧 있을 파종제는 영주가 직접 참관해야 하기에 너무 추운 날은 피하는 게 관례였다. 창을 내다보며 날씨를 가늠하던 공작이 뒤따르던 비서들에게 말을 걸었다.

“의례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예. 예정대로 이달 말 수요일에 치를 예정입니다. 참석 명단은 일전에 보고드린 바와 같습니다.”

“임명식은?”

“식이 끝나는 대로 주도로 이동해 임명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새로운 시장 후보들은 가신들이 선발한 명단 내에서 각하께서 지시하셨던 조건으로 따로 추렸습니다.”

공작이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질없이 준비하길 바랍니다. 가신단 관련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디테른 자작이 올봄에 있을 정례 회의 안건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었습니다. 상정된 안건으로는…”

비서가 보고 사항을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공작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보고를 경청했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부정하며 첨언을 덧붙이기도 했다.

작위를 이은 지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일을 지시하는 태도에서 깊은 연륜이 배어 나왔다. 선대 공작이 타계하기 전, 몇 년간 실질적으로 영지 운영을 도맡아온 이가 현 유프겐슐트 공작이었으니 이런 여유로운 태도는 어쩌면 썩 자연스러운 것일 터였다.

비서들은 눈을 내리깐 채 서류를 갈무리하는 것으로 경외를 대신했다.

집무실 문 앞에 당도한 공작이 자리를 비워 달라는 듯 집무실 옆의 보좌관실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를 신호로 보좌관과 비서 두 명, 부 보좌 한 명과 서기관 두 명이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호위 둘이 집무실 옆에 대기 자세를 취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사람을 떨쳐냈다. 공작은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널찍한 집무실 안은 빼곡히 들어선 책장들로 집무실이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공작은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전실을 지나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커프스를 매만지는 손길에 언뜻 피로가 섞여 있었다. 커프스 버튼을 떼고 타이에 손을 올린 찰나, 공작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상대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서야 집주인이 누구인지 영 알 수가 없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던 카를라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추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작은 가벼운 한숨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타이를 풀던 손길을 이어나갔다. 손수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거는 모습에 카를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어지간하면 수발들 시종 한두 명 정도 데리고 다니지 그래. 사용인들이 얼마나 불편해하는 줄 알아?”

“손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시종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핑계는. 그냥 달리아 외에 다른 사람이 네 시중 드는 게 싫은 거겠지.”

아이작은 반박하는 대신 실소를 흘렸다. 부정하지 않는 모습이 고까워 카를라 또한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내린 아이작이 소매를 걷으며 시간을 살폈다. 정오가 막 지난 시간, 새벽같이 눈 뜨자마자 돌아온 건데도 벌써 이 시간이었다.

“시비 걸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왔어?”

시큰둥한 물음에 카를라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내밀었다.

“다음 주 주말에 추밀원에서 사냥대회를 연다고 해서. 당연히 공작님도 참석하시겠지요, 하고 초대장이 날아왔거든. 갈 거지?”

“주말은 안 돼. 알잖아.”

단호한 어조에 카를라가 고개를 삐뚜름히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너 작년 겨울에도 정례 회의 빠졌다고 그 인간들이 벼르고 있어. 이번엔 절대 빠지면 안 돼.”

“주말은 안 돼.”

“너 요즘 반년 동안 계속 주말마다 수도 별저에 가 있는 거 누가 몰라서 그래? 그래도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 애도…”

“카를라.”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 끝에 언뜻 한기가 비쳤다.

카를라는 지지 않으려 애쓰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이작은 표정을 비운 얼굴로 그녀의 시선에 응수했다.

이런 눈싸움의 종결이 늘 그렇듯, 카를라가 먼저 시선을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없다고 달리아한테 무슨 일 나니? 어차피 주중에는 떨어져 있잖아. 너는 여기에, 걔는 수도 별저에. 한 주 쉰다고 무슨 큰일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불안해서 안 돼.”

“그 애 동생,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다면서. 계속 눈 못 뜨던 애가 너 잠깐 없다고 눈 뜰 리는…”

“…….”

“…알았어, 그만. 그만할게.”

냉랭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에 카를라가 백기를 들고 입을 다물었다.

달리아 얘기만 나오면 예민해지기 십상이라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 계속할 건데. 주말마다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들지도 않니?”

“어쩔 수 없어. 달리아가 여긴 싫다고 하니까. 계속 병원에 있고 싶대.”

“…여기나 거기나 무슨 차이야. 의사야 데려오면 그만이잖아. 어차피 그 병원도 우리 가문이 후원하는 곳인데.”

말하면서도 의미 없는 물음이라는 걸 알았다. 카를라는 찌푸린 미간을 손으로 누르며 사고를 전환했다.

주말마다 수도에 머무른다는 점 외에 아이작이 변한 점은 딱히 없었다. 가문과 영지 운영이야 늘 기계적으로 처리하고는 했지만 달리아를 찾아냈다는 안도 덕분인지 최근에는 꽤 적극적으로 영주 일에 임하고 있었다.

흠이라면 이렇게 주말 사교 모임을 전부 파한다는 점 하나뿐이었다. 대부분 별것 아닌 일이었고 카를라가 대신 참석할 수 있는 모임이었기에 여태까지는 그녀가 대신해 왔다.

그러나 곧 다가올 추밀원의 모임은 그럴 수 없었다.

파혼 이후, 꽤 많은 손해를 감수하고 지락탈의 의향을 따랐으나 서먹한 분위기는 해소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지락탈이야 어떻게든 좋게 넘어간다 쳐도 추밀원 내의 시선이 차가워질 게 걱정이었다.

“추밀원 내에서 유프겐슐트의 입지가 약해질까 봐 걱정이야?”

생각을 읽은 듯한 말에 카를라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작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비스듬히 책상 끝에 허리를 기댔다.

“걱정 마. 사냥대회 따위 갈 필요 없어. 그쪽은 아마 다른 화제로 정신이 없을 거거든.”

“왜?”

“지락탈 후작가와 놋테 후작가의 결합으로 아주 분위기가 좋을 테니까. 유프겐슐트가 가 봤자 분위기만 흐리겠지.”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깜빡이던 카를라가 뒤늦게 탄성을 흘렸다.

“엘리제 지락탈이 놋테 공자와 결혼한다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조합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놋테 공자, 그 돼지 공자의 면상을 떠올리니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카를라의 약혼자였던 그 남자는 집안이 좋다는 점 외에는 전부 최악이었다. 거만하고 손버릇이 나빠서 야회 중에도 슬쩍슬쩍 카를라의 몸을 더듬거나 은밀한 곳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런 돼지 공자와 엘리제 지락탈이라니.

중부의 재력가로 유명한 놋테 후작가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신흥 귀족 중 하나였기에 품위를 우선시하는 지락탈 가와는 영원히 연이 없는 귀족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선대가 너를 놋테 가에 팔아치우려 했던 이유가 동부까지 철로를 확장하고 싶어서였는데.”

아이작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서 카를라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욕심은 나는데 영지 예산을 그쪽으로 돌리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거지. 나도 그 의견에 동조했고. 그 결혼 계약은 너를 결혼 매물로 넘기는 대신 철로 공사 비용을 놋테 후작가가 대는 거였지.”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 욕심을 지락탈도 가지고 있었거든. 그 사람, 유프겐슐트가 하는 일은 다 따라 하고 싶은가 보지.”

흘리듯 말하며 아이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놋테 후작은 추밀원에 연줄을 대고 싶어서 안달이었는데 너와 파혼했으니 실망이 컸겠지. 그런데 마침 엘리제 지락탈도 유프겐슐트 공작에게 파혼당했고. 적의 적은 아군이라잖아? 게다가 지락탈 입장에서는 유프겐슐트가 포기한 동부 철로 확장을 자기가 진행할 수 있을 테니 손해 볼 게 없어.”

“…하…”

“이해관계를 슬쩍 흘리니 순식간에 청혼장이 오가던데.”

멍하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를라는 그의 화법이 묘하다는 생각을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네가 둘을 연결한 거야?”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잉크 뚜껑을 열었다. 카를라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왜? 무슨 이유로?”

“오브릭 자작에게 했던 짓을 조금 응용해본 거야. 돌려받을 게 있기도 하고.”

“돌려받을 거? 그건 무슨 소리야.”

아이작은 대답 없이 김빠진 웃음만 내뱉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 이어지자 답답함을 못 이긴 카를라가 아이작에게 다가가 책상을 툭툭 쳤다. 힐끗 시선을 던진 아이작이 다시 책상으로 눈을 내리깔고 말문을 열었다.

“예전에 좀 짜증 나는 일이 있었거든. 달리아가 저택을 떠나기 전, 엘리제 지락탈이 달리아의 뺨을 내리쳤다고 하던데.”

아이작은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펜에 잉크를 채우며 말했다.

온화한 표정과 달리 뇌리에는 붉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며 우물쭈물하는 달리아의 모습이 떠올라 울화를 치밀게 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품위니 가문이니 그딴 것들을 추앙하는 여자였으니 놋테 가에 시집가는 게 꽤나 굴욕일 테지. 게다가 그 돼지 공자 손버릇이 꽤 나쁘다는 소문이 돌던데 엘리제 지락탈도 마찬가지니까. 어울리는 한 쌍이 만난 거야.”

“너…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거라고?”

“버릇없이 자란 아이는 똑같이 버릇없이 자란 아이에게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려.”

가늘게 뜬 눈시울에 설핏 웃음기가 서렸다. 달칵, 잉크 뚜껑을 닫는 소리가 잔잔한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엘리제 지락탈이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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