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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 같은 번호의 기차가 또 있나 찾아봤다. 표와 기차번호를 여러 번 대조했지만 같은 번호는 눈앞의 기차뿐이었다.
분명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물어보기라도 할까.
달리아는 숨을 들이마시며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 앞에 다다르기 전, 혹시 무시당할까 봐 구겨진 기차표를 다시 예쁘게 폈다. 그렇게 기차표를 내미는 손에 망설임이 가득 서려 있었다.
“저기… 이게 이 기차표가 맞나요?”
“3362… 아, 예. 맞습니다. 어서 탑승하십시오.”
표를 확인한 직원이 환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두 사람을 기차에 태우더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달라 친절히 설명하고서 순식간에 기관석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잘못 알았다고 면박당할 줄 알았는데.
달리아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끌어안고 있던 짐을 만지작거렸다.
“언니. 여기 진짜 좋다.”
로렐은 기침을 내뱉는 와중에도 눈을 반짝이며 연신 내부를 훑었다.
그 말대로, 기차 안은 겉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벨벳으로 된 소파와 비싸 보이는 테이블이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칸으로 나눠진 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태까지 타고 다니던 기차와 너무 달라서 기차라고 해야 할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승객이라고는 달리아와 로렐 두 사람뿐이었다.
“우와, 의자도 엄청 푹신푹신해.”
달리아는 거침없이 소파에 주저앉는 로렐을 보고 주의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깊이 고민했다.
정말 이 기차가 맞는 걸까. 그렇게 한참 동안 불안한 눈으로 문과 창밖을 쳐다보다가 삐이익,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마지못해 짐을 내려놓았다.
“이런 기차 처음 타 봐. 이거 정말 아주머니가 예약해 주신 거야?”
신발을 벗어 던진 로렐이 침대에 기어 올라가 창틀에 턱을 괴었다. 달리아는 로렐의 모자를 벗겨주며 침대 끝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갈 때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좋은 기차인 줄 몰랐어. 언니도 이런 건 처음 타본다.”
평소 기차를 탈 때도 일등석은커녕 이등석도 비싸 일반석 남은 자리를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양도받아 타고 다니던 달리아였다.
그런데 이렇게 널찍하고 침대까지 딸린 기차를 타다니, 한 편으로는 들뜨고 기뻤지만 마고 부인이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브랑에 있던 마고 부인의 여관은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고급스럽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곳에서 평생 일하며 돈을 모아왔을 텐데 고작 반년밖에 알지 못한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배려하다니…
깊게 주름이 새겨진 부인의 눈매를 떠올리니 물 위에 낙엽이 떨어진 듯 무겁고도 잔잔한 파문이 가슴에 일었다. 달리아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역내를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또다시 돈을 벌 수 있으면.
반드시 꼭. 부인에게 보답해야지.
속으로 다짐한 뒤 로렐의 손을 낚아챘다.
“이제 출발하려나 보다. 이쪽으로 와. 눕자.”
“조금만 더 구경하면 안 돼?”
“안돼. 조금 달렸다고 벌써 숨이 쌕쌕거리잖아. 베개 높여 줄 테니까 누워서 구경해.”
싫다며 옆으로 도망치려던 로렐이 갑자기 가슴을 누르더니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에 달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로렐을 억지로 침대에 눕혔다.
기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목 깊은 곳에서 그륵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썩 좋은 징후가 아니었다.
“우리 수도에서 내려?”
차창 너머에 시선을 두고 있던 로렐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으음, 고민하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 구빈원 애들한테 그거 들었어.”
“뭘?”
“수도에는 동물들을 모아 놓은 공원이 있대… 돈만 내면 모든 동물을 구경할 수 있다고. 코끼리도 있어서, 매니토가 수술 끝나면 코끼리 보러 갈 거라고 자랑했는데.”
“그랬어?”
“응. 사실 원장님이 나 대신 매니토 데리고 간 것보다는 그게 더 서운했어. 나도 거기 가 보고 싶었는데…”
“…….”
“저번 겨울에 구빈원 애들 전부 서커스 구경갔는데, 난 아파서 못갔잖아. 다들 코끼리 보고 사자도 보고 왔다고 했는데 나만 못 보고.”
저번 겨울이라면 급작스러운 발작 때문에 내내 침대에 누워있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휴가를 나온 달리아도 로렐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 계속 그녀 곁에 붙어있어야 했다. 텅 빈 구빈원에 남겨진 두 사람은 서커스 같은 거 사실 별로 재미없을 거라고 거짓말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동물원 갈까?”
혈흔이 묻은 수건을 빤히 바라보던 달리아가 평온한 얼굴로 손수건을 새로 꺼냈다.
로렐이 입을 벌린 채 방금 한 말이 사실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응. 어차피 수도에서 하루 이틀 있을 거니까. 가고 싶으면 가야지. 언니도 동물원 안 가봤는데 가면 좋겠네.”
늘 파리한 빛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던 로렐의 얼굴에 환한 꽃이 피어났다. 달리아는 그에 지지 않도록 한껏 입매를 추어올리고서 가파르게 맥동하는 동생의 가슴을 조용히 쓸었다.
“가고 싶은데 다 가보자. 먹고 싶은 것도 다 사줄 테니까…”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까지.
원한다면 모두 해 주고 싶었다. 원래부터 동생을 끔찍이 아꼈지만 나날이 약해가는 모습을 마주하고서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까 두려워 뭐든 해 주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차를 타기까지. 손수건 세 장이 피로 흠씬 젖어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이렇게 기침하며 각혈을 하는 게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심한 천명으로 몸이 경련하는 것도, 씨근대는 숨소리조차도 일상이 되어 더 이상 아무런 슬픔도 주지 못했다.
이러다 어느 순간 휙 사라져버리면 어떻게 할까.
갑자기, 눈을 뜨지 않으면…
“조금 자. 도착하면 언니가 깨워줄게.”
아니. 이제 그럴 일 없으니까.
병원비만 얻을 수 있으면. 로렐도 매니토처럼 수술할 수 있으면… 괜찮을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뇌리 바깥으로 몰아내며 조금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느새 출발한 기차의 경적 소리가 안온한 평온 속에 잔잔히 녹아들었다.
* * *
발목을 간질이며 파상하는 물결이 어딘가 익숙했다.
낮게 찌륵대는 소리는 별채 앞에 종종 날아드는 멧도요의 울음소리 같았다. 모였다가 흩어지는 나뭇잎 그림자가 개울 위로 우아한 너울을 드리우고, 그 아래 투명한 물에 비친 자신의 맨발이 보였다.
여기는… 별채가 있던 그 숲인데.
…그렇구나. 꿈이구나.
풍경을 인식하자마자 깨달았다.
꿈이구나.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 그나마 꿈에서라도 달콤한 환상을 보여주려는 거야.
‘춥지 않아?’
그윽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위로 들어 올렸다.
커다란 바위에 그가 앉아 있었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들고 있던 수건을 무릎에 펼쳐놓고서 수건을 툭툭 쳤다.
‘너무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그만 나와, 달리아.’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 밑을 쳐다보던 달리아는 아쉬운 숨을 흘리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바위 근처에 다다르자 아이작이 손을 길게 뻗어 허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자신의 품속에 달리아를 가둬두고서 펼쳐둔 수건으로 젖은 발을 꼼꼼히 닦기 시작했다.
‘도련님. 저기 보셨어요? 물속에 물고기가 엄청 많아요. 은빛 물고기가 반짝반짝해서 계속 쳐다보게 되네요.’
발랄하게 떠들자 그가 발을 닦아주던 손길을 멈추고 느슨하게 입매를 끌어올렸다. 근사한 미소 위에 자리한 까만 눈동자가 불순물 하나 없이 말간 빛을 띠고 흘깃 자신을 투영했다.
‘그거 알아? 그 물고기 몸에서 엄청 달콤한 향기가 나는 거.’
‘정말요?’
‘과일 향하고 비슷한데… 응, 이런 거.’
살짝 벌려진 입속으로 차가운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입을 오물거리자 차갑고 달콤한 맛이 은은히 퍼져나갔다.
물고기에서 수박 냄새가 난다니. 거짓말도 참.
푸스스 웃으며 수박을 씹었다. 그러자 정수리 위로 묵직한 무게와 함께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안 믿네. 정말이라니까. 다음에 잡아줄 테니까 한번 확인해 봐.’
그윽한 웃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바위에 늘어져 있던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길게 흉진 상처를 가만가만 쓸다가 그대로 정수리 위까지 들어 올린다.
습한 숨결이 상흔을 배회했다. 지그시 손등을 누르는 부드러운 감촉은 분명 그의 입술이었다.
자신의 입술을 머금고, 가슴을 깨물며 닿지 말아야 할 곳을 유린하던 입술이기도 했다.
상처를 더듬는 입맞춤이 조금 더 농밀해지자 그와 함께했던 노을빛 정경이 떠올라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닿을 듯 말듯 송곳니로 상처를 짓누르던 아이작이 슬쩍 눈매를 접어 눈빛에 응했다.
“……으…”
눈동자에 서린 흑빛 농담이 조금 더 진해졌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미려한 그늘을 드리우고, 손등을 지분거리던 손이 부드럽게 내려와 달리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흐, 하아…!”
가늠하듯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내려온 눈꺼풀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솜털 하나하나 올올이 비치는 거리까지 다가와 뜨거운 숨을 흩뿌린다.
그리고 곧, 비스듬히 틀어진 입술이 낙인을 새기듯 지그시 자신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하… 끄흐… 아, 하아…!”
상황과 어우러지지 않는 불쾌한 신음 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상체를 벌떡 들어 올려 앞을 쳐다보았다. 커튼이 쳐진 차창 너머로 시가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여긴 어디지?
아, 기차.
언제 잠든 거지? 얼마나 잔 거야? 로렐은? 아직 도착하려면…
찰나의 순간 숱한 의문들이 떠올라 달리아의 의식을 환기시켰다. 그렇게 옆으로 고개를 돌려 침대에 엎드려 끙끙대는 로렐을 본 순간. 모든 의문이 사그라들었다.
“로렐…?”
양손으로 가슴을 누른 채 식식거리는 숨만 간신히 내뱉는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귀가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모습. 이대로 내버려 두면 곧 새파랗게 질리면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된다.
발작이었다.
달리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일어나 로렐의 얼굴을 붙들었다.
“로, 로렐! 로렐!”
“…헉, 언, 으…… 끅…”
“언제부터 이랬어! 잠깐, 잠깐 기다려! 언니가 약…!”
본능에 의지해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손으로 가방을 풀고 가장 위에 담겨있던 약 주머니를 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루약을 집어 들었다.
최대한 빨리 흡입할 수 있도록 가루를 코에 대야 한다. 그렇게 약 봉투를 연 순간.
덜커덩, 소리와 함께 열차가 속도를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