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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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시선을 돌리는 그를 바라보며 달리아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라리 타박이라도 했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을.

침묵을 택한 그의 모습에 더욱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마주보기가 꺼려져 달리아는 상체를 일으켜 머쓱한 얼굴로 전경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딜까.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창밖으로 컴컴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는 방 안에서 희미하게 소독약 냄새가 났다.

“병원이야. 로렐은 옆 방에서 지금 치료 중이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작이 물컵을 건네며 의문에 답을 내주었다.

“기관지 협착이 심해서 힘들 거라고는 했는데 일단 닿는 데까지는 해 보겠대. 유명한 의사들이 여럿 달라붙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아이작은 차분한 말로 안심시키며 흘깃 달리아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물컵을 든 채 가만히 상념에 젖어 있던 달리아는 스스로 뭔가를 납득한 듯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물이 담긴 유리잔이 손이 움직일 때마다 탁한 빛을 뿌려댔다. 물을 한 모금 넘긴 달리아가 발치에 시선을 둔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인님이 나타나셔서 병원에 데려다주시고… 그리고 이렇게 제 앞에 서 계시니까.”

늘 노을 속에서 허상으로만 비추던 그가 실체를 갖고 눈앞에 서 있었다.

부드럽게 반쯤 흘러내린 흑발, 유난히 하얀 피부 위에 자리한 화사한 이목구비가 탄탄한 체구와 대비되어 더욱 선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살짝 야윈듯한 얼굴은 느슨한 태도와 함께 어딘가 퇴폐적인 관능미를 더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였다. 아이작 유프겐슐트.

도련님이자 자신의 주인.

“나도 그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창가에 몸을 기대고 있던 아이작이 가까이 다가와 천천히 몸을 숙였다.

“매일 꿈에서만 보던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네.”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현실을 일깨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달리아를 쳐다보며 아이작이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파혼하고, 사람 풀어서 어디 있나 한참을 뒤졌어. 다 때려치우고 우브랑으로 직접 잡으러 갈까, 잡아서 다시 가둬 둘까 하루에도 수백 번 고민하고 울고 난리 쳤는데…”

“…파혼이라니… 무슨.”

“그런데 이렇게 막상 앞에 두니까.”

아무래도 좋을 물음을 던지려는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아이작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숱한 상념 끝에 그녀를 마주한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냥 좋아서. 너무… 좋아서…”

뻐끔거리는 찢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숨이 유독 달콤하게 느껴지는 건.

이게 너라서. 달리아 벨로흐여서 그런 거겠지.

“이럴 거면.”

아무리 봐도 질리는 법 없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아이작이 눈을 감았다 다시 천천히 떴다. 다시 뜬 눈매 속에는 갈망하는 빛 대신 분개의 응어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비난과 침묵을 저울질하던 아이작이 전자에 추를 기울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자신을 배반했다는 생각에 설움이 몰려들었다.

“버리고 떠났으면 두 번 다시 돌아보지 말고 잘 살았어야지, 왜 여지를 남겨서 사람을 괴롭게 해. 이렇게… 돌아올 거면. 그렇게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그런 식으로 떠나면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되는 줄 알아?”

헤어진 후, 그녀도 괴로웠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괴로움의 경중을 따지면 자신만 할까. 달리아가 들고 떠난 건 어떤 감정도 기억도 아닌 아이작의 삶 그 자체였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죽지 못해 사는 자신의 육신 하나뿐이었다.

하루하루 바짝 말라서 이내 부스러기가 된 마음을 어떻게든 긁어모아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알량한 믿음 하나만으로 내일을 기약하는. 그런 지옥보다 더 괴로운 나날을 그녀가 거쳐왔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너만 생각하면서 사는 게 좋을 때도 있었지.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니까 정말, 정말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사는 게 얼마나 거지 같은 줄 알아? 결국 돌아올 거면, 그럴 거였으면.”

“…주인님.”

“너 없이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어. 내가 필요 없다고, 나랑 함께 있으면 괴롭다고 해서 찾으러 갈 수도 없었어. 혹시 네가 죄책감 가질까 봐 잘 살려고 했다고.”

“저는….”

“그런데 결국 이 모양이야.”

바짝 다문 입매 끝이 우묵하게 파였다. 거친 숨을 들이켠 아이작이 그녀가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물음을 뱉었다.

“왜 돌아왔어?”

잘게 요동치는 초록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작은 달리아의 팔을 붙들고 그녀의 심리를 대신 읊었다.

“내가 좋아서 돌아온 거 아니잖아. 그냥 내가 필요해서 돌아온 거겠지.”

“…….”

“나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어?”

“…그건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주인님을…!”

무심코 반박하려던 달리아가 그와 눈을 마주치고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검은 머리카락 너머, 언뜻 보이는 눈시울 아래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 투명한 물기가 고여 있었다.

“좋아한다고?”

아이작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회피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늘진 음영 아래, 반짝이는 무언가가 천천히 그의 뺨을 적시며 내려왔다.

“또. 다 부질없는 말인 거 알면서도. 그따위 알량한 말에 기뻐하는 내가 등신같이 느껴져.”

속삭이듯 말을 내뱉고서 조금 더 아래로 고개를 숙인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몸짓이 안타깝게도 턱을 타고 방울져 떨어지는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달리아는 깨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놓았다.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스스로 눈물을 닦아 줄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어 손을 내렸다.

그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더욱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필요하니까 다시 그를 찾아왔다. 제멋대로 떠났다가 제멋대로 돌아온, 한없이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벙긋거리던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모두 변명으로만 들릴 것 같아 쉬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들릴 듯 말듯 아주 작은 흐느낌만이 괴괴한 침묵을 희석했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에 질식할 것만 같은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환자분이 의식을 차렸습니다.”

보좌관이 달리아를 알아보고 잠시 움찔하다가 태연히 보고를 읊었다. 환자라는 말에 달리아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로렐이요? 로렐이 깨어났어요?”

“예. 말은 못 할 테지만 면회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군요.”

“어떻게… 그럼 지금…”

“가 봐.”

아이작이 눈가를 세게 문지르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손이 스쳐 지나간 얼굴은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덤덤했다.

“걱정했잖아. 난 신경 쓰지 말고.”

눈치를 살피던 달리아가 그의 고갯짓에 용기를 내 침대를 벗어났다.

보좌관이 눈짓으로 복도 안쪽의 방을 가리켰다. 서너 개의 방이 전부인 작은 병원과 다르게,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병원은 복도가 무척 넓고 휑했다.

이렇게 넓은데도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게 이상했다. 달리아는 걱정 반, 안도 반인 심정으로 병실 문을 밀었다.

“……로렐.”

방 끝에 놓인 침대 위에 로렐이 잠들어 있었다.

기차 안에서 봤을 때처럼 안색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파리한 기운이 감도는 건 여전했다. 코 밑에 약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액체가 말라붙어 있는 게 신경 쓰여, 소매로 살살 자국을 긁어냈다.

“로렐. 언니 말 들려?”

로렐, 이름을 강하게 외치자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칫 떨렸다. 늘어진 손을 붙들고 한 번 더 이름을 말하자 드디어 초록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을 잃어 흐릿해진 동공이 아주 느린 속도로 제 위치를 찾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말을 하고 싶지만 힘이 없어서 입을 움직일 수 없는 것 같았다. 달리아는 침대 옆에 늘어서 있던 스툴을 끌어당겨 로렐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말하지 말고 고개만 끄덕여 봐. 그래. 숨 쉬는 거 힘들지는 않고?”

달리아는 눈빛과 깜박임으로 답을 유추해가며 로렐의 안부를 물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유독 커진 게 의아했지만 아프지 않다는 걸 보면 그냥 치료 후유증인 것 같았다.

가만히 손을 쓸자 로렐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어 보였다. 이윽고, 잔뜩 갈라져 쉰 목소리가 작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리… 흐도에… 온, 거야?”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달리아가 미간을 좁힌 채 단어를 유추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이며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수도야. 공작님이 편의를 봐주셔서 바로 병원으로 왔어. 이제… 로렐, 아픈 일 없을 거야. 나아질 수 있어.”

로렐이 얼굴을 구겼다. 어디 불편한 데가 있나 싶었는데, 푸흐 하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보니 웃고 싶은데 얼굴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아서 눈살을 찌푸린 것 같았다.

“나으면… 흐도니까. 도물… 갈래.”

“어디? 동물원?”

“응… 도물…”

말할 때마다 힘겨운지 코끝을 연신 찡그리면서도 로렐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동, 물, 원, 또박또박 새어 나온 단어에 달리아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애잔하면서도 측은한, 그러면서도 벅찬 희망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음이 가득한 터널, 그 끝없는 터널을 지나 드디어 바깥으로 나온 듯한 해방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자.”

작고 마른 손을 억세게 붙잡아 끌어당겼다. 살가죽밖에 남지 않은 손등에 입술을 묻고서 선언하듯 읊조렸다.

“다 나으면 꼭 동물원 가자.”

로렐이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바라보는 달리아의 얼굴 위로 서글픈 미소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기력이 다한 건지 로렐이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쌕쌕거리던 호흡이 이내 규칙적으로 변하고, 달리아는 숨을 죽인 채 동생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빨리 낫기만 해. 언니가 어디든 데려가 줄 테니까.”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온 혼잣말에 달리아의 눈가에 웃음기가 내려앉았다.

그래. 가을이 지나기 전에 같이 동물원에 가야지.

공화국에서 가장 커다란 분수도, 장난감이 잔뜩 모여 있다는 백화점도, 없는 책이 없다는 서점 골목도 꼭 데려가야지.

데려가고 싶은 곳, 함께하고 싶은 곳을 끝없이 상기하며 로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작고 끈적거리는 손안에서 어린 동생의 체취가 물씬 풍겨 나왔다.

그러나 바람이 무색하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로렐은 눈을 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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