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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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아는 할 말을 잃은 채 울고 있는 로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원래도 눈치가 빠른 로렐이니만큼 동생 앞에서는 늘 태연한 척하려 애썼다. 돈 얘기는 절대 엄금이었고 늘 희망적인 이야기만 읊어댔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항상 나 때문에… 고생만 해. 언니는 아무것도 못 해. 이럴 거면, 그냥, 나 같은 거…”

“언니 돈 있어.”

울렁이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애쓰며 마른 침을 삼켰다.

울분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이성의 끈을 놓고 감정적으로 몰아세울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울음을 삭히기 위해 한껏 힘을 준 목덜미에 바짝 핏대가 솟아오른 게 느껴졌다. 달리아는 일그러진 눈매를 바로 하기 위해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언니… 돈 있어. 너 고칠 수 있어.”

“또 거짓말해. 언니 그렇게 계속 거짓말만 하면…”

“거짓말 아니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한 외침이 주변을 휘돌다 파도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달리아는 로렐의 몸을 당겨 단단히 끌어안고서 한 자 한 자 강하게 말을 뱉었다.

“너… 고칠 수 있어. 절대 안 죽어. 언니가 절대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무슨 짓을 해서도 살릴 거니까.”

“…언니. 나…”

“조용히 해! 죽느니 사느니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네가 언니한테, 나한테 얼마나…!”

치솟는 감정이 눈물샘을 연신 자극했다. 의연해지고 싶은데 자꾸 눈물을 터트리게 한다.

돈. 수술.

죽음을 당연하다는 듯 입에 담는 로렐과 미래가 없는 현실.

벙긋거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숱한 후회와 각오 끝에 절대 입에 담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그를 기어코 입에 올린다.

“도와줄 사람 있으니까.”

…이렇게, 결국.

그녀를 잊지 않을 사람, 구원해 줄 이라고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달리아는 이를 악문 채 발랄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언니가 공작님하고 친구인 거… 로렐도 알고 있지? 그분이 도와주실 거야. 여기 올 때도 도와주셨으니까,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주실 거야.”

등을 토닥이며 밝은 목소리로 말하자 로렐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 속에 달리아를 닮은 초록 눈동자가 희미한 기대를 품고 그녀를 투영하고 있었다.

“정말?”

“정말이야. 공작님은 엄청 부자거든. 로렐의 병원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언니랑 아주 친하니까 꼭 우리를 도와줄 거야.”

무릎 위에 놓인 작은 주먹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달리아가 입매를 힘차게 추어올렸다.

힘들 때마다 억지로 웃어야 했던 습관이 이럴 때 도움이 된 건지, 로렐은 거짓 웃음이라 생각지 않고 똑같이 따라 웃어 보였다.

달리아는 소맷자락을 당겨 엉망이 된 로렐의 얼굴을 닦았다. 지저분하게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까지 깔끔하게 뒤로 넘기자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귀여운 얼굴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더 입꼬리를 위로 당기며 달리아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니는 거짓말 안 해. 특히 불가능한 거짓말은 절대로 안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로렐은 건강해지는 것만 생각하자. 알았지?”

“…응.”

“그럼 가서 밥 먹자. 게 요리 말고도 로렐이 좋아하는 거 이것저것 사 왔으니까… 먹고 약 먹어야지. 벌써 저녁이야.”

로렐을 끌어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싹 마른 몸은 딱히 힘주지 않아도 쉽게 이리저리 끌려왔다. 달리아는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로렐에게 입혀 준 뒤 앞서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작은 등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점이 되어 여관 속으로 빨려들 듯 자취를 감췄다. 노을 진 풍경을 천천히 훑어보던 달리아가 고개를 틀어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황혼이 온 세상을 찬연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수평선 끝, 유난히 빛이 반짝이는 부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달리아는 바짝 힘주고 있던 얼굴 근육을 서서히 풀었다.

그를 입에 담고야 말았다. 결국 삶에 져버리고 말았다.

“힘들어…”

속내를 흘리며 노을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인데도 눈에 담기는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보는 노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한때는 그 이유가 광활한 풍경이나 자유로 인한 홀가분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이곳에서 보는 노을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저 노을 자체를 아름답게 인식하게 된 것뿐이었다.

노을을 보고 있으면 그 날이 생각나서.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자신을 안아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끌어안는 두꺼운 팔뚝이, 하염없이 입술을 탐하던 그 애절한 얼굴이, 가슴을 치대는 부드러운 흑빛 머리칼이.

석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에게 안겨있던 모든 순간들이 몸을 둘러싸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잠기게 했다.

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감상에 빠져 아스라이 떠오른 그의 형상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수평선으로 손을 뻗고 나서야 이 모든 게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현실로 부상한다.

그를 잊으려 무던히 애썼다. 정부니 자격이니 운운하며 그를 박차고 나와 이 자리에 섰다. 무슨 염치로 과거를 그리워하는지 스스로가 창피해 입술을 깨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서로 다른 길을 가니까.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입장이니까. 약해질 때마다 자꾸만 그에게로 향하려는 마음을 그렇게 몇 번이고 다잡았다.

그러나, 다시 이 꼴이었다.

“결국 이럴 거면서.”

눈시울이 저릿해지고, 감각을 깨닫기도 전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궁지에 몰리니 참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을 입에 올리는구나.”

감정, 사랑, 미련. 전부 아무래도 좋았다. 백지가 된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한 사람이었다.

기댈 곳은 그뿐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다 내줄 것처럼 구는 사람이라고는 평생에 아이작 한 명뿐이었으니까.

눈꺼풀을 깜빡여 고여 있던 눈물을 떨궜다. 맑아진 시야 속에서, 해질녘의 마법 같은 풍경 속에서 그가 서 있었다.

이제는 지겨워진 신기루를 응시하며 달리아가 비틀려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꼴 좋네. 달리아 벨로흐… 그렇게 도망쳐 나와서, 혼자 잘살 것처럼 도도하게 굴더니, 꼴 좋다.”

비난과 실소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멍청하기는. 순결한 척 고결한 척하면서 챙길 건 다 챙겨왔잖아.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려고. 무슨 낯짝으로 돌아가려고…!”

헉헉, 들썩이는 가슴과 거친 호흡이 제 것이라고 느낀 순간,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스스로의 존재가 부끄러워졌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달리아가 입안을 씹은 채 노을빛을 등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목을 붙드는 모래로 인해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다. 털썩, 모래사장에 쓰러진 달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투둑, 툭. 굵은 눈물이 금빛 모래 위로 떨어지며 어두운 얼룩을 남겼다. 초라한 눈물 자국을 눈에 담은 순간, 단단히 붙잡고 있던 자존감의 윤곽이 힘을 잃고 무너져내렸다.

“……흑…”

아아. 입속을 배회하던 외침이 흐느낌 섞인 신음 소리로 변해 귓가를 자극했다.

모래를 움켜쥐고 있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흔들리는 게 주먹인지 시야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웃기지 마! 왜 나한테…! 왜! 더 이상 뭘 포기하라는 거야! 뭘 체념하라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는데.

“이렇게 살아왔으면 적어도 한 번쯤! 한 번쯤은 뺏어가지 말아야지! 그렇게 굽신거리면서 살아왔는데 적어도, 적어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비굴하지 않게 해 줬어야지!”

부모도 고향도 다 잃어버렸다.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 로렐만 남았는데.

그 애 하나 살리기 버거워서 이제는 자신의 자존감까지 팔아넘겨야 한다. 잘난 체하며 기만하며 떠나온 그의 품으로 또다시 기어 들어가 자비를 구걸해야 했다.

“창부나 정부나, 결국 이게 그거랑 다른 게 뭐야! 그렇게… 그렇게까지 날 괴롭히고 싶어? 차라리 죽여! 날 죽이고 로렐을 살리면 되잖아! 차라리, 차라리…!”

그래, 차라리.

다 죽으면 끝나지 않을까.

사실 이 삶은 다 거짓투성이고 죽으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할 리가 없지. 신이 있으면 이렇게까지 삶을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엘리제 지락탈을 떠올렸다.

놀라울 만큼 우아하고 화려한 여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뺨을 후려치던 그녀의 모습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냉정하고 초연했다.

뺨을 마비시키는 통증보다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그녀의 시선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순간 느꼈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과 불행을 나눠서 인생을 설계하지는 않았을 테지.

그랬다. 신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일그러진 얼굴 아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어린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달리아는 무너지듯 모래사장에 몸을 웅크린 채 하염없이 울었다.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이성은 자기연민에 빠진 스스로를 연신 비하해대고 있었다.

전쟁터를 도망쳐 나오면서 삶의 위대함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친 달리아 벨로흐는 절대 스스로 목숨 따위 끊을 위인이 아니라고. 뻔뻔한 얼굴로 아이작 앞에 동생을 끌고 가서 이 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할 거라고.

그가 자신을 여전히 사랑할 거라 확신하고서 못 이기는 척 그를 이용할 거라고.

“이럴 바에는, 이렇게 살 거면 왜…”

뻔뻔하고 치졸했다. 그러나 결국 그를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그가 부인이 있더라도. 정부랍시고 혐오 어린 시선을 받는다 해도 결국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로렐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제멋대로 들썩이던 호흡을 천천히 정돈했다. 긴 날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털썩 주저앉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석양으로 시선을 향했다.

‘사랑한다고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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