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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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색의 호사스러운 카펫 위로 새하얀 가루가 너울대며 흩어졌다. 

달리아는 멍하니 흐트러진 가루를 쳐다보다가 납작 엎드려 가루를 모으기 시작했다. 의식을 지배하는 건 로렐의 가쁜 숨소리와 무서울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낯빛뿐이었다.

가루를 손바닥으로 반쯤 모았을 때, 그제야 약을 새로 꺼내서 먹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가루를 버리고 다시 약 주머니를 더듬거리는 달리아의 입술 사이로 울음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탄식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일어나, 일어나 봐. 로렐… 일어나 봐…!”

떨리는 손으로 흐느적거리는 로렐을 억지로 앉혔다.

발작과 함께 토혈을 한 건지 입 주변이 피거품으로 엉망이었다. 소매로 대충 입가를 닦고서 로렐의 머리를 붙잡아 코 밑에 가루를 댔다.

발작이 일어났을 때에는 최대한 빨리 몸을 세우고 약을 흡입해야 했는데. 쌕쌕거리는 소리가 한계를 넘기 전에 약을 줬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로렐이 가루를 흡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붉어진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손을 들어 로렐의 뺨을 짝짝 때렸다. 눈꺼풀이 달싹이는 걸 놓치지 않은 달리아가 조금 더 세게 로렐의 뺨을 때리며 코에 가루를 들이밀었다.

“로렐! 제발, 정신 차려 봐! 조금만… 빨리, 약…! 빨리…!”

자꾸만 까라지는 고개로 인해 코와 입 주변에 하얀 가루가 덕지덕지 붙었다.

아무리 흔들고 때려도 로렐은 어깨를 들썩이기만 할 뿐 약을 들이마시지 못했다. 달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로렐의 턱을 치켜들었다.

“로렐 벨로흐! 정신 차려! 로렐!”

“……흐, 끄으…”

로렐이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아주 조금, 약을 들이마셨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숨이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파리해진 안색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조금 더 약을 흡입하라 재촉했지만 이미 발작으로 통제를 잃는 육체는 달리아의 바람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바보 같이… 왜, 왜 잠이 들어서는…!”

로렐을 침대에 기대놓고서 기관실이 있는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역 내에 진입한 듯 속도를 늦춘 기차가 덜컹거리며 요란하게 진동했다. 객실 문고리를 붙잡으려던 순간, 흔들림으로 인해 다리가 크게 휘청였다.

“윽…!”

넘어지면서 입술을 부딪쳤는지 송곳니 부근에서 쓰린 아픔이 느껴졌다. 더듬더듬 바닥을 짚고 일어난 달리아가 다친 입술을 한 번 어루만지고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건 손가락에 묻은 자신의 피보다 그 아래, 군데군데 얼룩진 하얀 가루약이었다.

벌떡 일어나 객실 문을 열었다. 좁은 복도를 지나 기관실 앞에 다다른 순간 치이익, 소리와 함께 기차가 완전히 멈췄다.

달리아는 기관실 문을 두드리며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요! 여기! 여기 좀 도와주세요!”

쾅쾅, 부서트릴 것처럼 문을 두드리자 처음 기차에 올라탈 때 객실을 안내해 준 직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표정의 직원을 붙잡고서 달리아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동생이 아파요! 약을, 아니, 당장 의원에게 데려가야 해요!”

“진정하세요, 레이디. 현재 객차 내에는 의사가 없습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아무 데나 내려 주세요! 지금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차마 말하지 못한 말이 울음으로 화해 입술을 뚫고 새어 나왔다. 시야가 흐려졌다 느낀 순간 묵직한 절망이 달리아의 발을 잡아끌었다.

직원의 팔을 붙들고서 눈물만 뚝뚝 흘렸다. 무릎이 휘청인 순간, 그녀에게 붙들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직원이 간신히 달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 막 수도 역에 도착했습니다. 진정하시고, 아마 역 구내에 비상 의료실이 있을 텐데 거기라도 가 보시면.”

“역, 안에… 의사가 있나요?”

젖은 목소리로 띄엄띄엄 묻자 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벙긋거린 채 말이 되지 못한 울음소리를 내뱉던 달리아가 천천히 그의 손을 놓고 돌아온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제멋대로 걷는 모양새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아주 볼품없었다. 쓰러질 것 같은 몸뚱이를 간신히 추스르며 객실 안으로 돌아와 침대 앞에 섰다.

“로렐. 로렐…”

로렐은 눈을 꼭 감은 채 쉴 새 없이 가슴을 펄떡이고 있었다. 희게 질린 얼굴과 미동조차 없이 굳게 감긴 눈동자에서 망자의 그림자가 짙게 묻어났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가… 가야 돼. 나가야 돼. 의료실, 의료실…!”

달리아는 입을 일자로 다문 채 흐린 눈으로 로렐을 쳐다보다가 서둘러 동생을 업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짐들을 질질 끌면서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객실 밖을 향해 걸었다.

왜 잠이 들어서.

바보 같이. 왜 하필, 그 잠깐 사이에 발작이 와서.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턱에 방울져있다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목덜미를 축축하게 적셨다.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어떻게든 역사 아래로 발을 뻗었다. 그렇게 땅에 발을 디디려던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짐짝들이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떨어진 짐을 밟자 균형을 잃은 몸이 옆으로 휘청였다. 등에 엎어 맨 로렐이 걱정되어 몸을 틀지도 못했다.

차마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몸이 바닥에 털푸덕 엎어졌다.

“아윽!”

단단한 벽돌 바닥은 객실 내에서 넘어졌을 때보다 훨씬 더 격렬한 아픔을 전했다.

홧홧한 통증이 얼굴을 괴롭혔지만 달리아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로렐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쓰러질 때 바닥에 쓸린 건지 뺨 한쪽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상처 난 뺨을 쓸었다. 로렐은 아프지도 않은지 눈을 감은 채 얕은 숨만 내뱉기를 반복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 아래, 제멋대로 튀어나온 짐들이 지저분하게 시야를 메웠다.

모두 다 엉망이었다.

온몸이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로렐을 살릴 사람은 자신뿐이니까.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망막에 서려 있던 막이 점점 더 뿌옇게 변하고 비강 안쪽으로 용암 같은 열기가 울컥 솟아올랐다. 임계를 넘어선 울분이 밖으로 분출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아아아……!”

왜, 왜 나한테.

왜 나한테만 이래.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한테만.

내내 참아왔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로렐을 끌어안고서 아파 보이는 뺨에 얼굴을 묻었다.

짐승 같은 절규가 귓전을 때렸다. 그게 자신의 울음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한시가 촉박한 상황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의 슬픔도 목놓아 부르짖을 수 없다는 현실이 또 서러워 울었다.

자신의 남은 삶이 이렇게 괴로운 일의 연속이라는 걸 진작부터 알았다면.

어머니를 따라갔을 텐데.

차라리, 그 전쟁통에 함께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조금의 희망도 용납하지 않는 삶이 지긋지긋했다. 손안에 담긴 체온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이마저도 앗아가려는, 그것도 이렇게 비참한 형태로 사그라들어야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는. 왜 우리는.

꺽꺽거리는 울음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얗게 백지가 된 머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때문에, 달리아가 소리를 인식한 건 바로 코앞까지 이르러서였다.

웅웅거리는 소음 사이로 뚜벅거리는 낮은 발소리가 이어졌다.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조금 더 둔탁한 발소리 여럿이 구둣발 소리 너머 낮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발소리가 멎었다. 바닥을 향해 있던 흐릿한 시야 끝에 누군가의 구두가 비쳐 보였다.

눈물을 떨궈 시야를 맑게 하자 흠 하나 없이 광택이 도는 까만 구두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은장 버튼이 포인트로 달린 구두는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의 옷 시중을 들면서, 열심히 닦아 광택을 내던 구두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으, 흑……”

그럴 리가 없는데.

이곳에 그가 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시끄럽고 정신없는 기차역 한복판에서, 제멋대로 흐트러진 짐짝 앞에 주저앉아 죽어가는 동생을 붙들고 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찢어진 입술이 아렸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눈시울이 쿡쿡 쑤셨다.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빈곤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형편없는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못난 자신에게 그가 이렇게 다가올 리가 없었다.

꿈이었다. 아니면 자신이 이미 죽어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거겠지.

“달리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새어 나온 이름이 자신을 지칭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막혔다.

생동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건 꿈도 죽음도 아닌 현실임을 알리고 있었다.

안도와 절망과 수치가 해일처럼 몸을 휩쓸었다.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줘 그를 부르려 했지만 나오는 건 비명 같은 울음뿐이었다.

탁한 시야 속에서 구두의 주인이 몸을 내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 큼지막한 손이 뺨을 스쳐 눈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말해.”

감정도 속내도 느껴지지 않는 나지막한 저음이 대답을 종용했다.

뭘 말하라는 건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돌아가자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딱 한 마디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내다 버렸다고 생각한 최후의 자존심이 어느샌가 떠올라 대답을 내놓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잖아.”

눈가를 쓸어내리던 손이 턱으로 내려왔다. 부드럽게 턱을 들어 올리는 손길이 꼭 이전처럼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눈물로 가득 찬 시야 너머로 그립고 그리웠던 그의 모습이 들어찼다. 무감한 얼굴 위, 슬쩍 접힌 눈매 속에 끅끅대며 우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말해. 어서.”

모든 걸 포용해 줄 듯한 다정한 목소리에 최후의 자존심이 무너져내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턱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달리아는 그를 바라보며 온 힘을 쥐어짜 입을 열었다.

“도와… 도와주세요,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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