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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딘가로 눈짓을 보내자,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제복을 입은 남자 여러 명이 흩어진 짐을 수습하고 달리아에게서 로렐을 빼앗아 들었다. 기겁하며 로렐을 끌어당기자 아이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저지했다.
“병원으로 이송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로렐이 많이 아파요…! 많이 아파서, 빨리 가야 해요! 당장…!”
“갈게. 곧바로 갈 거야. 혹시 몰라서 의사도 데리고 왔으니까 안심해.”
의사라는 말에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조금 옅어지는 것 같았다.
표정이 풀어지는 걸 알아챈 아이작이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웃는 듯 보였던 그의 얼굴 위로 서글픈 기색이 내려앉았다.
“얼굴이 아주 난리네. 그러게 그냥 곁에 있으면 되는 걸 왜 사서 고생을 해.”
“…주인, 흐으, 주인님…!”
“울지 마.”
속상하니까 그만 울어.
흘리듯 중얼거리며 그가 달리아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힘없이 끌려온 몸뚱이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크게 들썩이며 서러운 울음소리를 자아냈다. 달리아는 아이처럼 그의 품을 파고들며 섧게 울었다.
이 냄새, 이 목소리. 꿈이 아니었다.
마주치면 곧바로 경멸의 시선을 던질 거라 생각했던 그는 기억 속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더없이 상냥하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응석을 억지로 토해내게끔 하더니 이렇게 따스하게 자신을 안고 있었다.
그게 너무 슬퍼서, 안도 되어서. 꼴사나운 자신이 밉지만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또 도망칠 거야?”
울고 있는 얼굴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빠르게 고개를 젓자 아이작이 목을 울려 낮게 웃었다. 흡족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젖은 얼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촉촉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눈썹을 스쳐 눈물 고인 눈시울에 한참을 머무르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와 입술을 겹쳤다. 흐윽, 탄식 섞인 숨을 삼킨 뒤 여운을 남기듯 아주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하체를 받쳐 드는 손길에 자연스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볍게 몸을 들어 올린 아이작이 정수리 위로 쪼는 듯한 입맞춤을 거듭했다. 소중하게 보듬는 몸짓이 낯설면서도 기분 좋아서, 달리아는 스르르 눈꺼풀을 내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야성적인 우드 향과 겨울 숲을 단단히 응축해놓은 듯한 그의 체취가 평온을 불러일으켰다. 몽롱한 머릿속에 감미로운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걱정하지 말고… 조금 쉬어.”
노곤히 풀어지는 의식 너머로 살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들어봤으면 좋겠다 싶은 말이 귀를 스쳤다.
명멸하는 뇌리에 ‘보고 싶었어’, 작은 속삭임이 흘러드는 걸 마지막으로 달리아는 모든 감각을 닫고서 잠에 빠져들었다.
* * *
처음 그녀가 도망쳤을 때, 아이작을 지배한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쥔 것 없이 살아왔기 때문일까. 아이작은 살면서 욕구를 크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욕구만 충족하며 살 뿐 소유욕, 지배욕, 경쟁욕 등의 사회적 본능 따위는 활자로만 인식하며 살았다.
무욕한 삶은 우습게도 잃을 게 없는 자의 배짱으로 변모해 아이작을 그 어떤 상처에도 굳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를 상처입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인식을 뒤집은 사람이 달리아였다.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아이작은 자신의 감정이 거세된 게 아닌 자신도 모르는 곳에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달리아를 향한 애정과 욕망이 싸락눈처럼 소르륵 쌓여 비어 있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렇게 아픔을 알았다.
자신이 살아 온 삶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아이작이라는 개인으로 여기지 않고 저마다의 욕망을 위해 휘두르기 바빴다. 누구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관심 없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인격적인 존중이 함께해야 가능한 거다. 달리아를 만나기 전까지 아이작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던 그를 사람으로 개화시킨 게 그녀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세상이라던데, 한 번쯤 도련님의 시야로 세상을 보고 싶어요. 나무도 꽃도 모르는 게 없으시니 숲이 훨씬 다채롭게 보일 것 같아서요.’
‘여기 손 잡으세요. 저번에 다친 상처도 아직 다 안 나았는데, 다치면 큰일 나요.’
‘도련님께 안겨 있으면 커다란 침대에 감싸져 있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에는 저보다 작았는데…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